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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3:9–12 강해, 한 입에서 나오는 찬송과 저주

샤마임 2025.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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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의 모순, 거룩한 입술을 위한 성도의 부르심

주의 은혜가 풍성한 하루입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서 3장 9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을 중심으로 인간 내면의 모순, 특히 말과 신앙 사이의 불일치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야고보는 혀를 주제로 한 깊이 있는 논증을 계속 이어가며, 이제 혀가 가지는 도덕적·영적 모순을 집중적으로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술로 형제를 저주하는 현실, 그리고 그 모순이 신자의 정체성과 얼마나 맞지 않는지를 자연의 비유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전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말과 삶의 일치를 지향하는 신자의 거룩한 부르심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1. 한 입에서 나오는 찬송과 저주의 모순 (3:9–10)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3:9–10)

야고보는 혀의 이중적 사용을 지적하면서, 인간의 말이 얼마나 모순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 같은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일상의 자리에서는 같은 입으로 형제를 저주합니다. '찬송하다'(εὐλογοῦμεν, eulogoumen)는 '좋은 말'을 하다, 곧 축복의 말이나 감사의 고백을 뜻하며, 이는 하나님께 드려야 할 언어입니다. 반면 '저주하다'(καταρώμεθα, katarōmetha)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존엄한 존재임을 상기시킵니다.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것이며,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교부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입술로 형제를 저주하는 것은, 동시에 불과 물을 쏟아내는 샘과 같다”고 말했으며, 칼빈은 “사람을 저주하는 말은 곧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라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종종 거룩한 말과 세속적인 말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만, 야고보는 모든 말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일관된 신앙의 고백이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 자연의 비유를 통한 말과 인격의 불일치 경고 (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3:11)

야고보는 자연 세계의 질서를 비유 삼아, 신자의 말과 행실이 가져야 할 일관성을 설명합니다. 샘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생명의 근원, 하나님의 축복, 성령의 상징으로 자주 사용되며(요 4:14), 여기서 ‘한 구멍’은 혀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단 물과 쓴 물이 동시에 나올 수는 없습니다. 이는 성도 안에서 찬송과 저주가 공존할 수 없다는 영적 원리를 보여줍니다.

‘단 물’은 축복, 은혜, 위로, 진리의 말씀이고, ‘쓴 물’은 원망, 저주, 비방, 불신의 말입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나오는 것은 본질적인 오류이며, 존재의 분열입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나무가 좋으면 그 열매도 좋고, 나무가 나쁘면 그 열매도 나쁘다”고 하시며,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음의 열매라고 하셨습니다(마 12:33–37).

야고보의 이 비유는 단순한 생활지침이 아니라, 신자의 정체성과 언어의 본질적 일치를 요구하는 영적 원리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샘에서 나는 말만을 내보내야 하며, 성령에 의해 정결해진 입술로만 하나님을 찬송하고 이웃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같은 나무에서 다른 열매가 날 수 없음 (3:12)

"내 형제들아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있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3:12)

야고보는 이어서 세 가지 식물의 비유를 통해, 본성과 열매의 일치를 강조합니다. 무화과나무에서는 무화과가, 포도나무에서는 포도가, 감람나무에서는 감람 열매가 맺히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그 존재의 본질에 따라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여기서 '짠 물'과 '단 물'은 앞 구절에서 언급된 쓴 물과 단 물의 변형으로, 여전히 혀의 이중성과 신앙의 불일치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 비유를 통해 신자의 정체성과 언어의 일치를 호소합니다. 이 말은 단지 ‘말조심’하라는 정도의 교훈이 아닙니다. 말은 인격의 열매이며, 말의 본질은 존재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여전히 이중적인 말, 저주의 말, 판단의 말을 내뱉고 있다면, 그것은 마음의 샘이 아직도 변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말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거울이자, 믿음의 온도를 측정하는 온도계”라고 하였고, 칼빈은 “혀는 영혼의 상태를 외적으로 드러내는 가장 빠른 증거”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말을 하느냐는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샘에서 길러졌는지를 보여주는 신앙의 지표입니다.

 

결론: 말과 믿음이 일치하는 삶을 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는 혀를 다룬 논증을 이제 ‘모순의 비판’으로 마무리하며, 말과 믿음이 일치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자연의 예를 들어 경고합니다. 우리는 동일한 입술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형제를 저주하는 일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혀는 신앙의 열매를 드러내는 통로이며, 진정한 성숙은 혀를 통해 확인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이 거룩함을 담고, 위로와 진리, 평화와 사랑을 전달하는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입술이 하나님의 은혜로 정결케 되고, 성령의 샘에서 나는 생명의 말로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의 입술을 새롭게 하소서. 우리의 말이 믿음을 드러내고,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야고보서 3장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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