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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13장-암논과 요나답

샤마임 2010.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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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3장 암논과 요나답 - 불의한 친구의 조언과 몰락

사무엘하 13장 암논의 다말 범죄사건은 다윗의 밧세바 사건의 결과로 이어지는 연장선상에 있다. 이곳에서는 정말 중요하지만 밧세바 사건은 넘어 가기로 하자. 암놈과 친구 요나답의 관계에 주목해보자.

암논과 요나답의 관계

13: 1 그 후에라는 접속사는  앞에 어떤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삼하 12장은 다윗의 암몬의 수도인 랍바를 쳐서 이긴 사건이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자세히 본문을 들여다 보면 밧세가 사건이 랍바를 친 사건의 중간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다. 이것은 다윗의 악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전쟁중인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은 충성스런 군사인 우리아를 자신의 죄을 감추기 위해 죽였다. 그 때는 전쟁 중이었다. 엄청난 병력 손실이다. 그를 죽이기 위해 다윗은 무모한 전술을 사용하도록 요압에게 강요했고-이것은 전쟁을 패하게 할 수도 있다-전쟁 속에서 한 여인을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후에'라는 단어는 분명 하나님의 저주가 이제 막 실행되려는 암시인 것이다.

먼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등장한다. 압살롬은 암놈의 사건으로 다윗을 반역하게 되는 장본인이다. 압살롬에게 한 누이(아마 여동생인듯)가 있다고 소개한다. 그녀의 이름은 '다말(Tamar)'이다. 뜻은 종려나무이다. 분명 아름다운 이름이며 종려나무가 쉼을 주고 꿀은 주듯이 다말이 그러한 존재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윗의 유일한 딸이었기에...... 그러나 유심히 보라 다말은 다윗의 딸로 소개되지 않는다. 그녀는 '압살롬의 누이'이다. 이것은 삼하 저자가 이번 사건은 압살롬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고 사건이 크게 번지게 될 것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다시 암논이 소개된다. 그런데 이곳에서 우려한 대로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라고 소개된다. 이것은 어쩌면 다윗과 압살롬을 서로 다른 개체로 보고 동등한 입장에서 대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의 누이', '.....의 아들'이란 뜻은 소속과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에 다말은 압살롬과 연관이 있으며, 암논은 다윗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암논의 더러운 행위가 다윗의 밧세다 사건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다윗의 아들 암논은 다윗의 또 다른 영적 사생아인 셈이다. 

문제의 발달은 압살롬의 누이인 다말을 '다윗의 다른 아들 암논이 '사랑한 것이 문제다.

전혀 잘못된 사랑이며, 치사율이 너무 높은 독과 같다. 다윗의 부당하게 결혼한 여자를 사랑한 것처럼 암논도 역시 자신의 누이를 사랑한 것이다. 그가 얼마나 사랑했던지 2절에 보면 '울화로 말미암아 병이' 났다고 말한다. 바로 이 때 등장한 인물이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답이다. 놀라운 일이다.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잠깐 등장한 것 말고도 단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시므이가 갑자기 등장한다. 그럼 다윗의 형 시므이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셋째아들이다. 그가 어떤 존재인지는 성경에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무엘이 기름붓기 위해 왔을 때와 여러가지 정황들을 종합해 보면 시므이는 신장이 크고, 용모가 사내답고, 용맹한 장수와 같은 존재인 듯하다. 그렇다면 그의 아들 요나답 역시 그와 비슷한 존재일 것으로 보인다.

사무엘하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역대상에는 다윗의 랍바 점령시 아래와 같은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대상 20:7 그가 이스라엘을 능욕하므로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요나단이 그를 죽이니라 

이름은 분명 요나답이 아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요다답의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높으며, 성경 기자는 그것을 당연시하는 듯하다. 여러 정황들을 살펴 보아도 요나답은 아버지와 같은 용맹스러운 군사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그것보다는 그의 '간교함'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다. 그는 '심히 간교한 자라'고 소개하고있다.(3절)


사건 진행

다말을 사랑하여 병이든 암논에게 친구인 요나답이 찾아온다. 그리고 암논의 사연을 들은 요나답은 그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5절 .... 침상에 누워 병든 체 하다가 네 아버지가 너를 보러 오거든 너는 그에게 말하기를 원하건대 내 누이 다말이 와서 내게 떡을 먹이되 내가 보는 데에서 떡을 차려 그의 손으로 먹여 주게 하옵소서 하라

현재의 시각으로 보면 언뜻 이해가 잘 안되는 이야기이다. 그냥 부리면 되지 굳이 아버지까 동원해서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는 배다른 형제들은 서로 한 집에서 지내지 않았고 많은 왕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다말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아버지 다윗에게 요청하는 것이라고 할 수있다. 암논은 요나답의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하게된다.(6절) 암논의 청을 받은 다윗은 별다른 의심없이 사람을 보내 다말에게 암논을 돌보라고 말한다.(7절)

암논의 집에 온 다말은 암논을 위해서 보는 앞에서 밀가루를 반준하고 과자를 만들어 굽는다. 그리고 그것은 가져다가 암논에게 상을 차려준다. 그러나 암논은 그곳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먹지 않고 주위의 사람들을 다 물리친다.(9절) 그리고 그다말을 자신의 침실까지 오게한다. 그러자 갑자기 암논이 다말을 붙잡고 강제로 동침하게 된다. 다말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더러운 욕망을 포기하지 않고 일을 저지르고 만다.(14절)

일을 끝내고 나자 참 묘한 생각이 암논에게 일어난다. 일을 벌이기 전에 사랑한 것보다 더큰 미움이 그를 엄습한 것이다.

15절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암논의 행동을 통해 암논의 사랑이 얼마나 거짓되고 이기적인가를 보여준다. 암논의 다말에 대한 사랑은 차마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더러운 욕망'에 불과한 것이다. 다말은 자신을 내어 쫓는 암논에게 '나를 쫓아보내는 이 악은 아까 행한 그 악보다 더욱 크다'고 말한다.(16절) 암논은 부리는 종을 시켜 다말을 내어 쫓고 만다.(18절) 이 소식을 결국 다윗과 압살롬이 듣게 된다. 다윗은 이 일에 대하여 심히 분노한지만(21절) 압살롬은 그 사건에 대하여 일체 침묵하고 복수할 날을 기다리게 된다. 20절을 보면 압살롬과 다말의 이야기가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다말이 압살롬의 집에서 '처량하게 지냈다'는 표현은 압살롬이 얼마나 여동생을 안타깝게 보고있는가를 보여주는 시각이라고 할 수있다.

요나답의 조언은 마귀적이다.

요나답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암논은 불의한 욕망으로 다말을 사랑했다. 요나답은 그의 욕망을 풀어주기 위해 답을 주었다. 그런면에 있어서 요나답은 분명 지혜로운 자이다. 그러나 그의 지혜는 간교한 지혜이며, 에덴 동산에서 첫인류를 타락시킨 뱀의 조언이다. 요나답은 어리석은 암논과 같지 않으며, 암논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 무엇이며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가져올 결과들이 어떤 것인지도 어느정도 간파하고 있었다. 삼하 13:32과 35을 보면 요나답은 이미 압살롬의 복수를 예견하고 있었던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도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요나답은 탁월한 혜안의 소유자이다. 요나답이 암논에게 해준 조언이 무엇이란 말인가?

요나답은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다지 큰 잘못을 한 것이 아니다. 단지 암논의 욕망을 풀어줄 방법을 가르켜 주었고, 다윗에게 압살롬이 어떤 마음으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한 답도 주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요나답의 충고가 결코 정당한 것이 아님을 안다. 그는 친정 암논의 좋은 친구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는 않았지만 망하도록 이끈 '발람의 조언'과도 같은 것이다. 친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친구의 욕망을 채워줄 방법만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결코 친구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친구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다만 친구의 욕망을 풀어줄 방법만을 제시해 준 것이다. 그러나 그 조언은 결국 친구를 죽음까지 몰고간다.

진정한 친구사랑이란 단순한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식이 객관성이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정보는 객관적이지 않다. 동일한 정보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사람을 죽이기도하고 살리기도하다. 정보나 지식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정보를 유출하는 사람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존재를 반영한다. 그런의미에서 요나답은 비열한 존재이며, 악마적 존재이다. 요나답의 조언은 어그러진 길의 발람과도 같으며, 에덴동산에서 첫인류를 타락시킨 마귀의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친구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친구라고 소개한다. 예수님이야 말로 진정한 친구이다. 예수님은 무책임하게 다른 친구들을 이용하거나,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요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우리의 이웃이 누군가에 대한 질문 속에서도 주님은 혈육의 관계가 아닌 진심으로 그를 돕는 자가 이웃임을 천명하셨으며, 이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그렇다 우리는 친구를 찾기 전에 우리가 친구가 되어야 하며, 사랑으로 친구를 섬겨야 하는 것이다. 성경 속에서 아브라함은 주님과 동행, 즉 친구로 살았으며, 이삭도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렇게 살았다. 친구란 수단이 아니다. 또한 또다른 어느누구가 아니다. 친구는 나의 믿음의 고백이요, 신앙의 실천대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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