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왜?
[목회칼럼]
왜?
사랑의 교회가 지난 주 제직회를 했습니다. 일방적 다수결 원칙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투표해야할 것도 박수로 끝냈습니다. 저는 그것이 나쁘다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시기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투명하게 밝혀야할 시기에 불투명하게 하고, 겸손하게 사죄해야할 시기에 타인을 비방한 것입니다.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한 때 사랑의(義)교회는 한국교회의 모델이자 희망이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주님을 닮기 위해 애쓰는 분이셨습니다. ‘목사들의 목사’라는 호칭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목회자들의 세계에서도 정직하고 바른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 목사님을 존경하는 목사들은 (제가 알기로는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좋아하는 분들은 많습니다. 좋아함과 존경의 차이가 뭘까요? 상당히 애매한 경계(境界)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 하나는 존경 좋아함 받기는 쉬워도 존경 받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존경을 받으려면
첫째, 자기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남들보다 더 고생해야하고, 희생해야하고, 포기해야하고, 정직해야하고, 겸손해야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존경 받기는 힘듭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일부러 존경을 받으려고 애쓰란 말이 아니라, 존경이란 단어에는 대가를 자기부인과 모델이 될만한 모범적인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철저하게 약해야 합니다.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먼저 일어난다는 시가 있습니다. 불의 앞에서는 목숨을 걸고 사생결단(이 말은 옥목사님이 즐겨 사용했던 말입니다.) 해야 하지만, 모든 사람들 앞에서는 약하고 부족하고 어리석어야 합니다. 때론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부족해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바리새인 앞에서는 맹수와 같은 분노를 보였지만, 제자들과 연약한 이들 앞에서는 한 없이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약해 지셨습니다.
세번째, 책임져야 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보호합니다. 다윗은 곰과 사자가 올 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골리앗과 싸우기 직전 사울 왕 앞에서 그것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사명을 다하는 모습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물러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목자는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이 목자에게 '이제 그만 두시오'라고 하면 목자는 '네!'로 답해야 합니다. '아닙니다. 지금까지 내가 양을 키우고 길렀으니 이 양들은 내 양이오!'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더 많은 사역을 위해서 끝까지 살아남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이제 되었다 하시자 고통스러웠지만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시고 자신의 사명을 마무리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허물이 있고, 부족이 있다면 깨끗하게 물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가? 왜?
'일상이야기 > 목회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고등부칼럼] 큐티: 말씀 읽기의 혁명성 (0) | 2014.01.18 |
---|---|
[중고등부칼럼] 큐티하면 이렇게 달라진다 (0) | 2014.01.11 |
[목회칼럼] 당신의 교회는 안녕하십니까? (0) | 2014.01.10 |
중고등부-신년칼럼 하루에 15cm만 가라 (0) | 2014.01.04 |
독서칼럼-기독교인은 어떤 책을 읽어야 할까? (2) | 2014.01.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