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 묵상집]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죽고.
[본회퍼 묵상집]
본회퍼 / 찰스 링마 엮음 / 죠이선교회
“주님을 따르라는 주님과 함께 죽으라는 말이다.” 십여 년 전, 수도 없이 듣고 들었던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를 집어 들었다. 설교시간에 목사님들이 침을 튀기며 외쳤던 ‘값싼 은혜’를 인용한 바로 그 책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읽고 싶었던 책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읽어 나갔다. 그러나 시작되는 첫 문장부터 시작된 절박함과 긴장감이 나를 압도하고 말았다. 읽다가 죽을 것 같았다. 아니다. 죽어야 할 것 같았다. 은혜가 무섭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이후로, 잔뜩 겁먹은 생쥐처럼 본회퍼의 글을 조금씩 더듬어 갔다. 고작해야 4권 정도에 불과했지만 당시로서는 위험한 모험이었다. 청우라는 처음 듣는 출판사에서 발행한 <본회퍼 십자가 부활의 명상>은 부활절 기념으로 구입한 책이지만, 부활의 기쁨은 없고 비열한 인간성의 심연과 역설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읽었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으로서 인간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인간의 성질, 본질, 죄, 고난을 취하고 견딤으로서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어떤 비난과 의심과 불확실성도 뛰어넘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 하신다. ... 하나님은 인간과 결합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고상한 인간성이 변화된 모습이 아니라 현실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이이다. 그의 긍정은 심판자의 냉정한 긍정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는 자의 연민의 긍정이다.”
문단과 문장 사이에 촘촘히 박힌 촌철살인(寸鐵殺人)은 전통의 가면을 쓰도 있던 나의 영적 가면을 벗기려 했다.(47쪽) 나치치하에서 하나님의 뜻을 갈구했던 행동하는 신앙인의 통찰이 분명하다. 나태한 고상함에 익숙해진 생각의 게으름을 박살내 버린다. 실천 없는 전통을 타도하고, 사랑 없는 혁명을 부정한다. 그의 사상의 중심은 예수에게 있다. 십자가로 향하는 신앙의 치열한 투쟁을 담았다. 그렇게 시작된 본회퍼 사랑은 그의 추종자가 되도록 강제했다. 날마다 그의 문장을 접하는 기쁨을 무엇으로 다하랴. 오스왈드 챔버스의 묵상집이 영적 신비주의를 대표한다면, 본회퍼의 묵상집은 순교적 신비주의다.
편집하고 해를 달았던 찰스 링마는 본회퍼의 글을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기보다는 혼란을 일으키고, 경건하다기보다는 세상 적일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본회퍼의 글은 텍스트에 갇히지 않고 ‘성경적 영성을 현실성과 결합했고, 믿음을 순종과, 평화를 저항과, 공동체를 소탈한 개인주의와 기도를 행동주의와 결합했기’(8쪽) 때문으로 해석한다. 나는 그의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본회퍼의 글은 양심을 깨우고, 행동하도록 도전하기도 한다. 찰스 링마는 본회퍼의 책들을 섭렵하며 보석 같은 문장을 채굴(採掘) 하여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특별한 순서나 주제를 정하지는 않은 것 같다. 성경 본문을 가장 위에 인용한 다음, 그와 어울리는 본회퍼의 문장을 그 아래에 배치했다. 가장 아래 부분에는 찰스 링마 자신의 사색을 담았다.
본회퍼의 묵상은 종말론적 신비에 젖어 있다. 많은 글에서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죽음도 불사하는 실천으로 가득 차있다. <그리스도론>에서 인용한 1월 21일 글은 이렇다.
“결국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자기가 죽거나, 아니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다.”
예수는 마치 날이 시퍼렇게 서린 진검 같다. 잘못 다루면 예리한 날이 여지없이 살점을 발라낸다. 내가 알고 있는 예수가 이렇게 무서웠던 적이 있었을까. 예수 따름을 죽음과 직결시켜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난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한 목사인지도 모른다. 두렵고 또 두렵다. 찰스 링마는 이렇게 해제한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과 일은 진실의 소리를 울리기에, 우리는 평범함을 떠나 탁월함에 대한 그분의 비전을 품으라는 도전을 받습니다. 이 비전은 다름이 아니라 섬기는 리더십의 길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의 사역은 죽음에서 정점(頂點)을 이룬다. 한 사람이 아닌 ‘그 사람’으로서 죽음이다. 예수의 공생의 사역이 치유와 회복이 목적이었다면, 수단은 자기 부인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십자가의 큰 죽음은 일상의 사소한 수많은 자기부인 곧 죽음의 연장일 뿐이라고. 하루하루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나태함을 몰아내고,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순종으로 일관했던 예수의 삶은 끝없는 죽음의 현장이었다. 지속적인 죽음의 연습을 통해 마지막 죽음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순종으로 일관했던 삶, 그것은 곧 예수의 삶이다.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57쪽)는 명언은 믿음과 순종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확언시켜 준다. 제자의 삶이 ‘안전한 삶에서 불안전한 삶으로 이끌’(62쪽)리는 것이기에 날마다의 순종이 없다면, 그 믿음은 가짜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다.
삶을 비약시키지 않았던 본회퍼는 조국교회의 현실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는 신앙 양심에 이끌려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죽음을 염두에 두었던 그였지만 일상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작은 것에 충성 된 자가 큰 것에도 충성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몸으로 살아냈다. 정의를 외치는 이들이 종종 저지르는 실수는 삶은 지나치게 어둡게만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도 그렇고,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별들도 그렇고, 집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마트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작은 것들에 감사를 드리는 자만이 큰 것을 얻는다. 일상의 선물에 감사하지 않으면 하나께서 우리는 위해 쌓아두신 거대한 영적 선물을 받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적은 분량의 영적 지식과 경험, 그리고 사랑에 감히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85쪽)
감사는 자족에서 나오는데, 자족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일어난다. 세상은 불안전하고, 모순과 억측이 난무한다. 세상은 공평하지 못하다. 정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불의한 세상에서 만족할 수도, 감사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눈이 필요한데 하나는 정의이고, 다른 하나는 긍휼이다. 정의는 사랑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본회퍼는 사랑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303쪽)고 단언하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웃을 미워할 수 있다.
그러나 본회퍼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옥중서간>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영원히 사랑하되, 세상에 대한 애정을 떨어뜨리거나 줄이지 않도록 요구’(310쪽)하신다고 일러 준다. 위대한 억측은 하나님을 사랑ㅇ하면 사랑할수록 세상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세상을 사랑하셨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 사랑은 교회 안에만 머물 수 없고, 기도원에 들어가 금식함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 속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 받았다. 결국 자족과 감사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는 가운데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예수와 함께 날마다 죽는 것.
<본회퍼 묵상집>을 몇 쪽의 문단으로 담아내기에 역량의 한계를 통감한다. 아직도 발설하고픈 주제가 산더미다. 그동안 ‘길들여진 말’(183쪽)처럼 야성을 잃은 삶을 살아가는 내 자신을 반추(反芻)하기에 시간이 부족하다. 지금까지 읽은 최고의 묵상집이다. 읽고 또 읽고 싶다. 굳이 묵상집으로만 묵혀 두고 싶지 않다. 종종 꺼내 신앙의 야성을 일깨울 때 사용해도 될 성싶다. 참 좋은 책 한 권 만났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찰즈 링마가 언급한 다음 문장은 기억해야겠다.
“묵상은 결코 의미 있는 행동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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