목회칼럼-목회,천천히 가자
목회 칼럼
목회, 천천히 가자
신학을 처음 시작할 때 저의 꿈은 세계적인 명설교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신대원을 다니면서 만 명 정도 되는 교회의 목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은 후 2-3백 명 정도 되는 교회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를 써주는 교회만 있어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합니다. 꿈이 작아진 것인지, 진정한 자리로 돌아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는 30세에 세계 100대 대학에 드는 명문대학인 중국 상하이의 푸단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다 암 말기 판정을 받아 운명한 위지안이 생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쓴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저자가 기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삶과 종교관에서는 다른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둔 저자는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통해 인생을 다시 쓰기 시작합니다. 앞 만 보고 성공을 향해 달려갈 때 발견하지 못했던 일상의 가치와 가족의 소중함을 배웁니다.
"우리는 뭔가를 잡기 위해서는 아주 먼 곳까지 전속력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믿으며, 십중팔구 그런 믿음이란 '턱도 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끝끝내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야, 혹은 모든 게 끝난 뒤에야 그보다 훨씬 값진 일을 지나쳐버렸음을 후회하곤 한다."
"사람은 갑작스럽게 큰 고통에 직면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된다는 것을."
"그렇게 느닷없이 팽개쳐진 운명이, 그날 이후 나의 삶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맞아, 좀 더 여유롭고 평화로워지기 위해서는 삶의 곳곳에 빈틈이 있어야 하는 거야."
"삶은 강철 같은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아울러 새들의 날개짓만으로도 춤출 수 있는 갈대의 부드러움도 꼭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내 꿈을 이루고 나면 사랑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질 거라 여겼었다. 그러나 새싹이 자라 나무가 되기까지는 엄마 품 같은 햇빛이 늘 필요한 거였다. 내가 틀렸다."
"사랑은 나중에 하는 게 아니라 지금 하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에."
성공을 향해 자신의 몸과 가족까지 희생시켜왔던 위지안은 죽음의 문턱에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되돌아 보게되고, 바로 지금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목회도 그와 같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목회를 ‘성공’이란 잣대로 표현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편견입니다. 목회는 말 그대로 목회(牧會)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라는 말씀대로 ‘나의 양’ 아닌 ‘주님의 양’을 치고 기르는 것이 목회입니다. 목회를 숫자로 평가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속도로 평가하는 것도 위험한 것입니다. 목회는 ‘한 영혼’을 생각하고, 그를 위해서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피흘려 사신 영혼입니다. 목회는 수단이 아닌 목적이어야 합니다. 한 영혼은 목회자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수단입니다.
한 사람이 수단이 된다면, 그 사람을 대하는 목회자의 마음은 본질에서 벗어난 피상적인 만남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저 사람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오면 우리 교회는 성장할 것이다.’라고 그 사람을 이용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양육도, 봉사도, 섬김도, 구제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꼼수가 되고 맙니다. 주님은 이러한 행위를 ‘외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경건히 보이는 옷을 입고, 다른 사람들이 다 보도록 구제하는 행위들입니다. 목회가 수단화 된다는 것은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이 왜곡되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성적 욕망의 결정체로 보았고, 마르크스는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보는 것처럼, 성공신화를 추구하는 목회자의 눈에 한 사람은 성공을 위해 불가피하게 치러야할 희생의 과정으로 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직무유기이자, 직권남용입니다.
성공지향적인 목회가 아니라면 목회는 천천히 가야합니다. 단 기간에 배가 성장이니, 청년부 200% 성장이니 하는 말들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숫자고 평가될 수 없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서 수 천 만원을 낭비할 수 있어야하고, 단 한 명의 불신자를 위해 평생을 허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효율을 따지고 목회하지 않았고, 숫자를 들먹이며 성장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답도 없고 대안도 없는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 피한방울까지 기꺼이 흘렸습니다.
목회는 ‘예수님처럼’ 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용서해야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기도하고, 죽어야 합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는, 와서 죽으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신학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주장에는 천만번 더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주님께서 제자로 불렀다는 것은 주님처럼 살라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군사로 불렀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싸우라는 것입니다. 나의 성공과 평안을 위해서 부르지 않았다는 점은 목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잘 보여 줍니다. 체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에 우리 혁명의 목표가 사람들을 변화 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에 아무 관심도 없다.” 얼마나 통찰력있는 선언인지 모릅니다. 목회는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양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한 영혼의 변화가 목적이라면 불가피하게 천천히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변화는 단박에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인 저도 허황된 꿈을 가지고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하물며 세상 속에서 수많은 유혹과 죄악가운데 노출되어있는 성도들은 얼마나 더디고 성장하기 어려울까요. 한 사람이 온전한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20년 이라는 세월이 지나야 합니다. 하물며 한 영혼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과 물질이 들어가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는 불가피하게 천천히 가야합니다.
백범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의 마지막 말로 이 글을 갈무리할까 합니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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