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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5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샤마임 2011.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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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1:5 잠든 요나

잠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에서 종종 찾을 수 있다. 가장 유명한 구절은 아마도 시편 127 : 2 일 것이다.


시편 127 : 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잠을 잔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잊고 편안하게 쉰다는 의미를 가진다. 시편 127 : 2에서 나타나는 인간상은 죄의 값으로 수고로이 일해야 하는 타락한 아담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그것은 헛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 즉 쉼을 주심으로 그에게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쉼에 대한 의미는 영적인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안식일의 개념이 바로 쉼이자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행로는 쉼없는 종에서 쉼있는 자유인으로의 이동이다.


그런데 요나1:5의 요나의 잠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여호와의 하시는 일을 잊기 위한 의도적 반항이라는 점이다. 요나의 잠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묵상을 게을리하는 것이며,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고난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괜찬아 지겠지 하는 식의 무책임한 행위다. 존번연이 기록한 천로역정에 보면 '홀리는 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로 하여금 소명을 잊어 버리게하고 그곳에 계속해서 머물게 한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죄의 철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장애물들과 난관들이 마치 감옥의 벽과 같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누워 잠이드네"

이런 자세는 영적으로 메말라가는 단계를 보여준다. 영적질병이 몰래 임하는 것을 막기는 정말로 어렵다. 신체적인 피곤은 계속적으로 몸으로 느껴지지만 영적인 피곤은 한번 익숙해 지면 깨닫지 못하게 된다. 영적 피곤의 증상은 이렇다.

'은혜가 넘치지 않더라도 전에 한번 받은 은혜로 계속 버티자. 하나님은 아주 좋은 분이시니 이 정도야 봐주시겠지. 나는 과거에 주를 위하여 많은 일을 했으니 지금은 쉬어도 괜찮겠지' 이러한 생각이 든다면, 당신은 지금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게 확실하다.



좀 더 생각해 보자. 


영적인 병으로서의 잠이란 무엇일까?  성경에서 잠은 죽음을 의미한다. 더이상 무엇인가를 할 수 없는 상태이다. 잠을 잔다는 것은 더이상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기를 중단하는 것이다. 이러한 잠은 베드로가 옥에서 잠을 잤던 쉼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다. 요나의 잠은 자연을 통해 말씀하시는 영적인 질병이요, 완악함이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나는 마음에 무엇이 들어 오도록 하는가?  정원을 내버려 둔다면 정원은 잡초로 무성해지다가 폐허가 된다. 성도의 마음도 그대로 내버려두면 사탄의 까마귀들이 몰려드는 쓰레기장이 된다. 성도가 자기의 마음을 돌보지 않을 때 그곳에서 어떤 것들이 자라나는지, 바울의 글을 읽고 확인해보라. 예를 들어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등이다.(골3:5) 




우리는 잠을 자야 할 때가 있고, 자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세상의 헛된 것에 대해서는 탐심을 버리고 쉼을 가져야하고, 주님을 아는 일에대해서는 쉼없는 열심으로 살아야 한다. 성도는 이 땅에서 영적인 쉼을 얻는 것이지 육신의 게으름을 따라가서는 안된다. 영적인과 육적인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욕망을 멈추면 영적인 쉼을 얻지만, 영적인 것을 쉬면 반드시 탐심이 자라나 헛된 욕망에 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의 수고를 기억하자.




갈라디아서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데살로니가전서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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