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2. 6:4-12 부지런함을 나타내라
12. 6:4-12 부지런함을 나타내라
1. 말씀 읽기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2. 묵상
1절부터 12절까지 다루는 것이 좋으나 1-4절까지는 앞부분으로 넣어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권면했습니다. 4-12절까지는 히브리서에서 가장 난해 부분이기도하며 진지하게 다루어야할 본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구원을 받고도 다시 취소 될 수 있는가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히브리서의 문제만 아니라 구원과 중생, 그리고 성도의 견인, 작정과 섭리라는 중요한 교리들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1) 타락한 자들은 회개할 수 없다.
4-6절의 말씀은 위협적으로 들립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한 번’(ἅπαξ)은 단 한 번을 말합니다. 두 번은 없는 유일한 것입니다. 지금도 있는 간염 백신인 헤파박스(Hepavax)은 헬라어 한 번을 뜻하는 ‘하팍스’(ἅπαξ)에서 온 것입니다. 한 번이 접종으로 완전하게 간염을 예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만든 백신입니다. 그들이 경험한 것들은 두 번 주어지지 않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럼 그것들이 무엇일까요?
빛은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하늘의 은사는 하나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하늘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부르심과 성령의 임재하심을 뜻합니다. 이것은 바로 다음 구절인 ‘성령에 참여한 바’와 같습니다. 결국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굳이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거듭난 신자들의 특징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일을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는가입니다. 그 문제는 마지막에 다루고 히브리서가 말하는 체험이 무엇인지 알아봅시다.
크레이크 R. 쾨스터는 ‘빛을 받고’를 세 가지로 세분화 시킵니다.
a. 죄에서 하나님께로, b. 무지에서 지식으로, c. 죽음에서 생명으로
좀 더 자세히 나누어 봅시다.
a. 죄에서 하나님께로,
하나님은 빛이십니다.(시 27:1) 또는 그의 말씀을 뜻합니다.(시 19:8, 119:105.130, 등) 우리는 성경 많은 곳에서 하나님은 빛의 창조주이시자, 빛 자체이심을 말합니다.(이 부문은 저의 블로그 <하나님의 상징 빛>을 참고 바랍니다.) 빛이 하나님이라면 어둠은 죄와 죽음을 상징합니다.
시편 56: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죄는 두 번째 주제와 연결되어 무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빛이 비추인다는 말은 종종 하나님 안에서 거룩한 삶, 생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 두 구절만 보아도 빛은 하나님의 안에 거하는 삶인 것이 분명합니다.
요한복음 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1서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바울은 복음을 통해 어둠에서 빛으로,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킨다고 말합니다.(행 26:18, 9:3, 13:47 등) 어둠은 악이며, 죄의 상태를 말합니다.(롬 13:12, 눅 22:53) ‘빛 안에 거한다’는 표현과 ‘빛 아래 걷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 ‘선을 행한다’ 등으로 거듭난 자들의 삶을 의미합니다.
b. 무지에서 지식으로
두 번째 의미는 빛은 지식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헬라적 이분법적 지식이 아닙니다. 경험과 참여가 동반된 앎을 말합니다. 다음은 구절들은 빛이 하나님을 아는 빛, 또는 인간의 무지를 밝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시 19:7-8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철학에서 빛은 앎은 의미합니다. ‘아나톨레’는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란 뜻으로 앎에 대한 깊은 갈망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참 빛은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빛이 가지는 궁극적 의미는 모든 모호함과 논쟁을 잠재우는 ‘권위’에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 때 모든 모호함과 어둠이 떠나게 됩니다.
c. 죽음에서 생명으로
세 번째 빛은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신다는 것은 구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이사야와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우리의 빛이시며, 빛을 비추심으로 구원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은 곧 구원을 말합니다.
이사야 60장19절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고린도후서 4장6절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종합해 보면 빛을 비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구원의 복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버리고 타락한다는 것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한 번’(ἅπαξ) 밖에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 죽지 않으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단호하게 타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무효화 시키는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2) 그들은 마지막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복음을 버린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는 자들은 비를 흡수하여 채소를 내는 땅처럼 합당한 열매를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이와 엉겅퀴를 낸다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마지막에 불사름을 당할 것입니다. 땅에 대한 비유를 좀 더 살펴봅시다.
하늘은 비를 내리고 땅은 비를 흡수합니다. 하늘은 하나님을 뜻하고, 땅은 이 땅의 사람들입니다. 범위를 좁힌다면 유대인들이 될 것입니다. 비를 내리는 행위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이며, 구원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은 생명이며 구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을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1:1)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입성하여 하신 대부분의 말씀들은 유대인들의 완악함을 경고하신 것들이었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는 것은 심판입니다.(마 21장) 혼인 잔치의 비유,(마 22장) 등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비를 흡수했지만 불순종과 완악함과 우상숭배라는 엉겅퀴를 낸 것입니다.
엉겅퀴는 죄와 악을 말합니다. 농부는 마땅히 채소와 열매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아무 쓸모없는 죄와 악을 맺습니다. 농부이신 하나님은 엉겅퀴를 뽑아 버리실 것입니다. 엉겅퀴가 나쁜 이유입니다.
a. 양분을 흡수합니다.
엉겅퀴는 채소가 먹어야할 양분을 먹어 버립니다. 이것이 첫 번째 나쁜 이유입니다. 생명은 존재하기 위해 영양분이 필요합니다. 존재는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희생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엉겅퀴입니다.
b. 채소를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참으로 이상하게 채소보다 약한 엉겅퀴를 거의 없습니다. 봄에 밭에 고추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 밭에 가보니 고추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풀만 무성했습니다. 심지도 않은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고추가 자라지 못하도록 막아 버렸습니다. 햇빛을 보지 못한 고추는 죽지는 않았지만 때가 되어도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풀숲을 헤치고 들어가니 고추가 몇 개 열리기는 했지만 작고 볼품이 없습니다. 부지런한 농부는 잡초나 엉겅퀴가 채소보다 빨리 자라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김매기를 해야 합니다.
c. 밭을 망가뜨립니다.
밭을 경작하지 않고 일 년을 그대로 두면 풀이 무성하게 자립니다. 삼년 정도가 되면 어디서 왔는지 모를 수많은 잡초들이 밭에 깊이 뿌리를 내려 더 이상 경작할 수 없게 만듭니다. 정말 무서운 심판은 징계가 아니라 ‘유기’ 즉 버려둠입니다. 사람들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고 탐욕을 따라 살면 결국에 완전히 망가져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엉겅퀴가 자라면 해년마다 미루지 말고 모두 뽑아 불에 태워 버려야 밭이 망가지지 않습니다.
3) 부지런함을 나타내라
9절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좌절될 수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되면 선택과 유기에 대한 문제를 상세히 다루도록하겠습니다. 여기서는 결론만 간략하게 다루겠습니다. 4-8절까지 버림 받은 이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히브리서를 읽고 있는 독자들일까요? 우리는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9절을 문자적으로 직역한다면 버림받은 이들은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또는 ‘너희’(9절)라는 호칭 속에는 ‘구원에 속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진정 성령에 참여하고도 하나님을 버렸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히브리서 독자들이 그러한 유혹 가운데 있으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실패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은 좌절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을 향하여 ‘너희에게는 구원에 속한 것’ 즉 증표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 받은 증거가 그들의 삶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무엇입니까?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10절)입니다. 이것은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린 은혜의 비를 사랑의 섬김이란 열매로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열매를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거짓 열매로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행함을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동일한 열심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마침내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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