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8-10 강해, 만삭되지 못한 자에게도 임한 은혜의 부활
만삭되지 못한 자에게도 임한 은혜의 부활
고린도전서 15장 8절부터 10절까지는 바울이 자신을 향해 가장 낮은 위치에서 드리는 고백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의 마지막에 자신이 포함되었음을 밝히며,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는 강렬한 표현을 사용해 자신이 받은 부활의 은혜와 그 절대적인 주권성에 대해 증언합니다. 이 표현은 단지 시간상의 늦음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무자격함과 영적 결핍,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름 받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드러내는 고백입니다. 헬라철학의 자아 확장 중심의 사유 속에서 흔들리고 있던 고린도 교회에, 바울은 참된 복음이 자격이 아닌 은혜 위에 세워졌음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이 짧은 고백 안에는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은혜가 어떤 방식으로 역사하는지,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보여주는 깊은 신학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15: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15:8). 바울은 여기서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ἔκτρωμα)로 표현합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유산된 아이', 혹은 '기형아'를 가리키는 단어로, 자의적 생명이 아닌 비정상적 상태로 존재하게 된 생명에 대한 표현입니다. 당시 문화에서 이는 극단적인 무가치함을 상징하는 언어였으며, 바울은 의도적으로 이 강렬한 표현을 통해 자신의 상태를 묘사합니다.
그는 단지 사도들 중 마지막에 부름을 받은 시간상의 늦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전혀 준비되지 않은 자였고, 하나님의 사역에 완전히 무관하고 오히려 반대편에 서 있던 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신을 묘사하는 이유는 단순한 겸손이나 수사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격 없는 자에게 주어졌는지를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당시 세속적 가치와 철학적 엘리트주의, 자격 중심의 사유에 익숙했습니다. 바울의 이 표현은 그런 사상에 철저히 반하는 복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자격 있는 자에게 주어진 상급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진 무상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했던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며, 그럼에도 자신에게 보이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정통 유대교의 열심 있는 자였으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잡아들이던 사람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예수께서 그에게 친히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 '보이셨다'(ὤφθη)는 표현은 앞선 구절들에서 반복된 동사로, 부활하신 주님의 주권적 자기 계시를 나타냅니다. 주님은 바울이 준비되었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분의 때에, 그분의 뜻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이는 구원의 주체가 철저히 하나님이심을 증언하는 선언이며, 구속사적 흐름 안에서 바울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안에서 설정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하나의 표현 속에는 은혜의 비밀이 담겨 있으며, 우리는 이 표현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를 부르시든, 어떻게 부르시든 전적으로 그분의 뜻과 주권 아래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가장 작은 자, 사도라 칭함 받지 못할 자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15:9). 바울은 이어서 자신의 과거를 구체적으로 고백합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을 작다고 표현하지 않고, '가장 작은 자'(ἐλάχιστος)를 사용해 철저한 비천함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작다'는 단어는 단지 순서나 비교의 개념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를 자처하는 태도를 내포합니다. 그는 수많은 사도들 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미약한 존재라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과거 행위와 비교해 볼 때 결코 사도의 자격이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 이유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음"을 언급합니다. 그는 단순한 불신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조직적으로, 의도적으로 해하려 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한때 얼마나 열심히 성도들을 체포하고 스데반의 죽음을 정당화했던 자였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회한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의 진정한 자기 인식입니다. 자신의 불의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비교할 때, 자신은 결코 사도라 불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복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도 깊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신앙의 연륜, 섬김의 경험, 직분의 높낮이로 은혜를 말하지만,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과거를 깊이 인식함으로써 은혜의 무게와 깊이를 더 분명하게 이해합니다. 그는 누구보다 많이 수고했지만, 결코 자기의 공로로 그 사역을 해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철저히 은혜 위에 서 있으며, 자신의 모든 열심과 헌신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던 것임을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15:10). 이 절은 바울의 신앙과 정체성, 사역과 열정의 근거를 가장 분명히 표현한 말씀입니다. '나의 나 됨'(χάριτι δὲ θεοῦ εἰμι ὅ εἰμι)은 단지 어떤 역할이나 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은혜의 결과라는 고백입니다. 이 문장은 바울 신학의 핵심이기도 하며, 구속사적 시각에서 구원의 본질을 가장 압축적으로 담아낸 선언입니다.
이 고백은 인간의 자격과 조건, 노력과 이력으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역사에 대한 찬양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말하지만, 곧바로 그것이 자기로부터 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는 사역의 열매도, 변화의 원동력도, 정체성의 기초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해 있음을 선포하는 복음의 중심 진리입니다.
이 말씀은 헬라철학적 자기 계발, 자기 확장의 관점과 완전히 대조됩니다. 헬라적 사고는 인간의 가능성과 자기 완성을 추구하는 반면, 바울은 철저히 은혜에 의해 시작되고, 은혜로 이어지고, 은혜로 완성되는 존재임을 고백합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 고백은 창세기 3장에서 타락한 인간이 자기 힘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과 방식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신 구원의 은혜로만 회복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고백은 단지 개인적인 신앙 고백을 넘어, 구속사의 흐름 전체에 대한 신학적 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
고린도전서 15장 8-10절은 바울의 존재론적 고백이자, 은혜의 깊이를 드러내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만삭되지 못한 자'라는 표현은 그의 부끄러운 과거와 무자격함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런 자에게도 '보이신' 주님의 은혜는 구속사의 절정에서 누구에게든 임할 수 있는 보편성과 절대성을 증언합니다. 복음은 자격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은혜로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이 은혜를 붙드는 자가 사도처럼 쓰임받게 됩니다. 이 진리는 시대를 넘어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도 날마다 이 고백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 사역의 이유, 그리고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해 주는, 참된 복음의 언어입니다.
고전 15장 구조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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