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야고보서 3:7-8 강해, 길들일 수 없는 혀

샤마임 2025. 4. 12.
반응형

길들일 수 없는 혀, 인간 내면의 반역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본문인 야고보서 3장 7절과 8절은 혀에 대한 매우 비판적이고 심각한 진단을 내립니다.   야고보는 지금 혀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인간 내면의 본질적인 타락성과 경건의 진실함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피조 세계를 정복하고 통치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통제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 곧 혀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모순적인 실체를 파헤칩니다. 이 말씀은 단지 언어 생활의 윤리적 경고가 아니라,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은혜가 맞닿는 지점을 드러내는 깊은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혀는 작지만 엄청난 영향을 끼치며, 야고보는 이를 통해 인간의 실존적 나약함과 하나님의 구속이 왜 필요한지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1. 모든 종류의 피조물은 길들일 수 있습니다 (3: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길들여 왔고 길들일 수 있으되” (3:7)

야고보는 인간의 지배 능력을 강조하며 말씀을 시작합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 1장 28절의 문화 명령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 땅 위의 생물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습니다. 야고보는 이 창조 질서 속에서 인간이 피조 세계를 통제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길들여 왔고’(δαμάζεται, damazetai)라는 단어는 본래 사나운 짐승을 조련하거나 가축화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은 지혜와 힘을 모아 야생의 맹수를 길들이고, 독한 바다 생물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피조물이 인간의 타락과 연관되어 고통당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이 그 위에 군림하는 구조 자체는 유지된다고 말합니다(롬 8:20–22). 과학과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생태계, 동물, 미생물까지도 지배하고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우리는 시대적으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이러한 ‘정복 능력’의 강조 뒤에 곧바로 반전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것은 바로 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인간이, 정작 자기 입 하나, 말 한 마디도 다스리지 못한다는 역설은 우리로 하여금 내면의 진실을 마주하게 합니다. 혀는 인간 자신보다 더 난폭한 존재이며, 이 말의 통제가 어렵다는 점은 인간 본성 안에 있는 죄의 잔재를 상기시켜줍니다.

 

교부 어거스틴은 “인간은 맹수도 길들이지만 자기 마음에서 나오는 말은 길들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의 힘이 아니라 영의 통치 아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이 말씀의 본질을 꿰뚫었습니다. 우리의 혀는 지성이나 경험으로는 길들일 수 없는 본성의 야수와 같습니다.

 

2. 그러나 혀는 길들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3:8上)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3:8)

야고보는 이 구절에서 매우 강한 어조로 혀의 실체를 묘사합니다.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οὐδεὶς δαμάσαι δύναται, oudeis damasai dynatai)는 선언은 단순히 혀를 조심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혀에 대한 근원적 절망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선언은 인간이 아무리 높은 교육과 수양을 받고 훈련을 받았다고 해도, 혀를 완전히 통제하는 데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혀’는 단지 생리적인 기관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반영이며, 심령의 상태를 표현하는 통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이 말한다”(마 12:34)고 하셨듯, 혀는 심령의 거울입니다. 그런데 이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ἀκατάστατον κακόν, akatastaton kakon), 즉 끊임없이 움직이며 악을 생산해내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혀는 자신을 스스로 제어할 수도 없고, 그 영향은 순간적이지만 파괴력은 지속적입니다. 우리의 말은 때때로 의식하지 못한 채로 이웃을 상처 입히고,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까지 더럽히는 결과를 낳습니다.

 

‘죽이는 독’(μεστὴ ἰοῦ θανατηφόρου, mestē iou thanatēphorou)은 구약에서 독사의 독처럼 은밀하고 치명적인 언어의 파괴력을 상징합니다. 시편 140편 3절에서 “그들의 혀는 뱀과 같고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라는 말씀이 이를 잘 뒷받침합니다. 혀는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인격을 공격하고 파괴하는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구절을 주해하며 “혀는 내면의 부패함을 외부로 뿜어내는 기관으로, 그것이 하나님께 붙들리지 않으면 언제든 지옥의 문이 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혀는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순복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이는 곧 성령의 다스림 없이 혀는 본질적으로 죄악의 수로로 기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3. 혀를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실존과 구속사의 필요성

야고보는 혀를 통해 인간의 절망적인 실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왜 우리가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하는지를 말없이 전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지혜문학, 특히 자문은 말에 대한 수많은 교훈을 남기며, 혀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 말합니다(잠 13:3). 하지만 그 지혜의 요구 앞에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혀를 통제할 수 없었기에, 결국 우리는 율법 아래에서 죄인으로 서게 됩니다. 혀의 타락은 곧 인격의 타락이며, 이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더욱 명백히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의지해야 합니까? 바로 말씀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온전한 입술을 가지신 참된 선생, 참된 선지자이신 주님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의 헛된 말도 하지 않으셨으며(사 53:9), 입술로 복음을 선포하시고, 십자가 위에서도 용서의 말을 남기셨습니다(눅 23:34). 그의 말은 생명이었고, 그의 침묵조차 의로웠습니다.

 

성령이 임하신 오순절 날, 성도들은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행 2:4), 이는 타락한 혀가 다시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 회복의 징표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제 자신의 입술과 혀를 주님께 드려, 복음을 전하는 도구, 진리를 외치는 통로, 위로와 권면을 전하는 채널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찬과 예배 속에서 거룩한 입술의 회복을 경험하며, 말씀 안에서 말의 질서를 배워나가야 합니다.

 

교부 크리소스토무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입술에 거하지 않으면, 혀는 마귀의 낚싯줄이 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혀를 훈련시키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말할 때에만 비로소 이 혀가 거룩하게 쓰일 수 있음을 뜻합니다. 혀를 회복한다는 것은 단지 언어 습관의 변화가 아니라, 예배자의 삶 전체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결론: 혀를 다스릴 수 없기에 더욱 주님께 붙들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는 혀에 대해 매우 강력한 언어로 경고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을 길들이지만, 정작 자신의 입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혀는 쉬지 않는 악이며, 독을 품은 도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혀를 완전히 제어할 수 없기에, 오직 성령께 의탁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새롭게 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혀는 인간의 타락을 상징하지만, 또한 구속의 은혜로 회복될 수 있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입술을 주님께 드리며, 주의 말씀으로 우리 혀를 새롭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는 성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말은 공동체를 살리는 언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 구조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