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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나라스탠리, 하우어워스

샤마임 2022.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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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나라

스탠리 하우어워스 / 비아토르

평화의 나라

 

기독교 윤리가 가능할까라는 논쟁은 이미 오래된 것이므로 건너뛰자. 하지만 한 가지는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사도행전 15장 등장하는 최초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될 때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한다. 율법 중에서 할례는 초대교회 안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 중의 하나였다. 그럼에도 교회는 할례를 비롯한 모든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공식 선언한다. 약간의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바울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교사들과의 할례 논쟁은 신약 안에서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기독교 윤리학의 범주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독교 윤리학을 부정하는 이들은 윤리학으로 체계화시키면 복음을 변질시키며 신앙의 퇴보를 가져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다른 한 편에서는 윤리가 없다면 방자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러한 윤리학 정립에 대한 논쟁은 초대교회가 했던 논쟁과 결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기독교 윤리학은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고 답해야 옳을 듯하다. 윤리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맥락으로 흘러갈 수 있지만 신앙은 곧 삶이고, 삶은 윤리를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독교 윤리학은 난제이다.

 

기독교 윤리를 규정하기 위한 두 가지의 큰 전제가 있다. 하나의 전제는 기독교만의 독특성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기독교의 정체성이다. 계시에 근거한 철저한 독립성으로서의 윤리학과 사회적 상황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윤리학이다. 기존의 기독교 윤리학이 철저히 계시에 근거한 기독교의 특수성에 몰두했다면 최근 들어서는 공공신학이란 용어를 통해 알 수 있듯 사회와의 상호성의 관점에서 윤리학을 접근한다. 두 전제의 긴장은 교회가 계시의 공동체인 동시에 사회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발생한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비폭력 주의라는 부제가 알려주듯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비폭력에 대한 논의다. 그런 차원에서 저자의 윤리학은 사회참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요 흐름으로 잡고 있다. 그는 사회에 대한 악과 불의에 대해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는 비폭력의 근거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찾는다. 신학을 전제하는 특징 때문에 저자를 신학적 윤리학자 또는 비폭력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기독교 평화주의자로 불린다. 저자의 핵심논제는 4-6장에서 상세하게 다룬다.

 

저자는 서문에서 평화의 개념을 에드워드 힉스의 <평화의 나라>에서 영감을 받았고, 종말론적 비전을 통해 보게 되는 이사야서의 종말론적 환상에서 채용한 것이라 말한다.(참 사 11:6, 65:25) 도입에서 자신이 영향을 받은 이들을 소개하는데 리처드 니버와 비트겐슈타인, 라인홀드 니버의 영향을 언급한다. 또 한 명은 아나뱁티스트의 강력한 사상가인 존 요더를 언급한다. 필자의 견해가 틀리지 않다면 저자는 존 요더의 신학적 관점을 상당 부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반부에서 저자는 윤리학의 근거를 몰역사적 윤리학을 비판하고 성경의 내러티브에서 찾는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워하셨기 때문에 계시가 주어진다는 서사로서 윤리학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속의 역사를 통해 가능해진 삶의 방식을 채택하라는 명확한 요구’(97)로서 윤리학이 존재해야 한다. 3장은 성경의 내러티브 안에서 인간의 자유와 성품, 죄에 관해 다룬다.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5장은 기독교 윤리학의 출발점은 기독론으로 언급하면서 존재론적 기독론이 아닌 그리스도의 생애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지식 전달을 위한 목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는 법’(171)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학은 원리, , 가치의 윤리학이 아니라 무엇보다 나사렛 예수라는 특정한 개인의 삶에 주목하기를 요구하는 윤리학’(174)이다.

 

기독교 윤리학에 그다지 지식이 없는 필자로서 이번 책은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5장과 6장은 적지 않은 도전을 주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기독교 윤리학에 대한 생각도 일부 수정되었을 뿐 아니라 덕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지금까지 배워온 교회론과 상통(相通)하면서도 새롭게 보도록 요구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비폭력에 얼마만큼 동의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교회는 규칙을 정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삶의 측면에서 의문을 제기하고 함의(含意)를 끌어내야 한다고 확신한다. 아래의 문장을 인용하고 이 책의 평을 마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불러온 하나님의 평화의 나라가 함의하는 바를 보여주는 개척자이다. 교회는 우리 존재의 모든 측면에서 평화의 백성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서서히 배워 나가면서 교회의 삶의 모든 측면에 거침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그럼으로써 평화의 나라의 함의를 드러낸다. 교회라는 공동체의 삶의 일부가 되는 ‘금지사항들’은 최소주의적 규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런 항목들은 공동체와 개인이 상상력을 자극하여 폭력적 세상에서 평화의 백성이 되는 데 필요한 새로운 반응 형태를 끌어내야 한다.”(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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