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 주해와 강해
팔복 주해와 강해
서론: 팔복 개요
마태복음 5:3-12까지에 나타난 '복'을 말합니다. '팔'은 여덟 가지 복을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기에 따른 복이 더 언급되기 때문에 구복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전통적 관점을 따르며, 팔복으로 보며 강해할 것입니다. 팔복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태복음에 대한 간략한 전제들을 연구하고, 마태복음 안에서 산상수훈의 위치와 팔복의 의미들을 먼저 개략적으로 살핀 다음 팔복 각론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마태복음에 관하여
ㄱ. 공관복음으로서의 마태복음
팔복을 살펴보기 전에 마태복음에 대한 기본적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팔복은 산상수훈의 서론 역할을 하는 동시에 마태복음의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약이 되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라는 네 복음서를 먼저 접합니다. 이 중에서 요한복음을 제외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예수에 대한 생애에 집중하였단 동일한 관점을 가진 복음서로 보고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s)로 부릅니다. 가장 최초의 복음서는 마가복음이며, 그 후 마태복음 또는 누가복음이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의 94%정도를 그대로 가져와 약간 변형하여 사용합니다. 그에 비해 누가복음은 마가복음의 내용을 상당히 다르게 해석하거나, 마가복음에 기록되지 않은 독특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네 복음서는 전반적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연대기적 저술 방법을 사용했고, 비유와 기록 방식들을 적지 않게 공유합니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하지만 추구하는 목적과 방향은 사뭇 다릅니다. 마가복음이 고난 받는 그리스도에 집중한 반면, 마태복음은 왕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이 점에서 있어서 누가복음도 마태복음을 따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마태복은 몇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용하지만 대부분 ‘하늘나라’라는 용어로 대체합니다. 이러한 표지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만 목적이 약간 다르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태복음이 철저히 유대적인 반면, 누가복음은 로마적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관점에서, 유대인들에게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누가는 로마인의 시각에서 유대팔레스타인을 조명합니다.
ㄴ. 변증서로서의 마태복음
복음서들은 변증적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위한 복음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확고히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에 기록된 전반적인 성향과 내용, 그리고 용어들은 마가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을 위한 것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에 비해 마태복음은 철저히 친유대적입니다. 유대인이나 구약에 어느 정도 이해가 없는 독자라면 납득하기 힘든 세밀하고 중요한 구약의 신학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목적은 구약에서 예언하고 기대한 메시아(그리스도)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서두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와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 설화는 예수가 곧 다윗이 ‘주’(마 22:45)라 고백한 바로 그 메시아 인 것을 구약 ‘성취’의 목적으로 진술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유독 많이 사용되는 ‘다윗의 자손 예수’라는 표현 또한 구약의 성취로서의 중요한 호칭입니다. 이것은 산상수훈이 시작되는 마태복음 5장의 서두에서 예수께서 입을 열어 가라사대의 표현은 구약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가라사대’와 동일한 신적 선포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유대인 독자들을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이란 독특한 장소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신현의 장소이며, 거룩한 곳이며,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과 가까운 장소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산은 일반적인 곳이 아닌 신성한 곳입니다. 마태는 이러한 유대적 전통을 통해 예수가 ‘산’에서 설교했으며(5:1), ‘산’에서기도 했으며(14:23), ‘산’에서 변화되었고(17:1), 부활 후 ‘산’에서 제자 삼으라는 명령을 합니다.(28:16) 유대인들에게 산은 곧 시내산으로 연결됩니다. 모든 산이 시내산은 아니지만 마태는 확실하게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산과 예수의 강화가 산에서 이루어졌다는 표현을 통해 새로운 모세로서의 예수를 부각시키는 것은 확실합니다.
ㄷ. 구조로 본 마태복음의 상징성
마태복음은 매우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매우 다양한 상징과 의미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간의 수많은 논쟁의 대상이기도 하고 흥미로운 연구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마태복음에 구조입니다. 이곳에서는 굳이 마태복음의 구조를 면밀하게 살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특이한 요소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강론의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태가 예수의 강론을 유대인들의 가장 권위 있는 토라인 모세오경을 본떴을 가능성이 가지고 있습니다. 다섯편 모두 마지막 부분은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7:28, 11:1, 13:53, 19:1, 26:1)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강 산상 설교(5-7장)
2강 열두 제자 파송에 관해(10장)
3강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비유(13장)
4강 제자의 적분과 훈련(18장)
5강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24-25장)
비록 우리가 마태복음의 5강화와 모세오경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수는 없지만 암시적인 부분에서 충분히 의도될 수는 있다는 점에서 구조적 측면으로서 새율법의 의미를 부여했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마태복음의 중심에 천국 비유(13장)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과 유대적 전통 속에서 새로운 말씀의 선포자로서 예수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함께 나눌 산상 수훈 속의 팔복은 예수의 첫 번째 강론이자, 첫 강론의 서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전체 구조 속에서 팔복은 하나님의 나라의 헌법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또한 율법을 재해석함으로 하나님을 예수로 ‘대체’시키고 있습니다. 마태는 의도적으로 율법과 예수의 선포를 대립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를 들어 산상수훈 안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는 구약의 율법을 말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방식을 통해 새로운 율법의 선언자로 선언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산상수훈은 마태가 정의하고 싶은 ‘하나님 나라’의 입법자인 예수의 새로운 법입니다.
첫 강화인 산상수훈(5-7장)은 세 부분을 나누어졌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에 동의하며 이견이 거의 없습니다. 서두는 5:3-16, 본체는 5:17-7:12, 결어는 7:13-27입니다.이 부분은 울리히 리츠의 이야기를 옮겨와도 될 것 같습니다.
“산상설교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입(5:3-16),몸체 (5:17-7:12) 그리고 나가는 말(7:13-27)이다. 몸체는 디시 세 부분으로 나뉜다(마태는 이렇게 3조 구성법을 즐겨 시용한다). 반제(그 도입부인 5:17-20과 5:21-48), 몸체의 중심부(6:1-18) 그리고 결말부 (6:19-7:11와 ‘맺음말 인 7:12)이다 5:17과 7:12은 내용적으로 ‘율법과 예언자들’의 성취라는 사상을 통해서 몸체를 둘러싸는 틀을 형성 한다 우리는 산상설교의 한가운데에서 주기도를 발견한다(6:9-14) 주기도의 앞뒤는 경건률(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에 관한 단락으로 구축된다 간단히 말해 주기도는 하늘 아버지와 인간의 관계에 관한 단락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버지’ 라는 단어는 이렇게 산상설교의 중심부분을 장악하고 있다(10번) 반제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외적인 의' 의 질문에 이어,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관계, 말하자면 의의 내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에 관한 단락이 연결되고 있다. 이것으로 의의 실천은 기도로 연결되고, 기도는 아버지를 향한 기도가 된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이미 알고 듣고 있는 아버지이시다(6:7f.) 왜냐하면 그분은 감추어진 것에서 보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6:4, 6, 18) 마지막 단락인 6:19-7:11은 이와 비슷한 구조를 보여 준다 마태에게 이 부분은 더 나은 의를 위한 내용적인 핵심염역으로 시작한다. 즉 제지들의 소유에 대한 태도(6:19-34)가 그것인데 이것은 다시금 기도에 관한 언급으로 자녀들이 구하는 것을 들으시는 아버지(7:7-11)로 끝난다.”
우리는 울리히 리츠의 주장에 전적을 동의할 수는 없지만 산상수훈이 갖는 독특성과 몇 가지 중요한 문제는 충분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산상수훈은 ‘무리’를 보시고 시작하고, ‘무리’의 놀람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산상수훈이 오직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산상수훈은 무리가 아닌 ‘제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제자는 열두 사도만을 말하지 않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을 뜻합니다. 제자는 서신서로 돌아가면 ‘성도’ 또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대체된다는 것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산상수훈의 핵심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이며, 기도와 삶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전체 주제가 ‘하나님이 나라’이며, 왕으로서 예수님을 그리고 있다면, 산상수훈은 왕의 선언과 같습니다. 그래서 정훈택 교수를 아래와 같이 산상수훈을 읽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산상설교를 이해하는 열쇠는 천국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이 설교를 하셨다는 사실이다. 즉 산상설교는 예수님을 천국의 왕으로 전제하고 있다. 예수님에 관하여 마태는 앞 장에 명백하게 밝혔기 때문에 산상설교를 읽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천국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아들로 믿고 그 믿음 위에서 산상설교의 내용은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ㄹ. 마태복음의 신학
-하나님의 나라(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이제 마태복음이 지향하는 신학을 몇 가지만 간략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두드러진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다른 복음서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유독 마태복음은 현저하게 구약의 성취로서의 예수를 소개합니다. 마태복음은 시작부터 ‘왕국’을 선포합니다. 다윗의 자손은 유대의 전통 왕족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왕은 곧 다윗이며, 왕들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예수는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다윗의 후손으로 소개됩니다. 마태복음의 중심을 잡고 있는 13장 7개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 땅에 임했고, 임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의 연대기적 기술은 장소의 범위를 예루살렘으로 좁혀가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정복한 나귀 탄 갈릴리의 청년의 정체는 바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왕의 후손이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러한 반적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누가처럼 천한 신분의 목동이 아니라 동방의 귀족들이 찾아와 경배하며, 예루살렘의 가짜와 헤롯이 소동하며, 그가 곧 출애굽 때 이스라엘 남자 아이들을 죽였던 거짓의 왕 파라오라는 것을 은유적 표현 방법을 통해 드러냅니다. 결국 마태는 구약 출애굽과 광야 생활, 그리고 가나안 정복까지의 과정을 모형론 방식을 통해 예수의 생애에 담아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상수훈은 출애굽 이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율법을 받은 사건을 암시적으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는 새로운 율법의 설립자요, 수여자로서 등장합니다.
-경배의 대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신약의 성도들에게 너무나 식상한 주제이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혁명적 사건이었습니다. 심지어 ‘주’는 대체로 노예가 주인을 부르는 호칭이기도 했지만, 구별된 호칭은 오직 로마 황제에게만 부여되는 특별한 호칭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에게 곧바로 ‘주’라는 호칭을 주었으며, 구약의 메시아(그리스도)로 선언합니다. 신약의 그리스도는 비록 구약에서 계승되었지만 구약의 메시아를 초월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메시아와 달리 신약의 메시아(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은 구약에서 하나님에게 사용된 대부분의 표현들을 곧바로 예수에게 적용할 뿐 아니라, 경배의 대성으로서 예수를 소개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신성모독입니다. 마태 기독론의 핵심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호칭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세밀하게 다루지 않겠지만 킹스베리(J. D. Kingsbury)의 언급대로 ‘하나님의 아들’은 마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론적 호칭입니다. 또한 ‘임마누엘’과 ‘인자’ 호칭들은 구약의 메시아 사상을 가져온 것이며, 마태를 비롯한 신약의 저자들은 이것을 하나님과 메시아를 경배의 대상으로 동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래리 허타도의 <아들을 경배함>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증거에서도, 예수는 자주 ‘그리스도’,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퀴리오스’로 언급된다. 곧 그는 함께 모인 예배 공동체의 주님이자, 신자들이 순종하고 기원을 드리며 경배해야 할 존재로서 제시된다. 또한 이 가장 이른 시기부터, 원래는 하나님을 언급하는 내용이었던 구약의 본문들이 예수께 적용되었다. 구약의 이런 식으로 활용된 것을 보여주는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아마도 요엘 2:32의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언급이 전유된 경우일 것이다. 곧 로마서 10:9-13에서는, 예수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그 이름을 ‘불러야’ 할 ‘주’가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상산수훈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서 예수의 선포입니다. 즉 마태는 예수를 새 모세를 너머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ㅂ. 시대적 상황
이곳에서 다 다룰 수는 없지만, 마태복음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잡아낼 필요는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 시기는 이르면 65에서 늦어도 80년 사이로 잡습니다. 66-74년까지를 ‘1차 유대 독립 전쟁’로 부릅니다. 이 시기는 팔레스틴 지역의 격동기였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성전 모독 사건으로 촉발된 마카비 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했던 유대인들이 로마에 의해 다시 속국으로 전락합니다. 1차 독립 전쟁은 당시 로마 총독 게시우스 플로루스(Gessius Florus)가 주후 66년 5월쯤에 예루살렘 금고를 약탈합니다. 60년 이후가 되면 친로마파와 유대 전통파와의 갈등이 심각하게 대두됩니다. 그러다 성전 약탈 사건이 일어나면 전통파가 힘을 얻게 되고, 대대적인 해방운동이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은 갈라져 서로 혈전을 벌이게 됩니다. 반로마 저항운동의 선봉이었던 갈릴리 사람 유다의 아들 메나헴과 그를 따르는 젤롯당원들이 군사 요충지 마사다를 점령하고, 대제사장 아나니아스의 아들 엘리아살이 성전에서 로마 황제를 위해 드리던 제사를 중지시킵니다. 이것은 로마의 통치를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였고,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는 결정적 봉기의 순간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메나헴을 중심으로 한 진보파와 친로마파였던 제사장그룹을 중심으로한 사두개인들은 로마는 싫어했으나 혁명을 원하지 않았던 바리새파와 손을 잡고 메나헴과 대적합니다. 그러나 메나헴이 이끈 젤롯당이 주도권을 쥐게 되고 로마군의 안토니아 요새와 헤룻 왕궁도 접수게 합니다. 메나헴은 왕처럼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헤롯 왕궁의 통치권을 넘겨 받습니다. 메나헴이 보석으로 치장한 왕의 옷차림으로 성전 예배에 참석한 어느 날, 대제사장의 아들이었던 엘레아살을 추종한 사람에 메나헴을 살해합니다. 결국 메나헴을 따르던 이들은 마사다로 퇴각합니다.
상황을 지켜보던 로마는 시리아의 행정장관 갈루스(Cestius Gallus)이 이끄는 12군단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반락을 진압하려 합니다. 그러나 벳호른 근처에서 유대인들의 매복 공경에 의해 괴멸하다시피 합니다.(66년 10-11월) 우연에 가까웠던 전쟁의 승리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산이 있겠다는 헛된 기대를 품게 합니다. 그 일로 온 이스라엘은 로마와의 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결국 네로 황제는 용장 베스파시안을 파병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고자 아들 티투스와 함께 6만 명으로 구성된 군단을 이끌고 내려옵니다.
먼저 갈릴리 지역을 67년 6/7월에 초토화 시킵니다. 로마군은 67년 말년이 되자 갈릴리지역을 완전히 접수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됩니다. 안타깝게 예루살렘은 서너 개 파로 갈려 권력 다툼에 정신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리멸렬(支離滅裂)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로마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베스파시안을 로마로 돌아가고 티토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봉쇄합니다.
70년 7월 말에 드디어 전쟁이 개시되고,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성전은 완전히 파괴됩니다. 9월 초에 이르러 예루살렘 전역이 로마의 수중에 떨어지고 예루살렘은 완전히 멸망됩니다. 전설에 의하면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던지 피가 온 하천에 흐르고 무릎까지 덮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근근이 유지해 왔던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맙니다. 복음서들이 기록된 시기는 바로 예루살렘 멸망 전후의 긴박하고 어지러운 시기였습니다.
모든 전통이 사라지고 신앙과 전통이 무너져 버린 황량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공황이 일어납니다. 이때 복음서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시작되었고, 예수를 통해 교회라는 새로운 공체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야 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누가가 이방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할 목적이었다면, 마태는 전통적 유대인들을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임을 선언하고,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임을 강조하려 한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마태복음은 완전히 새로운 무엇이 아닌 전통적 유대 관점을 재해석하고, 바로 잡아주려는 교육 목적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스텐달(K. Stendahl)은 마태복음을 ‘교회의 내의 가르침과 행정을 위한 소책자’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소개하려는 의도에서 역사의 격동기 동안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마태는 예루살렘이 아닌 새로운 예루살렘을 기대하고, 지리적 이스라엘이 아닌 신앙적 토대를 제공하는 영적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설파합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산상수훈과 팔복을 해석하고 주해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인용된 헬라어는 다른 설명이 없으면 Novum Testamentum Graece (NA 28)를 사용했으며, 한글성경은 개정개역4판(최종판)을 사용했습니다. 한글성경은 한글로 번역한 성경을 뜻하거나 개정개역판입니다. 만약 다른 성경일 경우 ‘한글개역’이나 ‘공동번역’ 등으로 표기했습니다.
목차
1. 서론 말씀하시는 하나님
2. 일복: 심령이 가난한 자
3. 이복: 애통하는 자
4. 삼복: 온유한 자
5. 사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6. 오복: 긍휼히 여기는 자
7. 육복: 마음이 청결한 자
8. 칠복: 화평케 하는 자
9. 팔복: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
10. 결론: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본문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팔복 주해와 강해]
1. 서론 5:1-2 말씀하시는 하나님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1 Ἰδὼν δὲ τοὺς ὄχλους ἀνέβη εἰς τὸ ὄρος, καὶ καθίσαντος αὐτοῦ προσῆλθαν αὐτῷ οἱ μαθηταὶ αὐτοῦ·
2 καὶ ἀνοίξας τὸ στόμα αὐτοῦ ἐδίδασκεν αὐτοὺς λέγων·
2. 5:3 심령이 가난한 자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3 Μακάριοι οἱ πτωχοὶ τῷ πνεύματι,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3. 5:4 애통하는 자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4 μακάριοι οἱ πενθοῦντες,
ὅτι αὐτοὶ παρακληθήσονται.
4. 5:5 온유한 자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 μακάριοι οἱ πραεῖς,
ὅτι αὐτοὶ κληρονομήσουσιν τὴν γῆν.
5.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6 μακάριοι οἱ πεινῶντες καὶ διψῶντες 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
ὅτι αὐτοὶ χορτασθήσονται.
6. 5:7 긍휼히 여기는 자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7 μακάριοι οἱ ἐλεήμονες,
ὅτι αὐτοὶ ἐλεηθήσονται.
7. 5:8 마음이 청결한 자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8 μακάριοι οἱ καθαροὶ τῇ καρδίᾳ,
ὅτι αὐτοὶ τὸν θεὸν ὄψονται.
8. 5:9 화평케 하는 자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9 μακάριοι οἱ εἰρηνοποιοί,
ὅτι αὐτοὶ υἱοὶ θεοῦ κληθήσονται.
9. 5:10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0 μακάριοι οἱ δεδιωγμένοι ἕνεκεν δικαιοσύνης,
ὅ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ἡ βασιλεία τῶν οὐρανῶν.
10. 결론 5:11-12 너희에게 복이 있다.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11μακάριοί ἐστε
ὅταν ὀνειδίσωσιν ὑμᾶς καὶ διώξωσιν καὶ εἴπωσιν πᾶν πονηρὸν καθ’ ὑμῶν [ψευδόμενοι] ἕνεκεν ἐμοῦ.
12χαίρετε καὶ ἀγαλλιᾶσθε, ὅτι ὁ μισθὸς ὑμῶν πολὺς ἐν τοῖς οὐρανοῖς· οὕτως γὰρ ἐδίωξαν τοὺς προφήτας τοὺς πρὸ ὑμῶ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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