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가인 /창세기 4:1-15
하나님과 가인
창세기 4:1-15
인류의 역사 가운데 형제간의 사랑과 우애를 다룬 문학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문학 작품들 속에서 형제간의 사이는 결코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 전래 동화만 봐도 그렇습니다. 놀부와 흥부도 그렇고, 콩쥐와 팥쥐도 그렇습니다. 찾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형제간의 다툼과 시기의 예는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형제들은 서로 우애있게 지내지 못하는 것일까요? 동생은 형을 미워하고, 형은 동생을 싫어합니다. 가끔 우애가 좋은 형제가 있기는 하지만 정말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성경 속을 찾아보아도 형제간의 사이가 결코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나오는 가인과 아벨 사이도 그렇고, 이삭과 이스마엘, 야곱과 에서도 그렇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요셉의 그의 형제들은 어떤가요? 사무엘서에 나오는 다윗의 자식들은 서로를 죽이는 살인까지 저질렀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도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곳에도 역시 형제간의 보이지 않는 시기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벨과 가인이라는 두 형제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아담은 살아생전 아들들의 싸움을 보았고, 결국 큰 아들이 막내를 처참하게 죽이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은 형제간의 다툼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 까요?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눈으로 직접 보았던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부모보다 먼저 자식이 죽는 것이 가장 불효였다고 합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합니다. 아벨의 죽음 앞에서 아담과 하와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담은 가인의 살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창세기 4장에 나타난 가인의 상태는 아담의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처음 죄를 짓고 하나님께 변명하며 자신의 잘못을 회피했습니다. 아담은 단지 저지른 죄악 때문에 자신의 징벌로 모든 것이 끝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은 자식들은 자신은 상상하지 못했던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후 하나님 앞에서 했던 것은 자신의 죄를 다른 이들에게 전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것이 자신 때문일 아니라고 변명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시켜서 그랬다. 환경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아담을 죄의 씨앗을 심었고, 가인은 그 씨앗이 성장하여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의 씨앗이 어떻게 자라는가를 살펴봅시다.
성경은 ‘세월이 지난 후’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렇고 많은 신학자들은 이 제사의 정체를 궁금해 합니다. 제사의 정체를 밝히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고 그 예배에 집중해 봅시다.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었다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기뻐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형이었던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 사람은 열납되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고등학생을 예로 들어 볼까요? 수능이 끝나면 나면 고등학생들은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서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잠시 후 그들은 대학생과 재수생으로 갈라서게 됩니다. 시험이 끝나고 나면 열등생과 우등생으로 분리가 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시기가 되면 이들은 다시 분리가 됩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분리가 되고, 취업자와 백수로 분리가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고 싶어 합니다. 공부도 잘하고 싶고, 취업도 좋은 곳에 하고 싶고, 멋지고 괜찮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는 얼굴 예쁜 여자가 돈도 잘 벌고 멋지고 능력 있는 남자를 만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이번 달 25일에 출간된 <미인 경제학>이란 책에서 속설로만 전해오던 이야기를 연구를 통해 이론적으로 밝혀내었습니다. 외모효과가 현대처럼 강력하게 있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자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5절)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가인에게 나타난 ‘왜 그렇게 화를 내느냐 왜 너는 그렇게 분해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분노’ 이것은 지금까지 아담에게서는 찾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죄의 양상입니다. 지난 20일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집에 들어간 주부를 성폭행하려다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수례의 범행을 저질러 교도소에 들어갔으며 그날도 교도소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22일 여의도 있었던 살인 사건은 자신을 무능하다고 책망한 상사를 계획적으로 지지른 사건이었습니다. 가난과 소외로 인해 고립된 삶을 살아가던 그들은 사회에 대한 ‘분노’를 쌓아가다 결국 참지 못하고 살인의 자리에까지 나아갔던 것입니다. 일명 ‘묻지 마 살인’으로 불리는 살인사건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고립된 사람들이 일으키는 범죄입니다. 이 사건은 선진국으로 들어가면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범죄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 간의 격차가 심해지고 노력해도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이러한 극단적인 일을 저지르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 피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는 것을 참아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하게 사는 데 우리 집만 불행하다면 견딜 수 없어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대학에 들어갔는데 자신 혼자만 떨어진다면 견디기가 무척 힘이 들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자 견딜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결국 자신을 불행으로 이끈 동생을 살해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죄의 두 번째 성향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죄인들은 모든 불행의 이유를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타인에게서 또는 환경에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범한 후 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분노의 밑바닥에는 자신의 불행의 이유를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들어가 있습니다. 인간이 불행해지는 가장 근본 이유는 바로 ‘탓’하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인에 아벨을 탓하는 것이 옳은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정말로 미워하셨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의 형은 아버지가 자신의 동생에게 큰 잔치를 베푸는 것을 보고 분개했습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큰 아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애를 쓰면서 극도의 자기 절제와 희생을 치른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적 저희 가정은 형편이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 5학년쯤을 시작으로 저희 집은 갑자기 집이 기울어지면서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병을 앓아누우시고 어머니는 우리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 먼 곳으로 장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고 큰 누나는 부산 가양동의 공장에서 일하면서 모든 돈을 몽땅 집에 보내왔습니다. 친구와 제대로 놀아본 적도 없고 편하게 옷을 사 입어 본적도 없이 동생들과 가족을 위해 희생했습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가족을 살려야 한다는 마음이 장남 장녀들에게는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형도 그랬습니다.
눅15:29-30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어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여기서 큰 형이 주장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위하여 희생한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면서 방탕한 삶을 살다가 아버지의 재산을 써버린 저 녀석만을 사랑하십니까? 아버지는 왜 저를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이렇게 행하시는 아버지에게 실망했고, 분노했습니다. 마음이 무척 상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만약 저 녀석이 없다면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몽땅 받을 텐데. 저 녀석이 없다면 아버지가 나만을 사랑해 줄 턴데. 왜 태어나서 나를 힘들게 하는 거야.’
하나님은 이러한 생각을 하는 가인을 향하여 경고 아닌 경고를 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 이 본문은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가인이 결코 선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증거해 줍니다. 겉으로는 선한 척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의 영적인 의미도 들어가 있습니다. 죄는 어느 순간에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점점 자라나 어느 순간에 우리를 덮쳐 삼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는 말씀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가인의 살인 속에는 또 하나의 숨겨진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작은 죄를 허락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작은 죄를 한 번 허락하기 시작하면 그 죄는 점점 커지고 담대해져서 어떤 죄도 지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의 죄도 동일합니다. 행동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음란한 마음을 품고, 생각을 계속하여 키워 가면 마침내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좋습니다. 아까 했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하나님은 정말 가인을 미워하셨을까? 요. 적어도 가인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가인은 아벨이 누리지 못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은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아버지는 마음 밖에 서 있는 아들에게 직접 찾아가셨습니다. 눅15:28에 분명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제가 어릴 적 저희 아버님은 종종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거나 연약하기 때문에 덜 사랑하거나 더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고난을 당하거나 징계를 당하면 거절감을 갖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는 정말 위험한 생각입니다. 필립얀시는 <기도>라는 책에서 이렇게 통찰합니다.
“기도의 핵심은 정직이라고 믿는다.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다가가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루터처럼 열등감에 휩싸여 허덕인다. 스스로 죄를 지었거나, 한눈을 팔았다거나, 성질이 급하다는 자책감을 느끼며 그렇게 부정적인 자실 때문에 하나님의 관심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오직 착한 이들의 이야기만을 듣고 싶어 하신다고 지레 단정 짓는 것이다.”(기도, 333쪽) “부족하고 가치 없는 존재여서 기도할 수 없다는 건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런 사실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기도를 시작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 조건일 뿐이다.”
얼마나 놀라운 통찰입니까? 우리의 부족과 연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는 이유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족하고 연약하십니까? 그렇다면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허물이 많고 보잘 것이 없습니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자의 기도를 더 기뻐하십니다. 정직하게 기도하고, 단순하게 기도하고,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주님께 나아가는 세 가지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습니까?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분노하며, 우울해하며, 슬퍼하지는 않습니까? 더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동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는다는 편견이 살인까지 저지르게 했습니다. 온 세상을 다 가진 우리 임에도 우리도 진정 행복을 모르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세상을 원망하여, 남을 탓하며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 예화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돈불 / 19세기 독일 극 중에 ‘돈불’이라는 단막극이 있습니다. 이 극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떤 가정에 부자인 아버지와 사별한 아내 대신 들어 온 계모와 아들과 딸 이렇게 네 식구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행복했던 집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앞두고 재산 문제로 가족들끼리 큰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비록 내가 계모지만 아내인 만큼 재산권이 내게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아들은 아들대로 “그게 무슨 말이냐? 진짜 상속자는 아들인 나다.”하고 물러나지 않습니다. 딸도 가만있지 않습니다. “요즘 법이 바뀌었다. 내게도 동등한 권리가 있다.”라고 소리칩니다.
이처럼 모두가 돈에 눈이 어두워 일순간 행복했던 집이 지옥으로 변했습니다. 이때 핏대를 올리던 아들이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뭐하고 있는 겁니까? 도대체 돈이 뭐기에 행복했던 가정이 깨어지고 이렇게 서로 원수가 되었죠?”라고 울부짖으며 돈을 포기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이에 감동을 받은 어머니와 딸도 재산을 포기하겠다며 동의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이 돈 다 버립시다. 이 돈 때문에 우리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 이 돈을 다 버리고 예전처럼 행복하게 삽시다.” 이 말에 동의한 세 사람이 금고 문을 열고 산더미같이 쌓인 지폐 다발을 꺼내 벽난로에 집어넣고 돈이 타들어가는 불을 쬐며 “아, 따뜻하다!”라고 소리치며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연극은 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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