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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삼서 강해 13~15절 마지막 인사

샤마임 2025.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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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나누는 얼굴과 얼굴의 교제

요한삼서의 마지막 부분인 13절부터 15절은 짧은 결론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사도 요한의 목회적 심정과 공동체를 향한 따뜻한 사랑이 진하게 담겨 있습니다. 앞서 가이오의 신실함과 디오드레베의 교만, 데메드리오의 선함이 대조적으로 등장했다면, 이제 요한은 더 이상 편지로 다 하지 못하는 진심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만남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이 부분은 단순한 작별 인사를 넘어, 진리 안에서의 교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우며, 공동체의 생명이 단지 정보의 전달이나 권면에 있지 않고, 실재하는 사랑과 친밀한 나눔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교제의 본질과 공동체 안의 친밀한 연합에 대해 깊이 묵상해보기를 바랍니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싶지만 만남을 기다리는 마음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13절). 이 구절은 단순한 통신상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것을 글로 모두 전하기보다, 직접 만나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진심을 표현합니다. '먹과 붓'으로 번역된 헬라어 melanos kai kalamou는 당대의 편지 수단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형식적인 기록보다 진정한 교제를 더 귀하게 여긴다는 요한의 의중이 담긴 문구입니다.

 

사도 요한은 단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가이오와의 교제가 깊은 영적 사귐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이는 단순한 교제 이상의 의미로, 진리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영적 친밀감과 신뢰를 전제로 합니다. 그의 바람은 오늘날의 교회 공동체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메시지를 빠르게 주고받지만, 진정한 교제는 얼굴을 마주하고 영혼을 나눌 때 이루어집니다. 요한의 의도는 단지 편지로 명령하고 지도하는 사도의 위치를 넘어서, 진리를 함께 살아가는 동역자의 마음으로 가이오에게 다가가고자 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주해한 초대교부 이그나티우스는 교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편지는 마음을 전하지만, 만남은 영혼을 이어준다." 요한은 바로 그 영혼의 연합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이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대면 교제가 얼마나 깊은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주는 한 구절입니다. 또한 이는 오늘날 팬데믹 시대 이후 회복되어야 할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비대면의 한계 속에서도 교회는 결국 몸으로 연결된 유기체이며,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사랑의 만남 속에서 진리의 깊이가 자라납니다.

 

평안과 친구의 인사로 드러나는 공동체의 본질

14절은 요한의 바람을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여기서 '속히'(ταχέως, tacheōs)라는 단어는 단지 시간적 신속함만을 뜻하지 않고, 요한의 애타는 바람과 긴급함을 포함합니다. 사도는 단지 시간 나는 대로 들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상태와 가이오의 삶에 대한 깊은 관심 속에서 직접 방문하고자 했습니다. '대면하여 말하리라'는 표현은 문자 그대로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하리라'(στόμα πρὸς στόμα, stoma pros stoma)는 유대 전통의 표현으로, 친밀한 만남과 교제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친밀하게 대화하실 때 사용된 표현이기도 하며(민 12:8), 사도 요한은 지금 그 동일한 깊이로 형제를 대하고자 합니다.

 

진정한 복음의 관계는 단지 교리를 나누는 것을 넘어서, 삶을 나누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며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이 내 삶에 실현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속에서의 살아있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요한이 보여주는 이 짧은 문장은, 단지 편지의 결론이 아니라, 복음 공동체의 지향점입니다. 서로를 알고, 만나고, 진심을 나누는 그 자리에서 복음은 더욱 분명히 빛나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관계로 전해야 하며, 그 중심에는 얼굴을 마주하는 깊은 사귐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15절에 이르러 요한은 마지막 인사를 남깁니다.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이 인사는 짧지만 매우 밀도 있는 표현입니다. 먼저 '평강'(εἰρήνη, eirēnē)이라는 단어는 단순한 심리적 안정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구약의 '샬롬'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하나님과의 화목, 공동체 안의 조화, 영혼의 질서 있는 상태를 통칭하는 단어입니다. 요한은 그 평강이 가이오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단지 외적 환경의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온전한 평안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친구들'이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리켜 "이제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고 친구라 하리라"고 하신 말씀과 연결됩니다(요 15:15). 이 말은 사도 요한의 교회 공동체 이해가 단지 구조적 조직이나 제도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뢰로 연결된 관계 안에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친구는 함께 걷는 자이며, 진리를 나누는 자입니다. 가이오가 문안받는 사람일 뿐 아니라, 또 다른 친구들에게 문안하는 사람으로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단지 수신자로서의 역할을 넘어 공동체의 중심에 있는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초대교부 터툴리안은 이 구절을 묵상하며 “교회는 권력으로 연결된 조직이 아니라, 기도로 연결된 친구들의 연합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다시금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조직 속에 있지만, 그 안에서 친구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배 시간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동행을 통해 진리를 실현해야 하며, 그것이 곧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결론

요한삼서 13절부터 15절은 단순한 편지의 끝이 아니라, 공동체의 본질과 교제의 소중함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와의 대면을 갈망하며, 교회의 평안과 친구들의 문안을 통해 공동체의 살아 있는 연합을 증언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대면의 교제, 진심 어린 관계,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평강의 공동체를 향한 부르심을 다시금 되새기게 합니다. 진리는 정보가 아니라 삶이며, 그 삶은 관계 속에서 완성됩니다.

요한3서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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