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하는 인간 안에 잠재된 죄의 적극성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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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는 일찌기 이렇게 말한바 있다.
기독교적인 것은 믿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영역 안의 것들뿐이다. 신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관계는 신앙뿐이다. 기독교적으로 이해하면 죄는 인식 안에 있지 않고 의지 안에 있다. 그리고 의지의 이러한 타락은 개체의 의식을 초월한다. 이렇게 해서 여기에 또 좌절의 표지가 나타난다. 죄가 무엇이며, 죄가 얼마만큼 깊이 박혔는가 하는 것을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신의 계시가 필요하다는 점에, 좌절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병
계시는 근본적으로 자연인을 절망시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는 자연인의 죽음을 초래하며, 다시 살아남 없이는 결코 계시를 수납하지 못한다. 계시는 수정이나 개선을 위한 목적이 아니다. 말씀은 칼이며, 죽이는 것이다. 말씀이 성령의 검, 또는 양날 선 검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합리적 사고을 잃어버린 인류는 이제 더이상 개선의 여지가 없는 사형이 선언된 죄인들일 뿐이다. 그들에게 남겨진(자연 또는 일반은총) 선한 무엇인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다시 케에르케골의 주장을 들어보자.
어떤 왕이 철저한 암행을 하고자 하여, 완전히 보통 인간으로 취급받기를 원할 경우, 그 경우에도 왕에게 어울리는 정중한 태도로서 충성하는 일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그것은 오히려 왕의 의지에 거역하고, 자기 자신의 의견만을 주장하며, 복종하는 대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 왕이 그러한 것을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왕에게 신하로서의 경의를 나타내는 재능에 넘친 인간이 왕의 마음에 들겠는가? 그 인간이 왕의 의지에 거역하는 재능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 반대일 것이다.
설명을 추가하면 이렇다.
어떤 왕이 이름모를 한 백성처럼 행동할 때 사람들이 그에게 왕으로 모시는 것은 오히려 왕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왕이 아니기 때문에(숨겨져있음으로) 그에게 왕 대우를 하는 것은 진정한 왕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인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즉 계시는 죄인들에게 절망을 가져다 주는 죽음의 칼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잘못된 계시이거나, 잘못 받아 들인 것이다. 사형 선언을 듣고도 자신에게 상을 준다고 착각한 어떤 미친 사람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 죽음을 직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이며,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는 다른 양들이다.
요한복음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따라서 앞 장에서 논의되었던 죄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보충되어져야 한다. - 죄란 신의 계시에 의해 어디에 죄가 존재하든지 인간에게 밝혀진 후, 인간이 신 앞에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하지 않는 것(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 또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으로 있으려 하는 것이다.(절망한 체로 자신을 보존하는 것)-( )의 내용은 필자가 첨가한 것임
진정한 회개 없는 자연인의 모든 종교생활은 '계속 추가되는 죄'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회개하지 않는 죄는 새로운 것이며, 죄가 회개되지 않고 있는 순간 순간이 새로운 죄이다
.
죄는 하나의 생명체와 같고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죽음을 부정하려 한다. 죄는 죄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수정하고 개선하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끊임없는 사단의 거짓말에 자신을 속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죄에 대하여 정면적으로 도전하며, 그를 죽이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친다.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결론은 이렇다.
1.
자기 죄에 대하여 무관심해 지는 것이다.
자기의 부정이다. 죄를 피함으로 절망한다.
2.
절망함으로 회복의 가능성을 포기한다.
자기 죄에 대한 절망은 결국 자신의 수정불가능한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려는 또다른 양태이다. 즉 완악해 지는 것이다.
믿음이 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절망을 넘어서는 유일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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