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스 신약 성경, 아바서원
필립스 신약 성경
아바서원 / 김명희 옮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매일 시간을 들여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마음을 튼실하게 하며 영혼을 강하게 한다. 성경을 매일 읽기 위해서는 좋은 성경책을 골라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모든 교단과 교회가 합의된 성경책을 사용하기 때문에 다른 번역본을 잘 보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어에 맞게 새롭게 번역된 성경을 읽는 것은 신앙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잘 번역된 성경은 성경의 원의(原意)를 이해하기 쉽도록 돕는다. 그렇다면 잘 번역된 성경이란 무엇일까?
좋은 번역은 원어가 가진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하는 것이다. 성경 번역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하나는 직역이고 다른 하나는 의역이다. 직역은 현대적 상황을 최소한으로 고려하고 가능한 문자 그대로 번역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창세기의 남방을 원어인 네게브로 곧바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지명은 고유 명사에 속하기 때문에 대부분 성경은 직역을 우선으로 하지만 한글 성경처럼 고유명사라도 남쪽을 뜻하기 때문에 ‘남방’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영서 성경의 경우 NASB가 직역 번역본에 속한다. 엄밀하게 성경은 직역이 불가능하다. 히브리어의 경우 동사 먼저 나오며, 축어적 문장이 많아 많은 부분에서 덧붙여진다.
의역은 가능한 현대의 언어와 상황에 맞게 새롭게 번역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의 <Living Bibe>나 우리나라의 <현대어 성경> <쉬운 성경> 등이 의역한 성경들이다. 의역이 지나칠 경우 성경이 말하려는 의도에서 벗어나 오역(誤譯)을 넘어 반역(反逆)이 되기도 한다.
성경 번역은 결코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사람의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구절을 예로 들어보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떡’은 일상의 허기를 채우는 양식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떡은 엄밀하게 양식이 아니다. 특히 쌀이 귀했던 조선시대나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떡은 먹기 쉬운 것이 아니었다. 밥이라고 번역해야 훨씬 원어에 가깝다. 하지만 밥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가볍게 보인다. 모든 번역이 그렇지만 성경 번역은 더더욱 쉽지 않다.
처음 필립스 성경을 읽었을 때 메시지 성경과 비슷했다. 뭔가 표현하기 힘든 힘이 느껴졌고, 현대의 책들을 읽는 듯 친숙했다. 영어권에서 필립스 성경은 뛰어난 번역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하지만 한글 번역을 어떨까? <쉬운 성경>과 <메시지 성경>을 함께 비교하며 읽어 나갔다. 개인적인 느낌이겠지만 다른 현대어 성경에 비해 확연히 잘 읽혔다. 현재 대부부의 한국교회가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개정개정의 경우 아직도 100년 전의 말투를 읽는 듯한 불편함이 느껴진다. 이번에 재번역에 들어가면서 많은 기대를 했지만 실제로는 4판까지 수정했음에도 거의 바꾸지 않은 체로 출간되었다. 어떤 단어는 퇴보하는 일까지 있었다.
공용 성경의 경우는 함께 사용하는 교단과 교파의 신앙색이 현저히 차이가 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어투는 오랜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연로한 이들의 입김이 들어가 현대어로 바꾸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더 깊이 읽고 싶고, 현대적 의미를 충분히 살려 읽고 싶다면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 이러한 필요가 있었기에 우리나라의 경우도 몇 번에 걸쳐 현대어로 번역하려는 시도들이 있었고, 계속되었다. 또한 계속되어야 마땅하다.
세 번째 번역법이 존재하다. 그건 직역과 의역의 개념을 너머서는 것이다. <필립스 성경>이 탁월한 이유는 바로 세 번째 번역 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필립스는 이렇게 말한다.
“글을 번역할 때는, 단어보다는 글쓴이의 마음에 공감하며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감과 상상력, 이 단어가 성경 읽기가 아닌 번역에 사용되었다는 점은 놀랍다. 필립스 목사는 성경을 번역할 때 독자들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마음과 의도를 알아채기를 기대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직접 읽어야 한다. 모든 부분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중세 시대처럼 누군가의 해석된 ‘설교’만을 듣는다면 심각한 믿음의 퇴보가 일어난다. 필립스 목사의 영향을 받아 메시지 성경을 번역한 유진 피터슨 목사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신적 계시가 그토록 평범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무방비 상태에 있는 우리를 침범할 때, 우리는 거기에다가 신학이라고 하는 최신 유행의 실크 가운을 입히거나 윤리학이라고 하는 견고한 정장을 입히는 것이 우리의 우선적인 임무라고 착각하게 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즉 이야기로 듣지 않고 신학자의 도움을 받아 해석하고 주해해야 하는 난해한 책으로 읽게 된다면 그러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필립스 목사는 헬라어에서 곧바로 영어로 옮기면서 당시 현대어의 의미를 충분히 살려 번역하려 애썼다. 그는 좋은 번역을 세 가지로 말한다. 하나는 번역한 것처럼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 두 번째는 번역자 자체의 개성이 두드러져서는 안 된다는 것, 세 번째는 원저자의 글이 원 독자들에게 주는 감동이 번역서를 읽는 현대의 독자들의 가슴에도 전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필립스 목사는 세 번째에 중점을 두었다. 그런 점에서 직역보다는 의역에 치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기존의 현대어 성경과 달랐던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했던 의도 때문일 것이다. 문법 체계가 다른 고대어를 현대어로 바꾼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필립스 목사는 문법과 단어에 집착하기보다는 문맥에 맞게 쉽게 읽히도록 애를 썼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 성경에서 수없이 많다. 예를 들면 ‘아담’이란 단어를 고유명사로 번역하면 사람인 아담이 되지만 일반명사로 해석하면 사람이 된다. 원어를 읽지 않는 이상 누구도 그 단어가 아담인지 알 수 없다.
모든 번역 성경은 완전하지 않다. 이 번역본 역시 완전하지 못하다. 어떨 때는 이렇게 번역하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드는 곳도 보인다. 그럼에도 필립스 번역은 꽤나 감동적이고 술술 읽힌다. 멀리 있던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지게 한다. 읽어 보지 않으면 모를 진한 감동이 전해진다. 올해는 필립스 성경으로 신약을 일독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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