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연암 박지원과 코끼리
목회칼럼
연암 박지원과 코끼리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사진은 한국경제에서 가져왔으면 열하일기에 대한 소개와 박지원에 대한 소개도 하고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요 학자였던 연암(燕巖) 박지원이 쓴 중국 기행문인 <열하일기>에 기괴한 동물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코끼리다. 지금에야 우리나라에서도 코끼리는 쉽게 볼 수 있는 동물이 되었지만 책이나 방송매체가 없었던 조선시대에 코끼리를 설명하기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연암이 코끼리 모양을 설명한 일부는 보면 얼마나 애를 먹고 있는지를 발견한다.
“그 생김새가 몸뚱이는 소인데 꼬리는 나귀 같고, 낙타 무릎에다 범의 발굽을 하고 있다. 털은 짧고 회색으로, 모습은 어질게 생겼고 소리는 구슬프다. 귀는 마치 구름을 드리운 듯 하고, 눈은 초승달처럼 생겼다. 양쪽의 어금니는 크기가 두 아람이나 되고, 길이는 한 자 남짓이다. 코가 어금니보다 더 길어서 구부리고 펴는 것은 자벌레만 같고, 두르르 말고 굽히는 것은 굼벵이 같다. 그 끝은 누에 꽁무니처럼 생겼는데, 마치 족집게처럼 물건을 끼워가지고는 말아서 입에다 넣는다. 혹 코를 주둥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어, 다시금 코끼리의 코가 있는 곳을 찾기도 하니, 대개 그 코가 이렇게 길 줄은 생각지도 못하는 것이다. 간혹 코끼리는 다리가 다섯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혹은 코끼리 눈이 쥐눈과 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대개 온 마음이 코와 어금니 사이로만 쏠려서 그 온 몸뚱이 가운데서 가장 작은 것을 좇다 보니 이렇듯 앞뒤가 안 맞는 비유가 있게 된 것이다. 대개 코끼리의 눈은 몹시 가늘어 마치 간사한 사람이 아양을 떨 때 그 눈이 먼저 웃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그 어진 성품이 바로 이 눈에 담겨 있다.”
생소하기 그지없는 코끼리를 설명하기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중에서고 가장 큰 문제는 상아와 긴 코였다. 다른 부위는 조선의 동물을 끌고 와서 그런대로 설명을 할 수 있었지만 상아와 코끼리는 지금까지 보아온 여느 동물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난처한 것은 코끼리 코의 용도였다. 코는 숨을 쉬기 위해 필요하지만 코끼리 코는 숨을 쉬는데 사용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데 사용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빨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곳에 쓸 만한 곳도 없는 상아는 그 용도에 있어서 설명하기 난처했다.
“그대가 말하는 이치란 것은 소나 말, 닭이나 개에게나 해당할 뿐이다. 하늘이 이빨을 준 것이 반드시 고개를 숙여 물건을 씹게 하려는 것이라고 치자. 이제 대저 코끼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어금니를 심어 주어 장차 땅으로 숙이려고 하면 어금니가 먼저 걸리게 되니, 이른바 물건을 씹는 것이 절로 방해되지 않겠는가?”
발은 걷고 달리기 위해 필요하고, 날개는 몸을 덮고 날아가는데 필요하고, 눈은 보는 데 필요하다. 이빨은 씹는 데 필요하다. 지금까지 보아온 동물들의 지체와 용도는 서로 다르지 않다. 그러나 코끼리는 예외다. 코는 숨 쉬는 데 만 사용하지 않고, 윗니(상아)는 씹는데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동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예외이니 지나쳐 버리기에는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 코끼리에 얽힌 이야기는 고대 전쟁 가운데 종종 언급된다. 그 중에서 한니발이 로마를 공격할 때의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한니발은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로마군과 접전을 하게 된다. 로마군은 처음 보는 코끼리 떼에 당황하여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비록 후에 한니발에게 보복을 하지만 말이다.
연암의 코끼리 이야기는 사물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안목(眼目)으로 볼 것은 두고 한 말이다. 연암의 말을 조금 더 인용해 보자.
“코끼리가 범을 만나면 코로 쳐서 이를 죽이고 마니 그 코는 천하에 무적이다. 그러나 쥐를 만나면 코를 둘 곳이 없어 하늘을 우러르며 서있는다. 그렇다고 해서 장차 쥐가 범보다 무섭다고 말한다면 앞서 말한 바의 이치는 아닐 것이다.”
동물의 왕 중 왕인 사자도 코끼리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코끼리의 긴 코로 사자를 후려치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만다. 사자는 코끼리를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미천한 생쥐는 코끼리의 가장 무서운 적이다. 널따란 코에 생쥐가 들어가면 코끼리를 길길이 뛰다 결국 죽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생쥐가 사자를 능가하는 동물의 왕인가? 아니다. 코끼리는 역설과 아이러니 그 자체다. 연암은 마지막으로 <주역>을 언급하면서 처음 모든 것이 ‘혼동’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가 이해하고 일정한 공식에 대입하고 풀고 있는 것은 자연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이 세상에는 아직 해석되지 아니한 수많은 기호와 수수께끼들이 널려 있다.
2008년에 출간된 경제서적인 <블랙스완>이란 책을 보면, 재미난 이야기가 나온다. 스완은 백조이다. 백조는 이름이 보여주는 대로 ‘흰색의 새’다. 그런데 유럽인들이 18세기 오스트레일리아에 들어갔을 때 지금까지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발견을 하게 된다. 그것은 ‘검은 백조(The BLACK SWAN)’의 발견이다. 이것을 무시할 수는 있지만 부정할 수는 없게 되었다. 저자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는 세계는 지금 블랙스완의 발견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학자들은 블랙스완을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버린 전환적 사건 등을 일컬을 때 이 표현을 사용하게 되었다. 연암의 코끼리와 블랙스완의 의도는 다르지만 공통점은 예측할 수 없는 뭔가의 출현이라는 것이다. 연암의 코끼리는 새로운 위기이자 기회이다. 새로운 세상에서는 해묵은 편견으로 살아갈 수 없다.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새로운 세상에는 새로운 안목과 새로운 적용이 필요하다.
연암은 코끼리를 통해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우주의 모순된 현상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한다. 주관적이고 편협한 인간의 사고만으로 모든 우주를 해석할 수 없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고린도전서 2: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주님께서도 친히 구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12: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의 구원은 수수께끼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종종 우리의 사고와 영역을 초월하고 능력의 범주를 뛰어 넘는다. 홍해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래 출애굽을 했고, 홍해 앞으로 인도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앞은 홍해가 길을 막았고, 뒤편에는 애굽의 전차부대가 시시각각으로 거리를 좁혀 오고 있다. 그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라곤 고작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애굽의 생활에 익숙했던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한다. 과거생활에 집착하고 연연하는 한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다. 아무리 검은 백조가 들판을 뛰어 다녀도 눈을 감아 버린다.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죄인들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없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방법은 추론이나 경험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거듭나지 않으면 들어가지 못할 뿐 아니라 ‘볼 수’도 없다.
영적인 것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편견과 고집을 버리고 부드러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성령은 우리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는 분이다.
에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부드러운 마음이란 하나님의 음성을 왜곡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상황을 뛰어넘어 역사(役事)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었다. 몇 발치의 앞도 보지 못하는 양은 목자가 왜 골짜기와 산을 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익숙한 초원에 안주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양식이 떨어진 초원은 더 이상 생존의 근거를 제공하지 못한다. 이럴 때 목자는 골짜기를 넘어 다른 초장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 때 양이 기대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그들을 인도하는 목자이다. 불편하고 힘든 상황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이 시작되었다는 단서이다. 그것이 생전 처음 보는 코끼리 앞에 서있는 듯한 황당함이라고 할지라도 끝까지 주님의 신실하심과 일하심을 의심하지는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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