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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강해] 07.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

샤마임 2020.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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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강해] 07.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


십계명 여섯 번째 계명을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입니다. 신약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저희들로서는 살인이 굉장히 낯설고 이질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의 삶을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살인은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고 쉽게 일어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구약 성경을 봐도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은 적들을 물리지고 그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을 일으키게 했고,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전쟁을 통해 수만 명의 가나안 사람들의 목숨을 죽였습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20장에 나타난 ‘살인하지 말라’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살인의 기원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살인은 창세기 4장의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입니다. 가인은 아벨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자 아벨을 돌로 쳐 죽입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일인데 왜 갑자기 아벨을 죽여야 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가인의 죄가 시작된 좀더 근원적인 사건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창세기 3장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타락의 핵심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보다 자신의 선택, 자신이 직접 지식을 얻으려는 아담과 하와의 의지적 결단의 문제입니다. 즉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방식을 따라 삶을 유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함을 통해 모든 것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타락의 핵심은 ‘앎’ 즉 ‘지식’입니다. 창세기 3:5입니다.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앎은 곧 통제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습니다. 여러분이 어두운 골목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아들이 뒤에서 ‘엄마 같이 가’라고 부르다면 반가울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 계속해서 따라온다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이처럼 안다는 것은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통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 밖의 일은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통제할 수 없는 것을 거부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무엇은 자신을 해롭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락 이후 존재 속성 내면에 깊은 공포와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공포와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을 찬찬히 생각해 봅시다. 돈을 벌고,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운동을 하는 모든 것의 근원에는 ‘행복’을 추구하고 있으며, 행복을 추구하는 것의 기저에는 통제할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여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그곳에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께 용납되어 있지만 자신만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소외는 두렴을 일으켰고, 결국 아벨을 죽임으로 소외를 가져오는 요소를 제거한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은 곧 스스로 뭔가를 책임지고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이것은 결국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발현되고, 이것은 타인을 타자화 시키고 소외 시키는 현상을 가져오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때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살인은 상황을 통제하려는 인간이 욕구입니다. 만약 상황을 자신이 통제할 수 없게 되면 자신을 죽이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자살’이라고도 하고, 무관심 또는 냉정함이라고도 말합니다.

살인은 단지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인을 저지르기 전, 또는 자신을 죽이는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먼저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의 죽음이 먼저 찾아옵니다. 주변에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사람이 없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서로 공감이 일어나지 않을 때 그 때 관계의 죽음이 찾아옵니다. 누군가를 살해 한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생명만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생각을 무시하거나, 자신이 통제하려고 할 때, 살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형제에게 노하는 자, 형제에게 라가(바로)라고 하는 자, 미려한 놈이라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말씀에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것이 있다면 형제와 먼저 화목하고 그 다음에 예물을 드리도록 명령합니다.

마태복음 5:21-26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서로 사랑하고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뢰하라.

살인하지 말라의 두 번째 의미는 간략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의미를 파악할 때 살인이 타인에 대한 통제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상황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공의와 정의를 실천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그럼에 어떻게 해야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문제를 해결해야지 내 힘과 능력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반드시 죄를 짓게 되고, 또 다른 악이 발생하게 됩니다.

강연한 교수는 십계명 강해, 6계명을 마무리 하면서 빌립보서 2:2-5 말씀을 인용하여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마음을 얻겠습니까? 우리를 감화 감동시키셔서 인격과 성품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에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무엇을 통해서 그의 능력을 우리에게 덧입혀 주십니까? 기도입니다.” [강연안 <십계명 강해>(IVP)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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