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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도는 가까이 있다.

샤마임 2011.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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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中庸), 도는 가까이 있다.

이 부분은 도를 실천하려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부분이다. 주희는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이론 적으로도 남아서는 안 되고 삶 속에서 실천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도라고 말한다. 주희에 의해서 편집된 [중용]의 13장과 15장의 내용을 통해 '도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13장

1.

공자가 말했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는데 사람들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에게서 멀어지니 이렇다면 도라고 할 수 없다.”

2.

[시경]에 “도끼자루로 쓸 나무를 베는구나! 도끼자루로 쓸 나무를 베는구나! [각주:1]도끼자루의 모형은 멀리 있지 않다”고 하였다. 도끼자루를 쥐고서 도끼자루로 쓸 나무를 베면서 힐끔 쳐다보고는 오히려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사람의 도를 가지고서 사람들을 다스리다가 그들이 잘못된 점을 고치면 그만둔다.

3.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 드러내는 태도 [忠]와 자기 자신을 미루어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자신에게 베풀어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을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지 말라.[각주:2]

4.

군자의 도 네 가지 중에 나는 아직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자식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부모를 섬기지 못하고,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섬기지도 못하며, 동생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형을 섬기지도 못하고, 친구에게 바라는 것을 먼저 베풀어주지도 못한다. 평소에 행해야 할 덕을 실천하고, 평소에 해야할 말을 근실히 하여 (실천하는 데)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않음이 없고, (할 말이) 많이 있어도 거리낌 없이 할 말을 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할 때는 실천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행동할 때는 자신이 한 말을 생각하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각주:3]
 

15장

1.

군자의 도란 비유하자면 멀리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걸어가야하는 것과 같고, 높은 곳에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과 같다.

2.

[시경]에 “처자의 어울림이, 거문고를 타는 듯 조화로우며, 형제들 뜻이 맞아 즐겁고도 즐겁나니, 너의 집안 화목케 하며, 너의 처자 즐겁게 하라”[각주:4]고 노래하고 있다.

3.

공자는 (이 시에 대하여) “부모님은 마음이 편안하실 것이다”고 하였다.



중용의 도에 대한 가르침에 의거해보면 실천적 삶이야말로 진정한 도의 실천임을 말한다. 실천 없는 도란 없으며, 이론적 도를 추구함 자체고 도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유교적 가르침은 삶을 개혁하는데 있다. 그러나 삶이 없는 이론이야말로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어려운 그 어떤 것으로 치부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30:11-16

11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16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계명을 저 먼 어느 신비로운 나라의 일로 생각한다. ‘산 너머에는 누가살꼬?’라는 싯구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 손 안에 있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오늘 하루의 삶이 바로 주님의 계명이며 신비이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어렵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싫어한다'는 말이다. 그들의 변명은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어렵고 알아듣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위해서는 히브리어도 알아야하고, 헬라어도 공부해야 하고, 기본적인 신학도 마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그런 정도의 훈련은 마쳐야 하나님을 말씀을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모세가 경계한 산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진리를 찾아나서는 것의 비유다. 그러나 모세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화와 복은 바로 내 앞에 있으며, 내 앞에 주어진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생사의 갈림길이 달라지는 것이다. 내 앞에 있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설명할 필요도 없이 간단하다. 십계명의 예를 들어 우상을 만들거나 절하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여, 살인 간음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대로 살면 되는 것이다. 혹 잘못을 범했다면 레위기의 말씀대로 제물을 드리고 속건죄를 드리면 되는 것이다. 이것처럼 간단하고 쉬운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계속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핑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고 순종하기를 거부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탐욕을 내 안에 품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말씀을 어렵다고 말하므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몰라 불법을 저질렀습니다'라고 핑계하려는 것이다.

야고보서 말씀을 들어보자.

약2:14-17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실천되지 않는 삶은 거짓된 믿음에서 난 것이다. 나의 개인적이고 사소한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다.

 

  1. 도끼 자루가 이미 도끼 안에 있음데도 다른데서 도끼 자루를 구하려는 어리석음을 노래한 것이다. [본문으로]
  2. 자신 스스로도 할 수 없는 것을 남에게 강요함으로 가식을 행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본문으로]
  3. 공자는 네 가지의 도를 말하면서 자신은 이것들 중에서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그러니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우선이고 먼 곳의 신비로운 것을 따라가려는 것은 어리석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4.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고 멀리 잇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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