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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 5:11-6:3 더욱 성숙한 믿음을 가지라

샤마임 2018.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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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5:11-6:3 더욱 성숙한 믿음을 가지라

 

묵상 히브리서11합본.pdf


1. 말씀 읽기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2. 묵상

 

신앙이 흔들리는 이유 중의 하나는 피상적인 앎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지만 고난 속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전의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유혹에 빠졌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아직 영적으로 어린아이이며 영적으로 자라나야 할 것을 권면합니다. 영적으로 자라나는 것은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충고하면 복음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5:11-14 6:1-3로 크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저는 5:11-14절을 두 개의 주제로 구분하여 3가지 주제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듣는 것이 둔하다.

 

둔하다’(νωθρός)는 말은 행동이 느리거나 이해가 느린 경우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 밖에서는 부주의하다’ ‘머리가 나쁘다’ ‘소심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적 훈련을 통해 건강한 몸을 만들듯 지성을 활용하여 정신을 단련하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읽고 암송하지만 그 말씀이 갖는 깊은 의미를 알려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싫어합니다.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생각하기 싫어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된 습관입니다. 꾸준한 훈련을 거부한 탓입니다. 생각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래 생각 하기를 반복하여 깊은 사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듣기에 둔한 이유는 성경을 오랫동안 살피지 않은 습관이 만든 결과입니다. 결국 둔한 귀는 무능력을 만들어 냅니다.

 

때가 오래 되었’(12)지만 아직도 선생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말씀의 초보에 대해 가르침을 받아야할 처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ἀρχή)’(12) 시초(ἀρχή)’란 뜻이지만 성경 속에서는 처음 복음을 듣는 날 또는 그리스도의 도’(6:1)와 연관됩니다. 즉 가장 기본적인 복음의 기초인 셈입니다. 기본이 흔들리니 나머지는 두 말할 것도 없이 흔들립니다.

 

아이는 시간이 흐르면 홀로 서야 합니다. 식사도 스스로 먹을 수 있어야 하고, 용변도 스스로 보고, 옷도 스스로 입어야 합니다. 좀 더 자라면 부모를 돕고 자신이 해야 할 공부도 찾아서 해야 합니다. 이것을 성숙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때가 오래 인데도 아직도 가장 기본적인 지식도 확신하지 못해 혼란스러워 합니다.

 

2) 의의 말씀을 경험하라

 

그럼 어떻게 해야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몇 가지는 알려 줍니다. 먼저 그들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즉 의의 말씀을 경험해야 합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은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것’(14)입니다.

 

의의 말씀’(λόγου δικαιοσύνης)은 번역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성경의 교리를 의미합니다. ‘를 나타내는 δικαιοσύνη는 말씀, 교리, 가르침 등으로 번역됩니다. 아니면 곧바로 정의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문맥 속에서 의의 말씀은 어떤 것을 분별하기 위한 전제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단인지 거짓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마치 사십일 금식을 마치고 마귀에게 시험 받으실 주님께서 말씀으로 물리치신 것과 같습니다. 말씀의 저의를 알지 못하면 말씀으로 시험하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의의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알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미숙하고 어리석은 거짓들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성한 자는 단단한 음식을 먹고, 의의 말씀을 경험하며, 지각을 사용하며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젖을 먹고,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고, 지각을 사용할 줄 말라 연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비교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숙은 연단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로 머무는 것은 훈련을 받지 않고 계속하여 피상적인 삶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성숙하기 위해서는 아픔이 동반됩니다. 싫은 것도 해야 하고, 고통을 참아야하고, 더 넓고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프지 않고 자랄 수 없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하고, 수고한 만큼 자라나기 마련입니다. 믿음으로 성숙하고자 한다면 쾌락만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실패하고 넘어지는 과정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3)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마지막 권면은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나아가라 성숙하라는 말이며, 훈련과 연단을 통해 자라나는 것입니다. 자라기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먼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6:1절의 한글 번역은 문장이 길어 혹 버리고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르게 해석하면 도의 초보를 버리고 ... 죽은 행실을 ... 닦지 말고로 이어집니다. 즉 도의 초보를 버리지 말고, 죽은 행실을 행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의 초보에 머물러야하고, 더 나아가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도의 초보는 복음의 핵심이며 기초인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절대 버려서는 안 됩니다.

 

둘째, 기본적인 교훈을 다시 닦지 말아야 합니다.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말합니다. 이것을 다시 닦는다는 말은 유대교로 다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유대교에도 이러한 것들이 분명해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완전해 자기 전 세례 요한도 회개의 세례를 행했습니다. 또한 율법을 따라 거룩한 생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율법들은 악한 것이 아니라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표지판이고, 그림자입니다. 표지판을 붙들고 도착했다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표지판은 목적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할 분입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그림자로 돌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악한 것입니다.

 

셋째,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완전한 데, 즉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이 문제는 다시 두 번째 주제인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충고합니다.

 

에베소서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베드로 사도 역시 우리에게 계속하여 자라가라고 충고합니다.

 

베드로후서 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자라기 위해서는 말씀을 먹어야 하고,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또한 시간이 필요하고 연단과 훈련, 인내와 수고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계속하여 자라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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