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5:1-12 신들이 무너질 때
신들이 무너질 때
삼상 5:1-12
평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 질문합니다. 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끊이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의 삶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새로운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 묻습니다. 그 물음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나의 문제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해결해 달라는 간구이자 간청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를 주관하셨고, 우리의 상상과 기대를 너머 뜻밖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질수록,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접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너무 낯설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너무 두렵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력으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고, 깊이와 넓이 또한 측량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담을 수 없는 본질적 격차가 있음을 인지하게 됩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타자성’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에는 지식도 부족하고 지혜 또한 없음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사무엘서의 서론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명징하게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영적으로 칠흑같이 어두웠던 사사기 말기에 엘리 제사장이 여호와의 성막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때 레위 지파였던 엘가나의 아내인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또 다른 엘가나의 부인이었던 브닌나는 한나를 조롱하며 비웃었습니다. 한나는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했고, 결국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해 냈습니다. 그 증명이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성막에 바쳐졌고, 엘리 제사장 밑에서 자라게 됩니다. 바로 이때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됩니다. 당시 블레셋은 고도의 철기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 주변에서 블레셋을 이길 민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도 항상 블레셋 민족에게 거의 식민지처럼 살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또 블레셋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자 성막에서 여호와의 법궤를 가져와 전쟁에 나갔습니다. 여호와의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확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이스라엘은 다시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여호와의 법궤마저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늙은 엘리 제사장은 그만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던 엘리와 두 아들은 결국 사무엘의 예언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마저 여호와의 법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깊은 절망에 빠졌고,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슬퍼했습니다. 여호와의 궤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이길 것이라는 자만에 빠져있던 이스라엘은 철저히 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왜 패했을까요? 이스라엘의 잘못을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요구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그런 존재로 인식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오해한 것입니다. 사사기 말기 이스라엘은 깊은 영적 퇴보와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우상들을 섬겼고, 하나님을 가나안의 우상처럼 취급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타락한 삶을 지속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호와의 법궤만 가져가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처럼 숭배되는 것을 거절하셨고, 자신을 이용한 이스라엘에게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용당하지 않으십니다. 엘리는 법궤가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비느하스의 아내 또한 법궤가 빼앗겼다는 사실을 알고 여호와의 영광이 자신들을 떠나갔음을 통탄스럽게 고백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들려져 그들의 섬기는 다곤 신상 안에 전리품으로 전시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그 어떤 군대나 나라도 이기지 못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여호와를 소유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다곤 신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법궤를 다곤 신상에 전리품으로 바쳤습니다. 그들은 아마 전쟁을 마치고 흥에 겨워 술을 마시고 즐거워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다곤 신전에 찾아갔습니다. 아마 다곤 신에게 제사를 드리려는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다곤 신전에 들어갔을 때 그들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다곤 신상이 여호와의 법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습니다. 마치 다곤 신이 여호와께 땅에 머리가 닿도록 절하는 모습과 똑같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다시 다곤 신상을 세워 놓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그 다음 날 또 다곤 신전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제보다 더 기이한 모습의 다곤 신상을 발견했습니다. 이번에는 다신신상의 얼굴이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려져 있었고, 몸과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몸뚱이만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부터 블레셋 지방에 재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이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이’(6절) 그렇게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이 일이 여호와로 부터 일어난 것임을 알고 ‘그의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7절)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 나타난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몇 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좌지우지 당하지 않으신다.
첫 번째, 우리가 명백하고도 조심스럽게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은 절대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한다고 믿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난 지 없고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지켜 주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생각은 하면서,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때처럼 적당히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께 뭔가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대로 조정된다고 착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섬기니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거짓된 숭배를 거절하셨고, 우상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주의해야할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십니다. 또한 우리의 생각대로 조정되지도 않을 뿐더러,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자판기처럼 생각합니다. 얼마의 돈을 지불하고 버튼을 누르면 우리가 원하는 캔이나 음료가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이것을 소위 자판기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2. 우상들은 무너집니다.
두 번째 교훈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패배와 블레셋의 재앙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신을 섬겼지만 다곤만 섬긴 것이 아니라 많은 신을 섬겼습니다. 다곤 신에 더하여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이 소유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년 전에 택시를 탔는데 택시 앞에 여러 모양이 인형들과 묵주, 불상, 그리고 다양한 모습의 신들이 있는 것을 봤습니다. 하도 특이해서 이것들이 뭐냐고 물으니, 자신을 불교신도인데 많은 신을 섬기면 그 중 한 신이라도 자신에게 도움을 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 분 말로 ‘이 중 하나라도 걸리면 좋지 않나요?’라고 했습니다. 즉 어떤 신이라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면 좋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소유될 수 없는 분이며 그들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분은 더더욱 아닙니다.
여호와의 법궤가 다곤 신전에 전리품처럼 취급을 받을 때 하나님은 이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즉시 다곤 신앙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다곤 신을 세웠지만 그 다음날 다곤 신은 여호와를 경배할 뿐 아니라 목과 손목이 부러진 채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신도 자신과 같이 경배 받기를 원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어떤 피조물이나 신이 하나님처럼 경배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1912년 4월 10일, 지금까지 없었던 거대한 배가 영국 사우샘프턴을 떠나 대서양으로 진입했습니다. 그 배의 이름은 ‘거대하다’라는 뜻을 지닌 '타이타닉'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배였습니다. 총톤수는 무려 46,328톤이었고, 전체 길이가 269.1m에 달했습니다. 이런 배는 목포에서는 볼 수 없고, 거제도나 부산항에 가야 볼 수 있는 거대한 매입니다. 최대 속도가 무려 23노트(시속 43km)나 되는 괴물 같은 배였습니다. 사람들은 타이타닉을 보고 절대 어떤 태풍에도 가라앉지 않을 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구명정도 사람 수에 비해 현저히 적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그 배은 처녀항해를 마치지도 못하고 북극에 가까운 대서양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부패한 인간은 너무나 자주 피조물을 신으로 숭배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숭배를 절대 용납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십시오. 18세기 이후 계몽주의와 진화론에 팽창하면서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이 완벽한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9세기는 그야말로 그들의 주장이 확증되는 것 같이 완벽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20세기가 시작되면서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그들은 인간이 얼마나 야만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했고, 그들의 맹신은 처절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인간은 절대 신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신으로 섬겨서도 안 됩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존재도 피조물이 신으로 경배 받는 것을 거절하십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며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이사야 46: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호세아 13:4 그러나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밖에 네가 다른 신을 알지 말 것이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불러 내신 후 십계명을 주셨는데, 그 첫 계명이 바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입니다. 하나님 곁에 다른 어떤 신을 두지 마십시오. 우리의 이성과 생각, 나의 판단과 가치,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물질, 이념 등을 하나님 곁에 두지 마십시오. 그것들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취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파괴하실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마지막이자 결론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말씀하신 방법대로 자신을 섬길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론의 아들이며 제사장이었던 나답과 아비후는 향을 드리다가 다른 불을 사용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불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의 열심과 헌신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해야하고, 극히 조심해야할 것이 있는 데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대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다하며 내 마음으로 드리면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위한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지 않는 방법으로 행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중에 블레셋이 보낸 법궤를 들여다보던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칠십 명이 죽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인간의 호기심의 대상으로 전락시켰을 때 하나님은 그에 응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십니다. 엄위로운 하나님을 경험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이 구절은 사무엘서의 주제이자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느냐에 따라 복을 받기도하고 저주를 받기도 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방법이 무엇인지 성경을 읽고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한 길,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것이며, 하나님의 저주에서 건져낼 것입니다. 헛된 신을 버리십시오. 나도 모르신 사이에 신을 섬겨왔던 거짓된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명철, 우리의 경험, 우리의 의지, 우리의 소유, 우리의 관계, 우리의 인맥, 우리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 오직 보혈의 피를 의지해야합니다.
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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