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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하나님은 트로트다

샤마임 2013.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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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하나님은 트로트다

 

도덕경(道德經)의 첫 문장이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풀어보면 도(정의)라고 말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부를 수 없다면 무이거나 인식 밖의 것이다. 이름이 지어질 때 비로소 앎이 시작되고 깨달음이 이루어진다. 노자는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그 무엇이 하늘과 땅이 시원(始原)이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의 어머니다.”(오강남 譯)

 

이름이 없다면 근본일 수는 있지만 시작할 수는 없다. 이름이 지어지는 순간 인식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축적이 가능해진다. 창조가 말씀으로 시작되었듯이 모든 것을 드러남으로 형태를 갖는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말씀은 존재며, 본질이며, 생명이다. 말씀은 정체된 어떤 것이 아니다. 말씀은 씨앗이다. 발화하고 자라나고 확장된다. 말씀이 없으면 시작할 수 없다. 생명도 존재도 행위도 풍성함도 변화도 없다. 말씀이 존재이며 생명이다. 그리고 시작이다. 말씀을 놓치는 순간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아담에게 준 첫 번째 과업(課業)은 작명(作名)이다. 아담은 동물들을 보며 하나하나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름을 지어줌으로 모호한 채로 두지 않고 통제와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 신적 능력으로 동물들의 본성을 꿰뚫어보고 그에 걸 맞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동물들은 이름을 갖게 됨으로 규정(規正)된다. 호랑이는 이제 더 이상 토끼가 아니다. 호랑이는 풀을 먹어서는 안 되고, 썩을 시체를 먹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호랑이기 때문이다. 캥거루로 불리면 새끼를 낳으면 어미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담고 다녀야 한다. 남의 둥지에 새끼를 넣고 풍류를 즐기지 못한다. 이름은 운명이며, 종속이며, 책임이며, 방향이며, 삶의 의미다.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의 이름을 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은 **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은 없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이름은 정의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다. 흔히들 아는 ‘하나님’은 히브리어 ‘엘’의 번역이다. 고유명사 아닌 대명사다. 즉 정현욱이 아닌 ‘아버지’ ‘목사’ ‘그’이다. 심지어 출애굽기 3:14의 ‘스스로 있는 자’역시 이름이 아니다. 옛 번역은 ‘여호와’로 번역했고, 근래에는 ‘야훼’로 번역하지만 그렇게 불러야하는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엘로힘, 엘론, 엘샤다이 등의 이름 역시 대명사로 본명이 아니다. 성경 어느 곳에서 하나님의 본 이름은 없다.

 

하나님의 이름 없음은 사람의 인지능력으로 하나님을 인지할 수 없음을 말한다. 사사기에서 삼손의 출생을 알리기 위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마노를 찾아간다. 마노아는 그에게 이름을 물었다. 여호와의 사자는 ‘왜 나에게 이름을 묻느냐 나의 이름은 기묘자니라.’(삿13:18)고 답합니다. 기묘(奇妙)를 NIV성경은 ‘It is beyond understanding.’로 번역했다. 즉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지 못함으로 하나님을 올바로 인지할 수 없고, 신지식에 도달할 수 없게 된다. 막연하고 모호한 지식만을 갖게 된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을 인지(認知)할 수 없는가. 아니다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인지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한 만큼은 알 수 있다. 개인의 인지능력 차이와 문화적 환경과 역사적 배경의 한계를 갖기는 하지만 올바른 신앙으로 도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하나님의 ‘이름들’이다. 예를 들어,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고, ‘반석’이고, ‘방패’와 ‘산성’이시다. 하나님의 이름은 지금 여기서의 자연과 관계를 통해 인식된다. 하나님은 아버지다. 하나님은 큰 강이다. 하나님은 선생님이다. 등의 이름 등은 직유이며 비유지만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들이다. 불완전하지만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명확하게 드러내 주시는 방편은 역사(歷史)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끊이지 않고 이어지며, 시간과 공간의 이동과 변화를 통해 역사는 존재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은 역사 속에서만 가능하다. 알 리스터 맥그라스는 <하나님 얼굴을 엿보다>에서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우리는 만나시다’(82쪽)고 했다. 창조와 바벨탑 사건, 홍수와 출애굽의 기적들, 성육신과 공생애,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무덤에서의 부활은 역사다.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는 역사 속 사건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認識)한다.

 

거시적(巨視的)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미시적(微視的) 일상(日常)에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전 우주를 통치하실 뿐 아니라 세포하나까지 간섭하신다. 광활한 천체(天體)를 움직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자고 일어남까지 간섭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지금 여기의 일상 속에서 경험된 것들과 자연과 같은 상징을 통해서 정의되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은 목자시고, 반석이시고, 산성이시며, 친구이며, 애인이며, 사랑이며, 꿈이며, 소망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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