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 도하 여호수아 3:7-17
요단강 도하 여호수아 3:7-17
영웅은 시대가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위기의 시대를 말하며, 다른 말로 하면 역사의 전환기를 말합니다. 인간들에게 내일은 닫혀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내일 결정이 오늘로서는 최선이라할지라도 내일이 되면 최악의 선택이었음이 드러나기도하고, 오늘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내일이 문이 열렸을 때 최고의 선택이 되어 버리는 일도 일어납니다. 그럼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도무지 내일을 알 수 없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걸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내일의 문을 닫혀 있지만 시간을 내일을 향해 흐르고 있고, 오늘이 쌓여 내일이 되기 때문에 내일은 완전히 닫힌 것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본다면 라디오 시대에서 TV가 발명 되었을 때 사람들은 TV의 불편함을 이야기 했습니다. 라디오는 일하면서도 들을 수 있다며 라디오가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 라디오를 듣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직도 어릴적 기억 중의 하나는 동네에 수도가 들어올 때 수도가 녹이 들어 썩은 물이 된다는 소문이 들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는 것이 더 좋다며 수도를 설치 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지만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거대한 부를 축적했던 많은 거부들은 역사의 흐름을 간파하고 어디로 돈이 흘러가고,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여 지는지를 알고 그곳에 미리 그물을 치고 기다렸던 사람들입니다. 큰 권력을 잡거나, 거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도 필요하고, 자신의 의지를 이룰 운도 따라주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웅은 시대가 만는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것을 어떨까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떤 면에서 영적인 흐름은 세상의 과학과 역사의 방향보다 더 쉬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 역사의 위대한 믿음의 영웅인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예수의 모형론적 예표이자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어떻게 하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를 들려두는 부분을 살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한 사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 여호수아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고, 앞으로 전개될 가나안 정복전쟁의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1. 돌아갈 수 없다.
첫 번째 의미는 이것입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넜으니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기원전 49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합니다. 루비콘 강은 아주 작은 냇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이 강은 건널 때는 로마에 충성해야 한다는 서약으로 무장해제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무장한 채로 그 강을 건넌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단순히 가나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했습니다. 일주일도 걸리지 않을 거리를 무려 40년 동안 광야에서 돌도 또 돌며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첫 번째는 홍해는 건넘으로 구원 받은 자유의 백성의 신분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40년의 생활은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한 가지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8:2-3]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2. 시대에 맞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오늘 우리가 주의하여 볼 부분은 요단강이 갈라지는 기적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가입니다. 3.6.8절을 보면 요단강을 건너갈 때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맨체로 요단강에 들어갑니다. 13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웨를 메고 요단강에 들어가면 흘러 넘치던 요단강물이 멈춰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가 언제냐하면 곡식 거두는 시기였습니다. 15절을 보면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이 지역은 보리나 밀을 거두는 5-6월이 되면 가장 많은 수량을 자랑한다. 헤르몬 산에 있던 만년설이 흘러내려 요단강을 거쳐 사해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다. “텔 다미예 주변 지역은 강폭이 1,2km로 요단 강변 중에서 가장 넓다. 또한 최대 범람을 기준으로 한다면 수심이 30m도훨씬 넘었다. 요단강이 범람할 때 가장 인상적인 장소가 바로 아담 읍 주변이다. 이 주변 지역이 범람을 하면, 얍복강과 요단강이 동시에 범람해 다른 요단 강변과는 사뭇 다른 그름을 만들어 낸다” 김동문 『요르단』홍성사, p.133)]
왜 하필이면 요단강이 범람할 때 굳이 건너야 했을까?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함을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물론 그렇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요단 도하 사건은 홍해 사건과 닮아있으면서 완전히 다른 의미도 있습니다. 홍해 사건으로 되돌아 가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4장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홍해 앞으로 인도합니다. 곧 이어 애굽의 철병거가 이스라엘을 뒤쫓기 시작합니다. 앞은 홍해이고, 뒤는 애굽의 군대입니다. 앞으로 못가고 뒤도로 갈 수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세에게 찾아와 왜 우리를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이때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출 14:13-14] 13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즉각 응답하십니다.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홍해를 건너기 위해 이스라엘이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냥 기다리면 홍해가 갈라지고, 갈라진 홍해를 건너가면 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는 하지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넘쳐흐르는 요단강물로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아주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마치 절벽에서 덩쿨을 잡고 있는 어떤 사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손을 놓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만약 이 손을 놓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손을 놓치 못합니다.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싸워야할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타락한 심성을 지닌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순종하기를 거절합니다. 지금의 안락함과 평안을 놓치 않으려하고, 안주하려 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모험보다는 굴욕스러운 평안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3. 발로 밟는 것은 정복하라는 말이다.
두 번째 중요한 의미는 ‘발로 밟는다’는 구절 속에 있습니다. 13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을 때 흘러내리던 요단물이 멈춰 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순종을 통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뜻인 동시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의 성취입니다. 1:3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모두 너희에게 주었다’라고 말합니다. 발로 밟는다는 말은 수고한 대로 복을 주신다는 의미가 있지만 이 본문 속에서는 그것보다 정복한다는 상징이 더 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에 보면 솔로몬이 두로 왕 히람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왕상 5:3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여기서 발바닥 밑에 둔다는 표현은 정복한다는 뜻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왕은 상대편의 왕을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게하고 목을 발로 밟아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선포했다고 합니다. 비슷한 표현이 열왕기 하 19:24에서 등장합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히스기야 다스린 유다에 쳐들어와 조롱할 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히스기야 왕에게 보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왕하 19:24 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강들을 말렸노라 하였도다
이 말씀을 마치고 나자 그 밤에 하나님의 천자가 산헤립의 18만 5천명의 군사들을 모조리 죽여버립니다.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발로 요단강을 밟자 요단강물은 그자리에 멈춥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요단강을 정복하셨고,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사건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 안에서 바다나 강은 부정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파괴적 힘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창조하실 때 바다 속에서 땅을 불러 내십니다. 또한 홍해에서 마른 땅을 드러내심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이번에는 요단강을 가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른 땅으로 건너가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들어가려고 하는 가나안 땅에는 주인이란 뜻의 바알 신을 숭배합니다. 바알신은 바람과 폭풍의 신이기도하고, 비의 신이기도합니다. 바알은 바다의 신인 얌을 정복하고 땅의 주인으로 숭배됩니다. 총신대의 김지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온 땅의 주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서자 요단 강물이 갈라지는 사건은 하나님이 요단 강물을 이기고 승리하셨음을 보여주는 기적이다. 바알 신화에는 바알이 강과 바다의 신인 얌을 정복했기 때문에 땅의 주인으로 선언되고 있다. 그런데 위협적인 요단 강물을 정복하시고 백성들로 하여금 마른 땅으로 요단을 건너게 하신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그렇다면 땅의 주인은 가나안 민족들이 믿고 있던 대로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이에 가나안인들은 여호와께서 온 땅의 주인이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지찬 『여호와의 날개 아래 약속의 땅을 향하여』 생명의말씀사, p.75
그런데 하나님은 바알이 물을 정복한 것이 아닐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바다의 정복자임을 명백하게 선포하는 행위가 바로 요단도하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요단강을 가르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할 때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선지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했습니다. 그럴 때 놀라운 기적과 능력들이 나타났습니다.
겔 37: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사도행전 3:6-8]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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