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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벤투라의 간략한 생애와 신학

샤마임 2019.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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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벤투라의 간략한 생애와 신학


보나벤투라의 생애와 사역

보나벤투라(Sanctus Bonaventura)는 중세의 가장 탁월한 신학자이자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동시대인이며, 신학뿐 아니라 신비주의 학자로서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경건하고 사랑이 많은 성품은 그로 하여금 ' ‘세라핌적 박사’(The Seraphic Doctor)라는 호칭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비롯하여 수많은 저작을 남겼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중세의 전설적인 인물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사망하기 7년 전에 1217년에 태어납니다. 1221년에 태어나났다는 역사가들도 있지만 정확한 연대를 알아내기는 어렵습니다. 1217년이 아니면 1221년에 보나벤투라는 이탈리아 중부 바뇨레지오(Bagnoregio)에서 아버지 조반니 디 피단자(Giovanni di Fidanza)와 어머니 마리아 디 리텔로(Maria de Ritello)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보나벤투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본명은 조반니 디 피단자(Giovanni di Fidanza)입니다. 영어권에서는 요한 피단자(Ioannes Fidanza)로 부릅니다. 보나벤투라의 어린 시절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가 직접 편찬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에 의하면 보나벤투라는 태어난 지 1년이 되지 않아 중병을 앓습니다. 믿음이 좋았던 그의 어머니 마리아(Maria de Ritello)는 프란치스코에 아이를 바치겠노라고 서원한다. 프란치스코가 그것을 허락하자 보나벤투라의 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정확한 것은 아니나 그의 이름에 관한 전설은 이렇습니다. 아마도 그가 어릴 때 앓았던 병 때문에 프란치스코를 찾아갔을 때 일어난 일인 것 같습니다.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수도원을 찾아갑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프란치스코는 오 복된 자여(O, Buona Ventura!)’라고 외치게 됩니다. 보나벤투라라는 이름을 통해 프란치스코와의 친밀함을 드러내려는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1234-5년경에 보나벤투라는 파리로 유학을 떠납니다. 파리에서 보나벤투라는 신학자인 헤일즈의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를 만나게 됩니다. 후에 이곳을 마치고 어머니의 서원 대로 프란치스코회에 가입합니다. 1250년부터 보나벤투라는 교수직 승인을 위해 롬바르두스 명제집을 주석하기 시작합니다. 사 년 후인 1254년에 완성하고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강의할 자격을 취득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 재속 신학자들과 수도회 신학자들 간의 싸움에 휘말리면서 교수로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생따무르의 기욤(Guillaume de St. Amour)은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회를 신랄하게 공격합니다. 이로 인해 두 집단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게 되면서 3년 가까이 지속됩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염려하던 루이 9세는 파리대학에 문제를 해결하라고 개입하기에 이릅니다. 이때 보나벤투라는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는 도미니코회의 토마스 아퀴나스가 논설을 발표합니다. 뒤 이어 프란치스코의 '요크의 토마스'가 발표하고, 마지막 보나 벤투라는 프란치스코의 입장이 아닌 탁발 수도회의 청빈과 생활 방식을 발표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난에 관하여>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훌륭하게 변증했다. 결국 1256년 알렉산데르 4세 교황은 기욤을 단죄하기에 이릅니다.

이 일로 인해 보나벤투라는 적지 않은 영향력을 얻게 되고 아퀴나스와 함께 파리대학교수로 취임합니다. 중세 신학을 대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와 보나벤투라는 우정이 깊었을 것으로 전해지지만 확증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교수로 오래 머물고 싶던 보나벤투라의 소원과 다르게 그는 얼마 가지 않아 교수직을 사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총장으로서 직임을 시작하자 난해한 일들이 산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의 총장직은 요아킴 주의 혐의를 받은 파르마의 요한이 자진하여 물러난 것이었습니다. 시대에 뒤처진 수도원 규칙을 수정하기 위해 나르보나 회원을 만듭니다. 보나벤투라는 각 수도원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36개의 분파로 나뉘어 심각한 분열의 조짐은 보나벤투라의 관용적 열정을 통해 상당히 완화되었다.

그 외는 보나벤투라가 총장으로 지내면서 수많은 저작들을 출간합니다. 직접 저술한 <프란치스코의 대전기>는 기념비적으로 남을 저작입니다. 이 책은 1986년 분도출판사에서 번역되었지만 절판되었습니다. 1991년 꼰벤뚜알 성 프란치스꼬 수도회 한국 관구에서 편역하여 <보나벤뚜라에 의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대전기>란 이름으로 분도출판사에서 재출간되어 있습니다. 정식 명칭은 <레겐다 마요르(Legenda Maior)>이며,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통해 수도원의 기강과 규율에 대한 논쟁을 잠재우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개혁의 기치를 더욱 높이기 위해 자신이 편찬한 프란치스코 대전기 이전에 출간된 모든 프란치스코 전기들을 폐기하도록 합니다.

다음에 살피게 될 보나벤투라의 주요 저서인 <하느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Itinerarium Mentis in Deum)는 그가 묵상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상흔을 받으면서 적어나간 것입니다. 후에 보나벤투라가 세라핌 박사라는 칭호를 받은 것은 이 책과 깊은 관련을 맺습니다. 구약에서 세라핌은 스랍으로 번역되었고, '불타는 자'라는 뜻을 가집니다. 모두 36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보나벤투라의 상흔은 세라핌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여정을 세라핌의 여섯 날개처럼 여섯 개로 나누어 소개합니다. 다음번에 <하느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을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265년 교황 클레멘스 4세는 보나벤투라는 영국 요크 대주교로 그를 임명합니다. 그러나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이 아니라며 그 자리를 거절합니다. 이후에 교황 그레고리 10세는 보나벤투라를 알바노의 추기경으로 임명합니다. 이번도 거절하고 싶었지만 이것까지 거절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로마로 올라가게 됩니다. 로마로의 여행 중, 작은 수도원에서 하룻밤을 묵게 됩니다. 식사를 마치고 부엌에서 설거지를 친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황 사절이 도착해 보나벤투라에게 추기경 임명 칙서를 가지고 도착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설거지를 다 마칠 때 가지 추기경의 모자를 나무에 걸어두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설화들은 보나벤투라의 겸손을 보여주는 것들로, 성직에 대한 욕망의 거의 없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교황 그레고리 10세는 교회 개혁과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었습니다. 교황의 또 다른 소원의 중의 하나는 동방정교회와의 재통합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교황은 127457, 2차 리용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교황은 보나벤투라를 신임하여 공의회 한 해 전인 1273년 추기경으로 임명합니다. 공의회에서도 보나벤투라가 공을 세워줄 것을 기대하여 파송합니다. 그런데 공의회 참석을 하고 있던 715일 새벽, 병환으로 죽게 됩니다. 그의 유해는 리용에 있는 프란치스코 성당에 안치됩니다. 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군중들에 의해 그곳에 안치된 수많은 뼈들을 광장에서 불태워지게 됩니다. 1588314일 교황 식스토 5세는 그를 시성하면서 '세라핌적 박사라는 호칭을 수여합니다.

보나벤투라의 신학

보나벤투라의 신학은 스콜라 철학자답게 이성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스콜라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연구가 부흥하던 때였고, 새로운 신학의 기조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철저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대 새로운 신학을 전개한 반면, 보나벤투라는 보수적 관점에서 신학을 전개합니다. 그는 세상의 창조는 인간들의 이성의 빛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는 '인식론적 추상설'을 주장합니다. 그는 인간의 지혜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허락하시는 신비적 조명과 견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나벤투라는 비록 이성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이기는 하지만, 이성만으로 진리에 이를 수 없으며, 신의 조명(照明)이 필요하고 말합니다.

보나벤투라는 신학의 정신을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며 신학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상징 신학'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게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유 신학'으로 인간의 영혼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가장 높은 단계로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여 신을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보나벤투라는 창조 신학을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온전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의 사상 속에는 롬바르도의 논리적 신학과 가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실천하려 했던 프란치스코의 사상을 강력하게 받았음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가장 높은 단계를 개인의 신비적 체험으로 돌림으로 신비주의 사상을 최고의 신앙으로 칭송합니다.

나가면서

우리는 보나벤투라의 생애와 신학을 살피면서 이성과 신비가 어우러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성을 통해 혁명적으로 하나님의 증명하려 했던 토마스 아퀴나스와 다르게 신비적 체험을 가장 높은 신앙이 단계로 설정합니다. 이러한 이성과 신비의 조화는 안셀무스의 신학을 따르면서, 신비적 체험을 통해 신앙의 도약을 이루려 했던 부흥론자들의 주장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홍경은은 그의 논문 <보나벤투라의 영적 상승론 연구>에서 보나벤투라의 신앙관을 '삼위일체적인 영적 상승론'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신앙관은 철저히 성경에 천하면서도 상징적(알레고리) 해석을 통해 이성적인 믿음에서 체험적 신앙으로 도약해야 할 것을 알려 줍니다.

보나벤투라는 개신교적 관점에 비판만으로 매도하기에는 적지 않은 교훈을 가져다 둡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중세의 신비주의와 스콜라 신학자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감당하고 있습니다. 보나벤투라가 죽기 9년 전에 태어난 단테 알리기에리는 그의 저서 <신곡> 지옥편 제12곡에서 보나벤투라는 등장시켜 영혼을 찬양하게 합니다. 보나벤투라의 사상은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선별해야 할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찾으려는 신앙의 열정을 배우고 싶은 이들에게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나벤투라의 저서들

현재 보나벤투라가 직접 서술한 책은 <보나벤뚜라에 의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대전기><하느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1982년 대한기독교서회에서 <하나님과 하나되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적도 있습니다. 나머지는 번역된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순례기>(Itinerarium Mentis in Deum)

<베드로 롬바르드의 명제집 주해>(Commentarius in secundum librum sententiarum Petri Lombardi)

<신학 요강>(Breviloquium)

<그리스도의 인식>(De Scientia Christi)

<삼위일체의 신비>(De Mysterio Trinitatis)

<복음적 완덕>(De Perfectione Evangelica)

<학문들의 신학적 환원>(De Reductione Artium ad Theologiam)

이 외에도 다수의 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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