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5:19–20 강해,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진리를 떠난 자를 향한 구원의 사명
드디어 오늘 야고보서가 마무리 됩니다. 야고보서의 마지막 절, 5장 19절과 20절은 단지 서신의 마무리가 아니라, 야고보서 전체의 핵심 정신을 응축한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를 향한 목회적 애정과 동시에 복음의 실천을 촉구하는 절박한 권면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야고보는 한 영혼이 진리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하여 우리가 어떤 책임과 사명을 지니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이는 야고보가 강조해 온 ‘행함 있는 믿음’의 실질적인 종착점입니다.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방황하는 이들을 진리로 돌아오게 하는 사랑의 행동이야말로 참된 믿음의 완성임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가 한 영혼의 회복을 위해 어떻게 헌신하고, 어떤 자세로 복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지를 깊이 있게 깨달아야 합니다.
1. 진리를 떠난 자 – 연약함 속의 방황하는 형제 (5:19)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5:19)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라는 친밀한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형제로 여기는 깊은 애정의 호소이자, 신자 간의 연대감을 강조하는 영적 표현입니다. ‘너희 중에’라는 표현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는 바깥 세상이 아닌, 교회 안에서 진리를 떠날 수 있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는 구원의 확신과 동시에 늘 경각심을 가지고 진리에 서 있어야 하며, 미혹될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미혹되어’라는 단어, 헬라어 ‘πλανηθῇ’(플라네데이)는 방향 감각을 잃고 떠도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구약에서 우상 숭배나 잘못된 길로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설명할 때 사용된 단어이기도 합니다. 단번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타협과 방심 속에서 서서히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황은 갑작스러운 파괴가 아니라, 서서히 굳어지는 냉랭한 마음의 흐름에서 비롯되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상태입니다.
교부 어거스틴은 “사탄은 단번에 영혼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저 마음속에 작은 허용을 쌓아가며,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흐리게 만든다”고 경고했습니다. 루터는 이 구절을 통해 “신자는 끊임없이 복음에 머무르도록 날마다 돌이켜야 하며,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세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진리에서의 이탈은 개인만의 책임이 아닌, 공동체 전체가 감당해야 할 짐입니다.
2. 돌아오게 하는 자의 사명 –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통로 (5:20上)
“그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5:20上)
야고보는 이어서 그가 ‘알 것’을 명시합니다. 여기서 ‘알다’(γινωσκέτω, 기노스케토)는 단순한 지식이 아닌, 행동을 동반한 인식, 즉 신앙의 실천적 자각을 뜻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진리에서 벗어난 형제를 돌이키는 자는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사망’은 단순한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헬라어 ‘θάνατος’(타나토스)는 영적 사망, 곧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 영원한 멸망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류가 겪게 된 죽음이며, 하나님 없는 인생의 비극적 결말입니다. 야고보는 이 사망에서 영혼을 건져내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명임을 강조합니다.
복음의 사역은 단지 말로만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의 삶을 돌이키는 행동 속에서 실현됩니다. 누가복음 15장,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 모두는 이 사실을 선명히 보여줍니다. 잃은 자를 되찾으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방황한 자를 외면하지 않고 그를 찾아가도록 하는 강력한 동기입니다.
교부 이레니우스는 “복음을 지키는 자는 진리를 말로만 전하는 자가 아니라, 행함으로 잃은 자를 되돌리는 자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단지 영적 사역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진 부르심입니다. 복음은 입술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행동을 통해 열매를 맺을 때 비로소 구속의 능력이 됩니다.
3.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 은혜를 전달하는 회복의 능력 (5:20下)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5:20下)
야고보는 마침내 이 회복 사역의 결과로서 ‘허다한 죄를 덮는다’는 복음의 결론을 전합니다. 이 말씀은 잠언 10장 12절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느니라”를 연상케 하며, 사랑이 회복의 중심에 있음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덮는다’(καλύψει, 칼륍세이)는 단어는 단순히 은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죄를 ‘속죄하신다’고 할 때 사용된 개념이며, 죄를 무효화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행위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고 말하며, 사랑이 죄를 사하는 통로임을 강조했습니다. 이 ‘덮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덮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누군가의 죄를 덮는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중보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드러내어 정죄하지 않고, 회개케 하여 품는다. 그것이 죄를 덮는 참된 권세다”라고 했습니다. 진리를 떠난 자를 판단하지 않고, 그를 사랑으로 품고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세상 앞에 보여야 할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덕목이 아닙니다. 이는 구속사의 실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바로 우리 허다한 죄를 덮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의 죄를 덮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증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결론: 잃은 자를 돌아오게 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고보서 5장 19절과 20절은 단순한 권면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신자가 행함 있는 믿음을 완성하는 최종 단계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듣고 배운 모든 말씀은 결국 이 한 가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당신은 방황한 영혼을 돌아오게 하고 있는가?”
진리를 떠난 자는 우리 중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돌아오게 하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끌며, 허다한 죄를 덮는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이 사역은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 전체가, 모든 성도가 함께 감당해야 할 영적 사명입니다.
복음은 전파될 때 힘이 있지만, 실천될 때 능력이 됩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은 인내, 진리를 향한 인도, 죄를 덮는 용서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명 앞에 서야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가 누구를 사랑으로 붙들어야 할지를 묵상하며, 진리로부터 멀어진 이를 다시 품는 교회, 다시 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야고보서 5장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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