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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일상의 여백에서 찾아낸 하나님의 은혜

샤마임 2013.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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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일상의 여백(餘白)에서 찾아낸 하나님의 은혜

 

 


위대한 작가가 되려면 세 가지를 가져야 한다. 부지런한 눈. 부지런한 손. 부지런한 발. 어떤 책에서 읽었던 말이다. 일상에 숨은 비범함을 발견하는 것이 작가의 능력이자 성도의 의무다. 일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마음처럼 게으른 게 없다. 일상의 여백에 겹겹이 쌓인 경이(驚異)라도 마음이 없으면 보이지 않는다. 경이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일상은 무료하고 지겨운 굴레가 된다. 그러나 마음을 조금만 부지런히 경작(耕作)하면 많은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사소함에 매료되지 않는다면 무엇에 감동을 한단 말인가. 


교회 마당 한편에 풀이 자랐다. 틈이라고 도무지 찾아볼 수 없고 비가 와도 여분의 수분도 공급받지 못하는 곳이다. 어느 날 바람 따라 날아온 한 톨의 씨가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흙도 거의 없다. 수분도 없다. 생명을 틔우기에는 척박하다. 그럼에도 생명은 본성에 따라 그곳에서 몸을 찢어 새싹을 틔웠고 바위틈 콘크리트 틈새로 뿌리를 내렸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싹을 틔우면 얼마 가지 않아 죽을 것이라고 만류한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면 어리석은 일이라며 비웃는다. 누군가는 뻔 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며 생각이 없느냐고 참으라 한다. 그러나 씨는 누군가의 이야기보다 자기 자리 잡은 생명력에 의지하여 싹을 틔운다. 뿌리를 내려 몸을 지탱한다. 잎을 내고 줄기를 올려 힘껏 창조적 능력을 발산한다. 


생명은 하나님의 언어다. 그분의 말씀이 곧 존재이며 생명이다. 생명은 이토록 처절하게 말씀 다움에 철저하다. 효율과 능률을 묻지 않으며, 내일을 걱정하거나 생존을 위한 축적도 생각지 아니한다. 그저 오늘 먹이시는 아버지의 성실하신 은혜만을 기억한다. 무명의 들풀에서 하나님의 언어가 발현된다.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요 일하시는 일터이다. 존재와 생존을 격리시키지 않는 절대 순종의 삶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일상에 뿌려 놓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들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쟁쟁하게 들린다. 일상에 숨겨 놓은 생명의 음성을 찾는 자가 누리는 축복이다. 


우리 안에 생명의 능력을 나태기 위해서는 일상에 안주하려는 게으른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존재의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손을 찾으려는 사색을 더하면 경이가 된다. 그러나 기적 앞에서도 무덤덤함에 침전되면 일상은 굴레가 된다. 성숙은 우연하게 일어난 피상(皮相)이 아니다. 게으른 생각을 벗어나 사유하고자 하는 몸부림과 경이를 찾고자 하는 부지런함을 통해 일어난다. 부지런히 생각하고, 부지런하고 살피고, 부지런히 찾아다니면 일상은 경이가 된다. 


박대영 목사는 [묵상의 여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묵상의 여정을 즐길 수 있는 가장 큰 준비물은 ‘호기심’이다. 호기심과 질문은 어린아이들이 특징이다. 묵상의 여정이 천국 본향을 향한 여정이라면, 그것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가장 열려 있는 길이다. ... 우리가 호기심을 잃은 이유는 길들여졌기 때문이다.”(289쪽) 일상이 흥미롭지 않는 이유는 길들여진 탓이다. 호기심을 잃었다. 하나님께서 삶의 범주 안에서 동행하시는 은혜를 찾고자 하는 호기심의 부재다. 나는 박대영 목사가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대상은 하나님을 읽는 텍스트가 되어야 한다’(294쪽)는 말에 적극 동의한다. 


생존의 위협 속에서 생명이 몸을 찢는 고통을 이겨내고 세상 속으로 자라 올랐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내 안에 담긴 하나님의 언어를 살아내면 될 일이다. 지금 살아가는 이곳에서 뿌리내리며 존재의 의미를 밝히면 된다. 나의 일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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