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고전읽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
Bernardus Claraevallensis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
1. 들어가면서
오늘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클레르보의 다양한 책들이 있지만 아가서 설교는 베르나르를 대표하면서 중세의 신비주의 성경 해석을 따르는 좋은 모범입니다. 아가서는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성경 중의 하나이며 현재도 대부분이 알레고리적 해석법을 차용하고 있습니다.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는 신비주의와 알레고리 해석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 해석법은 성경 본문이 말하려는 문장과 문맥의 의미보다는 단어와 단어 너머에 있는 상징과 의미를 애써 찾으려 합니다. 아가서는 관능적 표현과 성적인 농밀함이 적지 않아 교회 안에서는 거의 설교되지 않은 성경입니다. 그러나 남녀 간의 친밀함과 성적인 관계가 하나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좋은 모델이기 때문에 반드시 설교되어야 할 성경이기도 합니다. 제가 직접 베르나르의 아가서에 나타난 상징과 의미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세인트 메리 대학교의 에메로 스티그만이 쓴 서론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베르나르의 설교는 3권에 일부를 요약하면서 어떻게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 책의 구조와 요약
[서론(에메로 스티그만)]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에 대한 행동과 관상
사람들은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를 관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행위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적합하다. 베르나르는 관상과 삶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으며 함께 영위할 대상으로 보았다. 이 설교들은 수도사들에게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에게 곧바로 적용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수도적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적당하다.
관상과 인간의 삶이 완벽하게 결합하기는 힘들다. 관상은 정적인 것이며, 세속적인 것에서 멀어져야 한다. 이러한 ‘정적인 자비’는 이웃의 필요에 주의하는 ‘행동적인 자비’를 소외시킨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고 관상과 이웃 사랑은 하나이라고 이렇게 말한다.
“참 자비는 여기에 있으니, 그것은 더 궁핍한 사람이 먼저 도움을 받는 것이다.”
관상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인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웃을 사랑함을 통해 증명된다. 그러므로 관상은 이웃 사랑을 자신의 삶에서 격리시킬 수 없다. 즉 관상과 행동은 반드시 연결되어야 한다. 시토 수도회의 격언인 ‘사랑 자체가 지적 능력이다.’와 맥을 같이 한다. 이웃 사랑이 비록 ‘상상을 방해하고 관상하는 사람의 힘을 고갈시킬지라도 행동적인 사랑은 참된 기도의 행위, 하나님의 역사이다.’
관상과 금욕의 관계도 생각해보자. 행동적 삶은 덕을 쌓는 행위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 없는 자연인은 하나님을 인지하지 못한다. 성령은 하나님을 갈망하게 한다. 베르나르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 즉 소원을 가진 자들을 신앙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사람은 ‘소원의 사람’이다. 악을 억누르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 거룩이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 금욕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임을 확인한다. 사랑은 불이고 열정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얼굴의 빛을 갈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기 원하고, 닮기 원하고, 순응하길 원한다. ‘결혼이 포옹이 관상’이고, ‘의지의 순응은 금욕’이다.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결합되어 있다. 모순적으로 보이고, 공평해 보이지 않으나 참된 관상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설교 요약]
스티그마는 서론에서 베르나르의 설교 특징이 관상과 행위가 동일한 범주 안에서 엮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의 설교에서 그러한 해석들이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는 모두 86개로 이루어져 있고, 모두 네 권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저는 3권의 설교 몇 개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베르나르의 성경 해석을 정리하겠습니다.
1권 1-20 <나에게 입 맞춰 주세요>
2권 21-46 <내 사랑아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3권 47-66 <나는 들의 꽃 골짜기 백합화>
4권 67-86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설교 47, 골짜기의 백합화
“나는 들의 꽃이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아 2:1)
신랑은 방이 아닌 ‘들의 꽃’입니다. 꽃은 들과 정원에서 자라지만 방에서는 자라지 않습니다. 꽃은 방을 향기롭게 합니다. 그러나 방에서 꽃은 바로 서지 못합니다. 물을 자주 갈아 주어야 합고, 쉽게 향기를 잃어버립니다. “계속 많은 사랑의 행위로 물을 갈아주지 않는다면, 선행의 꽃은 곧 시들고 꽃의 아름다움은 잃어버리게 됩니다. 방안에 있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정원과 들의 꽃은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한 양분을 흡수하기 때문에 언제나 아름다움을 유지합니다. 정원은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들은 자연적으로 꽃을 피웁니다. 하나님께서 그 꽃을 피웁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이 존재함을 말합니다.
꽃은 순결이고, 순교이고, 선행입니다. 정원에서는 순결이고, 들에서는 순교요, 방에서는 선행입니다. 정원은 순결에 적합합니다. 친구를 사귀는데 적절하고, 행복하게 은거하며, 인내하며 연단을 받기에 적당합니다. 울타리가 있어 보호받습니다. 그러나 들은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교에 적합합니다. 순교자들처럼 세상의 조롱거리가 됩니다. 방은 여기저기 꽂혀 있습니다. 담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입니다. 거룩하며 순수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주 예수를 의미합니다. 정원의 꽃, 동정녀에게서 돋아난 순결의 싹, 들의 꽃처럼 순교의 전형입니다.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서 조롱과 멸시를 받았습니다. 또한 방의 꽃입니다. 선의 거울이며 모범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선을 행하십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들의 꽃’으로 불리기를 좋아하십니다. 이것은 경건한 삶을 통해 임박한 박해를 견디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인내의 거울인 동시에 고난 당하는 자의 상급입니다.
‘골짜기의 백합화’는 겸손한 자들의 상급을 말합니다. 영광의 날에 산은 낮아지고 골짜기는 돋아집니다. 의인은 백합화처럼 필 것입니다.(호 14:5) 주님은 골짜기입니다. 골짜기는 겸손을 말합니다. ‘겸손한 자만 이 백합화의 경이롭고 영원한 광채로 빛나게 되리란 점을 지적’합니다. 신랑은 자신을 들의 꽃, 골짜기의 백합화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의 신랑이요 영원히 찬송할 분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긍휼로 항상 그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설교 48, 믿음과 관상에 관하여
“여자들 중에 내 사람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아 2:2)
괴로움을 주는 여자는 좋은 여자가 아닙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창 3:18) 영혼은 육신 속에 거하는 동안 가시나무 가운데 거하며 유혹과 불안과 환난의 고통을 필연적으로 겪습니다. 여자가 백합이라면 가시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꽃은 부드러워 가시에 쉽게 찔립니다. 여러분이 회개한다면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찔림으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시는 잘못이며 고통이며, 거짓 형제이며, 나쁜 이웃입니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다는 말은 얼마나 실제적입니까. 불신앙과 선동적인 남자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가시나무 사이로 다니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가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습니다. 하나님은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의 풀도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백합화를 얼마나 더 사랑할까요? 백합화는 가시에 찔림은 향기를 발합니다. 백합은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것은 복음의 완성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신부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입니다.(아 2:3) 신랑이 신부를 ‘꽃’으로 부르고, 신부는 신랑을 ‘나무’로 부릅니다. 나무는 영광과 탁월성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탁월하게 뛰어나지 않고, 찬미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합니다. 여자는 그냥 나무라 하지 않고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라고 말합니다. 유익한 과실을 맺지 않는 나무와 비교합니다. 하찮은 것으로 칭송하여 더 나은 비교의 대상, 즉 하나님이 계심을 말합니다.
여기서 칭송되는 것은 위엄이 아니라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인간의 지혜보다 낫고, 하나님의 약하심은 인간의 강함보다 강합니다. 인간들은 열매 없는 수풀의 나무입니다. 그들은 악하고 더럽고 추합니다. 모든 수풀의 나무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전하고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그는 약하고 버림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비록 그가 천사보다 못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수풀 중에 사과나무는 적절한 표현입니다. 열매 맺는 나무는 열매도 맺고 시원한 그늘도 만듭니다. 열매 맺는 나무는 존귀와 고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을 얻은 사람은 생명의 나무입니다. 수풀의 나무들은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 열매는 달았습니다. 맛봄으로 기쁨을 누립니다. 생명의 양식과 영원한 구원의 열매를 주었습니다. 믿음은 생명인 동시에 생명의 그늘입니다. 세상에 대한 향락은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딤전 5:6) 그러나 우리는 사망의 그늘에서 생명의 그늘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그는 육체를 통해 믿음의 그늘이 되시고, 영을 통해 마음의 빛이 되십니다. 그는 육이며 영입니다.
신부는 그늘에 앉아 기뻐합니다. 행복을 경험하며 그로 인해 기뻐합니다. 앉는다는 것은 ‘편안함’을 말합니다. 신부는 신랑의 그늘(영향력) 아래서 쉼을 얻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하나님 안에서 성도는 ‘달콤함’을 맛봅니다. 신부는 결코 싫증 내지 않습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분입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3. 나가면서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는 완벽하다 할 수 없습니다. 중세라는 시대적 배경과 아직 성경 해석의 미진(未盡) 함으로 인해 현대의 해석과 상이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신비주의에 깊게 빠진 탓에 알레고리적 해석에 얽매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별다른 해석이나 추론 없이 곧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로 해석해 버립니다. 이러한 비약적 해석은 자칫 위험한 성경 해석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특히 설교 47에 나타난 방과 정원, 들의 비유는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아가서의 의도인지는 파악하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이나 정원이 가진 특징을 정리해 신앙과 접목시킨 부분은 탁월한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48에서도 사과나무의 비유가 주는 그늘과 보호, 평안과 기쁨 등은 성경의 상징을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르나르의 성경 해석은 독사의 독처럼 죽이는 독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독을 치유하는 해독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성경 해석의 방점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관상(체험)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성경 구절을 은유적 해석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설교 48에서도 신부가 경험하는 기쁨과 달콤함은 결국 성도들이 하나님을 체험함으로 얻는 기쁨과 행복으로 연결합니다.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는 이성이 아닌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자 했던 신비주의적 성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성경 해석은 일상 속에서 신비를 체험하도록 이끌어 준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하는 의도를 벗어나 개인의 생각에 침전되어 엉뚱하게 오도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문자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안에 담겨 의미를 분명하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자/역자 : 클레르보의버나드/장미숙 | 출판사 : 은성 판매가 : 16,000원 → 14,400원 (10.0%, 1,600↓) 클레르보의 버나드는 12세기 유럽사회에서 거장이다. 그는 명설교자로서 당시 국왕과 교황의 조언자 역할도 담당했다. 성 버나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시면서 모든 것 안에 임재하시는 분, 그러면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았던 심오한 신비가이다. 그의 아가서 설교는 당시 중세 사회에서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지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유럽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사람들은 그의 설교를 평하여 마치 '꿀과 같이 달다'고 했다. 설교자 버나드는 신랑되시는 주님과 그의 연인인 인간과의 연애하는 감정과 언어를 빌려 설교한 것으로, 그는 명철한 풍유와 비유를 들어 우리로 …[더보기▶] |
'Book > 국민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고전읽기] 하나님께 이르는 영혼의 순례기, 보나벤투라 (1) | 2019.04.02 |
---|---|
보나벤투라의 간략한 생애와 신학 (0) | 2019.02.10 |
[기독교 고전읽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하나님의 사랑> (0) | 2019.01.30 |
[기독교 고전읽기] 중세의 신비주의를 열었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0) | 2019.01.30 |
[기독교 고전읽기]둔스 스코투스의 제일원리론 (0) | 2019.01.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