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4:1-9 기억 공동체
기억 공동체망각(忘却)
여호수아 4:1-9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뭐니뭐니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패하면 백전백패입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존재는 그렇게 쉽게 말처럼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첫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한 첫 번째 일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요단강에서 열두 돌을 취하여 그 근처에 있는 길갈에 세워두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후손들이 열두 돌을 보고 이 돌들을 무슨 뜻이냐고 묻을 때 ‘하나님께서 능하신 손으로 홍해와 요단강을 가르시고 약속에 땅에 들이셨다’라고 대답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홍해와 요단강의 기적을 기억하여 대대로 그 전승을 이어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대가 바뀌고, 역사가 흘러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와 요단도하 사건을 기억해야합니다.
1. 내용: 이스라엘은 기억 공동체이다.
이스라엘은 기억공동체입니다. 기억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자 존재의 의미와 삶의 방식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특별한 존재로 부르셨습니다. 온 인류가 부패한 본성을 따라 악의 길을 걸어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으로 부르시고, 그 땅을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전했고, 이삭은 다시 야곱에게, 야곱은 다시 자신의 아들들에게 언약을 전합니다. 야곱은 자신이 죽으면, 조상들이 묻힌 가나안 땅에 자신을 묻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창세기 49:29-32]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야곱뿐 아닐 요셉도 마지막 유언으로 나중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갈 때 자신의 뼈를 가져가 가나안에 묻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창세기 50:24-25 / 24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믿음이 족장들은 계속하여 처음의 기억을 후손들에게 전승시켰습니다. 이처럼 기억은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려주는 지표와 같습니다. 기억을 망각하는 순간 삶의 의미를 사라지게 되고, 살아가는 방향도 잃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고생하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가?’였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히브리서 11:13-16 /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공동체가 흔들리는 이유는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상실한 이유는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목적지가 있다면 반드시 어디론가 가야합니다. 하지만 목적을 상실하면 아무 곳에 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망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기억하라’ 명령합니다. 하나님은 요단강은 건너는 이스라엘에게 이 사건을 기억하라 명합니다.
2. 그릇: 기억을 보존하는 방법
그럼 어떻게 기억을 보존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는 요단강가인 길갈에 열두 돌을 세움으로 기념물을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후손들이 이곳을 지나다 열두 돌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질문을 하면 하나님께서 이적으로 홍해를 말리시고, 요단강을 멈추게 하여 마른땅으로 건넜다고 교육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억을 전승했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지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구약 속에는 어떤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공동기억을 전승시켰을까요?
1) 먼저 절기가 있습니다.
매년 반복되는 절기를 통해 기억을 되살립니다. 이스라엘에는 중요한 절기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3대 절기가 있고, 2개가 더해져 5대 절기가 되고, 모두 합해 7대 절기가 됩니다.
3대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오순절), 장막절(초막절)
5대 절기는 나팔절과 속죄절(대속죄일)이 추가됩니다.
7대 절기는 무교절 초실절이 추가됩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당시 애굽의 열재앙 중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에 있을 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사자가 건너 뛰었다하여 유월절이란 이름이 붙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 그 다음날 일주일 동안 이어지는 절기로 무교병(無酵餠)을 먹었다하여 생긴 것입니다. 애굽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급하게 짐을 싸야되는데 발효시킬 시간이 없기 때문에 효소를 넣지 않고 빵을 굽었습니다. 그래서 무교병을 먹게 됩니다. 이것은 애굽이란 죄악된 세상에서 쾌락이란 효소를 넣지 않는다는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실절은 유월절 후 첫 안식일이 지난 첫날입니다. 그러니까 무교절 마지막 날이 유월절을 지난 후 첫 안식이되고, 그 다음날이 초실절이 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유월절은 토요일이 되고, 그 다음 안식일 다음날이 되니 일요일, 즉 주일이 됩니다.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추수가 시작됩니다. 바울은 구약의 초실절의 첫 열매를 예수님의 부활에 적용합니다.
고린도전서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하나님께서는 매년마다 절기를 지키게 하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지 않도록 장치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어느 나라든 매년 돌아오는 설이나 특별한 절기를 지킴으로 그 민족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잊지 않게 합니다.
왜 오늘 밤은 다른 밤들과는 다릅니까?
다른 모든 밤들에는 우리는 누룩이 들어있는 떡이나 누룩 없는 떡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누록 없는 떡만을 먹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밤들에는 우리는 온갖 종류의 나물들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밤에는 우리는 쓴 나물만을 먹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밤에는 우리는 구운 고기나 삶은 고기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으나 오늘 밤에는 구운 고기만을 먹어야 합니까?
William Barclay 『Lord's Supper』 조기연 『예배-공동경험과 공동기억의 사건』 장신논단 Vol. 48 No. 2
신약적 의미에서 본다면 주일과 교회력을 통해 교육을 들 수 있습니다. 왜 주일은 특별한 날인가요?라고 물으면, 주일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날이란다. 초대교회때부터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지킨 것이 주일이란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2) 성막과 제사가 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성막과 제사입니다. 물론 제사와 절기는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절기 때는 반드시 제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사한 일이나, 특별한 서원, 그리고 죄를 짓거나 절기가 되면 항상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머무는 곳입니다.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하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위해 다시 다짐하는 것입니다.
3) 율법을 가르침으로 기억을 보존합니다.
신명기 6:6-9 /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J. 주베르는 ‘가르치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배울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별 내용도 없어 보이지만 자신이 직접 가르치려고 하면 심장이 두거리고, 누가 물어볼까 싶어 겁부터 납니다. 가르치는 것은 생각 외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해 제대로 배우려면 성경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침으로 자녀들은 다시 그것을 그들의 자녀에게 가르칩니다.
3. 사용법: 기억은 재해석되어야 한다.
기억은 시대의 상황에 맞게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역사적 사건은 ‘사실’로만 두어서는 안됩니다. 현시대 속에서 맞게 해석되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싶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교회가 건축을 새로하면서 본당 앞에 십자가 모양의 기념석을 세웠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자는 일종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나이든 권사님들을 주축으로 해서 교회에 오면 꼭 그 앞에서 두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한 두 명이 시작하더니 몇 년 지나고 나면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 십자가 앞에서 절까지 하면서 섬기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목사님이 처음에 그건 좋지 않으니 하지 말라고 했는데, 성도들은 그것을 하지 않으면 왠지 죄를 지은 것 같고, 하나님께서 벌을 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니다. 이 십자가는 무엇인가? 바로 해석되지 않는 전통입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한 이들이 습관이 되고, 몸에 배이고, 역사가 되면, 그러한 것들이 성경보다 우위에 올라가고, 잘못된 편견과 미신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부인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성경에서 그것을 잘 보여준 사건이 느후스단(뜻 구리조각) 숭배 사건입니다. 히스기야 개혁을 일으키면서 여러 우상들을 파괴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모세가 광야에서 만들었던 놋뱀형상의 지팡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도 그것을 숭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어났던 것입니다.
왕하 18:4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해석되지 않는 전통은 우상숭배입니다. 지금까지 이렇게 했기 때문에, 왜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라는 식으로 얼버무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자신보다 우위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하면서 끊임없이 잘못된 전통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새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했습니다. 결국 이러한 예수님의 열정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의 기억이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면서 해석되지 않는 상태에 남겨지게 되면 결국 전통이 하하나님 우위에 올라서게 됩니다. 시대가 변하면, 그 시대 상황 속에서 다시 그 사건을 해석해야합니다. 그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고, 왜 그렇게 했는가를 이해한 다음, 그 본질에 맞게 새로운 해석과 적용을 도입해야 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부분은 좀더 다루기로하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정리해 봅시다.
1) 이스라엘을 기억 공동체입니다. 기억은 곧 이스라엘이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2) 두 번째, 기억을 담는 그릇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절기와 예배 시간 등은 우리를 바른 신앙에서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3) 세 번째, 기억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통을 해석하지 않는 상태로 그대로 두면 사유의 퇴보와 타락이 일어나 반드시 우상숭배로 전락하게 됩니다. 아무리 전통이라 해도 성경적 원리에 맞지 않다면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고 고쳐서 시대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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