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읽기] 마르틴 루터의 생애(Ⅱ)
[기독교 고전읽기] 마르틴 루터의 생애(Ⅱ)
제2기 : 종교개혁 시작과 발전(1517-1525)
1512년 루터 나의 28에 박사학위를 취득합니다. 루터의 박사학위는 단순한 명예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식적인 성경 강해자요 권위 있는 성경 해석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루터는 교수의 다양한 사역 중에서 성경을 주해하는 일에 집중하게 됩니다. 1513년부터 2년 동안 시편을 강해했고, 1515년부터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강해하기에 이릅니다. 1517년부터는 1518년까지 히브리서를 주해합니다. 시편과 로마서, 그리고 갈라디아서를 주해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 점점 명확한 이해를 갖게 됩니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는 그의 신학 중에서 핵심 중의 하나인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을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중세시대의 학문은 메마르고 지루해 사람들은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적 신학은 실천적 경견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루터는 대학교 수도원의 학습법을 적절히 활용하여 학생들의 흥미를 이끌어냈고, 수많은 학생들이 루터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루터가 가르쳤던 1515년부터 1520년 사이 비텐베르크 대학의 학생 수는 두 배가 늘어납니다.
1516년 새로운 변혁을 주도한 한 권의 책이 인쇄됩니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전혀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느슨하고 허술하기는 했지만 에라스무스에 의해 헬라어 성경이 번역되어 유럽에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이 나오기 전에 권위 있는 사본들을 참조하여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히메네스(Francisco Ximenes de Cisneros, 1437-1517) 대조 성경도 1522년에 출판하게 됩니다. 에라스무스는 히메네스 대조성경을 참조하여 완성도 높은 4판 헬라어-라틴어 성경을 완성하기에 이릅니다. 비텐베르크에 교수로 있는 동안 후에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한 중요한 두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한 명은 루터의 친구이자 루터의 부족한 신학을 채워줄 멜랑히톤이며, 다른 한 명은 1521년 학장이 된 아우로갈루스였는데 그는 저명한 히브리어 학자였습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에게 성경해석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바르게 가르쳤습니다.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는 성경을 비평한적 관점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저자는 누구이며, 어떤 목적으로 썼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충고합니다. 루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성경의 바른 주해가 무엇인지 하나씩 배워가고 있었습니다. 묵상을 모호한 것이나 본문을 자신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가진 단어의 뜻과 문맥 등을 통해 이해하고, 하나님의 의도와 말씀하신 목적들을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묵상법을 통해 성경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의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확신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이란 죄를 지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저 죄인으로 서 있을 뿐이며, 내가 그것을 부정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루터는 기존의 성경해석이 성경이 원래 말하던 의미도 아니었으며,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한 것들도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밖에 설수 없다면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죄인들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죄 값을 치르고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을 믿는 것뿐이었습니다. 믿음조차도 사람이 힘이 아닌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함으로 온전한 ‘의(義)’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 의(義)는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심을 통해 얻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러한 깨달음에 도달하면서 자신의 모든 신학 중심에 ‘이신칭의’를 두게 됩니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의 핵심인 십자가 신학도 이신칭의에 의한 것이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이제 루터도 모든 면에서 종교개혁을 위해 준비되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아직 종교개혁을 해야 할 이유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다만 일그러진 교리를 바로잡고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순진한 믿음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의도치 않는 작은 한 사건으로 인해 종교개혁의 불씨가 발화되었습니다.
면죄부가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교황과 사제들은 면죄부를 살 경우 연옥에 있던 가족들이 사함을 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면죄부는 단순한 면죄부 판매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중세 교회의 오류 중의 하나님 ‘연옥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연옥은 죽어 천국과 지옥으로 가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온전한 의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연옥에서 고통을 받으며 죄를 사함 받게 됩니다. 연옥은 형벌과 정화의 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면죄부는 신자들 속에 숨겨진 두려움을 무기로 돈을 주고 면죄부를 팔아 연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고 믿게 했습니다. 돈을 주고 면죄부를 구입함으로 영원한 천국을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매혹적인 유혹이었습니다. 면죄부는 연옥뿐 아니라 과거의 죄,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을 수 있는 증표였습니다. 자신의 죄뿐 아니라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의 죄까지도 용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자 엄청난 수익산업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되고, 결국 그것을 교황에 의해 공포하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살수 있다는 기발한 발상은 교회로 하여금 결코 이 사업에서 돈을 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면죄부 판매에 앞장선 사람은 테첼(1460-1545)이었습니다. 그는 도미니크 수도회 수도사였으며, 면죄부 설교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성베드로 성당의 건축 재정이 절실했던 교황에게 면죄부 사업은 그야말로 황금어장과 같았습니다.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인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1490-1545)는 테첼로 하여금 면죄부 판매를 위해 설교자로 부르고 그것을 시행하도록 했습니다. 1517년 봄이 되자 테첼은 순회설교를 통해 면죄부 판매를 독려하기 시작합니다. 테첼이 설교를 할 때면 큰 나무 상자를 들고 다녔고, 은행 직원들이 따라 붙었습니다. 테첼은 면죄부를 사기 위해 동전을 나무상자에 넣으면 ‘주화가 돈궤에 쩔렁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튀어 오릅니다’라고 설교했습니다. 테첼의 설교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자,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과 여러분의 곁을 떠난 사랑하는 이들의 구원을 생각해보십시오. 뇌우치고 고해 받으며 속죄하는 사람은 모두 자기들의 죄를 말끔히 용서받습니다. 여러분의 가족과 친구들이 저 연옥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우리 좀 살려줘. 제발 부탁이야. 여긴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롭구나. 너희들 돈 몇 푼이면 나를 거뜬히 구할 수 있어.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의 죽은 아버지, 어머니가 고통스러워하는 목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널 길러 유산까지 물려주었는데 넌 물려준 유산의 일부도 쓰기 싫어하는 거냐. 여러분은 구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동전이 궤짝에 짤랑하고 떨어지는 순간 그들의 영혼은 연옥에서 튀어 오르기 때문입니다. 이 면죄증을 받으십시오. 신령하고 불멸하는 한 사람의 영혼을 고향 낙원으로 보내는 데 단돈 금화 1/4입니다.”
미신에 절어있던 중세인들에게 테첼의 설교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돈을 들여 자신들과 사랑하는 이들의 영혼을 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이토록 면죄부 판매에 열을 올린 이유는 성베드로 성당 건축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푸거라는 상인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푸거의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죄를 용서받고 그들의 영혼이 구원 받음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면죄부를 사는 이들은 더 이상 회개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테첼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루터에게 찾아와 그들이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일이었습니다. 루터는 엉터리 교리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교회를 사랑하고, 자신이 깨달았던 진리를 함께 나누고 싶어 95개조를 발표하게 됩니다. 루터가 그날로 정한 이유는 그 다음 날이 모든 성인의 날인 만성절이기 때문입니다. 만성절은 중세교회가 축일로 지정되지 않은 성인들을 기념해 공휴일로 지정했던 것입니다. 루터는 휴일에 함께 모여 교회의 문제들을 함께 토론하고 고민해 볼 생각이었습니다.
나중에 다루겠지만 95개조의 핵심은 그릇된 교회 관습과 성경 해석이 오류, 특히 교황은 죄를 사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면죄부 판매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는 점도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면죄부가 갖는 위험성을 루터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만약 면죄부를 사게 된다면 잘못된 안도감을 주어 구원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로인해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95개조를 위한 논쟁은 라틴어로 할뿐 아니라 문서도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을 염두에 둔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루터의 95개조는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 곳곳에 뿌려지기 시작합니다. 루터가 의도하지도,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갑자기 일어난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루터로 하여금 95개조를 발표하게 된 것으로 봄이 맞습니다. 루터도 심지어 교황도 이 사건을 크게 보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루터의 소문을 들었지만 즉각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1년이 넘도록 처리를 미루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글을 읽는 독일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95개조를 발표한 후 약 7개월 정도가 흐른 뒤 하이델베르크에서 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이것은 3년마다 열리는 회의로 루터는 이곳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에 대한 인간 타락을 변호하는 일을 맡게 됩니다. 교황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총회장을 새로 임명하여 루터의 불장난을 멈추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하이델베르크행을 만류했습니다. 가서 후스처럼 화형당할 수도 있으며, 가는 길에 암살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터벅터벅 나흘 길을 걸어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합니다. 1518년 4월, 루터는 이곳에서 그가 그동안 깨닫고 확신했던 ‘십자가 신학’을 전개하며 40개 논제를 설명합니다. ‘참된 신학과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된다’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은 ‘갈 때는 걸어갔지만 올 때는 마차를 타고 왔다’는 루터 자신의 말로 정의할만한 사건이었습니다. 루터는 이 시간으로 자신의 일이 대충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확대되고 있었습니다.
심각하게 여긴 교황은 드디어 행동을 개시합니다. 루터에 대해 좀더 신학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도미니코 수도사를 보내 루터의 설교들을 듣고 보고하게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8월 7일 로마로 출두해서 이단과 명령 불복종 혐의에 답변하라는 소환장을 받게 됩니다. 60일 동안 변론하지 않을 경우 파문하겠다고 경고합니다. 선제후는 몇 가지 이유를 통해 루터는 로마가 아닌 독일에서 먼저 심문하도록 합니다. 9월 말, 루터는 걸어서 아우크스부르크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3일에 걸쳐 토론하게 됩니다. 추기경은 루터와 논쟁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루터에게 자신의 요구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용서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에게 응하지 않았고, 10월 20일 밤 아우크스부르크를 떠납니다. 루터가 돌아오자 선제후는 루터에게 그들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자신의 소견을 밝히도록 합니다. 루터의 편지를 받은 선제후는 살아남을 수 없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고, 루터 역시 자신으로 인해 선제후가 어렵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유배도 당하겠다고 선언합니다.
1519년 유럽에 중대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종교개혁의 정점에 위치한 칼 5세가 조무 막시밀리안 1세를 계승하여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합니다. 그의 나이 겨우 19세였습니다. 칼 5세는 교황과 친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약간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된 그는 제국의 평화를 위해 루터의 행동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제지하지도 않았습니다. 루터가 점점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멜랑히톤을 비롯하여 후에 적대적 관계가 되지만 에라스무스도 루터를 지지하기 시작합니다. 루터의 그들이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출판업자 요한 프로벤도 루터를 가까이하기 시작합니다. 덕분에 루터의 글들은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에 급속도록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해 침묵을 지키던 잉골슈타트 요한 에크(1486-1543)가 루터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루터는 에크가 자신을 ‘이단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즉각 반응하여 그의 논쟁에 동의하고 라이프치히로 가서 그와 십일 동안 논쟁을 하게 됩니다. 에크는 결코 가벼운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교회 전통과 법에 뛰어날 분 아니라 언변 능력도 탁월했습니다. 논쟁이 깊어질수록 주제는 교황의 수위권으로 넘어갔고, 에크는 면죄부 판매를 허용하고 조장한 교황을 옹호합니다. 루터는 성경을 기반으로 교황이 교회의 수장으로 부름 받은 적이 없다면 반박합니다. 에크는 결국 루터를 후스파로 규정하고 그에게 이단과 폭도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논쟁은 아무 결론을 얻지 못하고 끝이 났지만 에크와 루터의 논쟁은 그곳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유럽으로 계속하여 번져나갔습니다. 논쟁이 끝나고 얼마가지 않아 라이프치히의 프란체스코 수도사였던 아우구스티누스 알펜트는 루터를 반대하여 교황의 수위권이 전적으로 성경적이라고 주장합니다. 루터는 조잡한 그의 이론에 대꾸하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하여 공격해오자 그해 6월 <로마 교회의 교황권에 관하여>라는 책자를 출판합니다. 그곳에서 루터는 교황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서술했고, 강하고 거칠게 서술해 나갑니다. 루터는 많은 사람들이 점점 자신을 공격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1520년은 루터에게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아직 파문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종교개혁이 기틀을 잡을 수 있도록 중요한 문서들을 작성하고 발표합니다. 5월에 <선행에 관한 설교>, 6월에는 <로마의 교황제도>, 8월에는 <독일 귀족에게 고함>, 9월에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 11월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발간합니다. 이 문서를 후에 따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후반부 세 문서는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으로 불릴 만큼 중요하고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6월 15일 ‘일어나소서, 오 주여!’(엑수르게 도미네)로 시작하는 교서가 로마에서 루터에게 전달되기 시작합니다. 루터에게 전해지기까지 석 달이란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루터는 교서를 받게 됩니다. 루터는 에크에 의해 교서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눈치 채고 즉각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나를 반박하는 교서가 온 땅을 한 바퀴 돈 다음에야 내 앞에 나타났는데 그것은 그 교서가 어둠의 딸이어서 내 얼굴의 빛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리고 또한 여기에는 명백히 기독교적인 조항들이 정죄되고 있는 만큼 나는 그것이 정말 로마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저 거짓말과 시치미와 오류투성이 이단, 곧 저 괴물 요한 에크의 조작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바벨론 포로>에서는 가톨릭 성례를 비판하며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의 사제로서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선언하기에 이릅니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모토 중의 하나님 ‘만인 제사장설’이 공식 문서로 처음으로 제기됩니다. 루터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한 교서가 루터에 손에 들려졌지만 루터는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는 대신 교서를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버립니다. 1520년 12월 10일 멜랑히톤이 홀리 크로스 예배당 앞에서 교회 법전들을 사람 앞에서 불태울 때 루터도 교화의 칙서를 그 불 속에 던져버립니다. 그로 인해 루터는 로마 교황청과 합의할 수 없는 루비콘 강을 건넜고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1521년 1월 3일 교황은 루터를 파문합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3월 29일 보름스 제국회의에 출두하여 그의 입장을 설명하라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교황은 이미 그를 파문했기 때문에 굳이 청문할 이유가 없었지만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교묘히 황제를 설득했고, 결국 안건에 들지 않았던 루터의 청문을 넣게 되었습니다. 4월 21일 루터는 보름즈를 향해 집을 나섭니다. 혼자 여행할 수 없는 수도회 원칙에 따라 요하네스 페젠슈타인과과 더불어 몇 명의 학생들도 루터와 동행하게 됩니다.
황제는 루터를 불러 정말 루터가 지은 책이며, 그 내용은 어떤 것인지를 확인했다. 황제는 루터에게 곧바로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고 다시 원래의 가톨릭 사제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입장을 표명합니다. 스페인어만 사용하는 황제와 라틴어와 독일어를 사용하는 루터 사이에 긴 대화는 불가능했습니다. 루터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고, 다음 날 정오까지 허락해 주었습니다. 다음 날 루터는 다시 황제에게 나아갔고, 자신의 행동과 저작물에 대해 변호합니다. 루터는 많은 사람들 앞에 지금까지의 주장을 철회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성경의 증거나 또는 명백한 이성적 논증에 근거하여 설득력 있게 분명히 반박하지 않는 한 나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교황이나 공의회 자체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은 오류를 범해 왔으며, 때로는 서로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곤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직 내가 인용한 성경 구절에 묶여 있습니다. 나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나는 상황이 확정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양심에 어긋나게 행동한다면 구원이 위협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루터는 심문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달려갈 길을 마쳤도다!’라고 외칩니다. 몇 몇의 공작들이 루터를 찾아와 감사했지만 그날 도시는 대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황제를 옹호하는 스페인 병사들이 루터를 불에 던져야 한다고 외쳤지만 백성들은 맹렬히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짐작하지 못했지만 곧 교회는 하나(가톨릭)가 아니라 두 개가 될 것이며, 제국은 여러 나라로 분리될 것입니다. 루터의 공개적인 선언 이후 수많은 영주들이 루터를 지지했고, 기사들과 군주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긴장감이 돌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그들의 물리적 힘을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오직 말씀으로만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루터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황제는 자신이 즉각적으로 루터를 처단하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세상은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이건 교황의 게으름이나 황제의 실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루터는 그들 앞에서 복음을 증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521년 5월 25일, 루터가 고향으로 돌아간 후 황제와 몇 몇의 영주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하며 논의를 계속했습니다. 결국 5월 25일 보름스 칙령을 통해 루터를 정죄하고 이단자로 선언합니다. 이제 루터는 ‘강퍅한 분리주지자요 사악한 이단’이 되었습니다. 루터의 글은 읽지도 사지도 판대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와 몇 몇의 선제후들은 황제의 칙서를 거부했고 루터를 납치해 자신의 성 안에 숨겨둡니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트 성에서 융커 외르크라는 기사로 변장하여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유럽은 종교개혁의 급물살에 휩싸이고 있었습니다. 루터와 다르게 스위스에서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멜랑히톤도 자신의 학생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개혁적인 성찬을 진행했습니다. 동료 수도사인 가브리엘 츠빌링은 미사를 폐지되어야 하고 주의 만찬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츠빌링의 설교 후 13명의 수도사들이 수도원을 떠나게 됩니다. 루터가 보기에 그러한 일들은 너무나 성급하고 위험해 보였습니다. 12월 4일부터 9일까지 비텐베르크 여인숙에 머물며 멜랑히톤의 사람들과 더불어 독일어 성경을 어떻게 번역할지를 의논합니다. 그곳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들은 결코 좋지 않았습니다.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들도 두 갈래가 되었고, 과격한 학생들은 가톨릭 미사 때에 단도를 가지고 공격하며 집례를 방해하는 일도 일어난 것입니다. 루터는 갱신과 개혁이 필요하지만 약한 자들을 생각하라고 호소합니다. 개혁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루터의 생각이었습니다.
루터가 숨어 성경을 번역하는 동안 비텐베르크는 무법천지가 되어갔습니다. 츠비카에서 온 두 사람이 교회의 모든 조직과 질서는 철폐하고 성령의 지시를 받아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츠비카우 선지자들’로 불린 이들은 성상까지 예배의 방해물이라고 판단하고 제거하는 운동을 벌입니다. 루터는 이들을 성상파괴자들로 부르고 우려를 표명합니다. 이들은 한 때 사제였지만 급진주의자가 된 토마스 뮌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후에 재침례파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기록된 성경보다는 마음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음성에 더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들은 초기에 기존의 종교개혁자들과 많은 부분을 공유했기 때문에 서로 적대적이지도 않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서로 합의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루터는 비텐베르크 상황을 그대로 둘 수 없어 돌아가기로 계획합니다. 선제후는 루터의 안위를 걱정했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을 믿는다는 고백을 듣고 보냅니다. 결국 1522년 2월 중순 루터는 다시 비텐베르크로 떠나 3월 1일 도착합니다.
그해 9월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신약성경이 출판됩니다. 12년이 지난 1534년이 되어서야 구약까지 완전하게 번역된 성경전서가 출판됩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1522년과 1523년에는 기사들이 반란이 일어났고, 1524년에는 재침례파와 연계된 농민반란이 일어나 폭력이 창권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농민 반란은 몇 번에 걸쳐 일어났지만 1524-5년에 일어난 반란은 이전 반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격렬했습니다. 그들이 종교개혁가들이 자신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믿었고, 극단적 종말론에 빠져 폭력으로 세상을 바꾸려했습니다. 루터는 농민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는 것은 맞지만 폭력을 써서는 안 된다고 조언합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듣지 않았고 결국 루터는 농민들을 진압하도록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을 빌미로 가톨릭교회는 반란의 이유를 루터에게 돌렸고, 농민들도 배신당했다고 느끼며 가톨릭으로 돌아가든지 재침례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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