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알래스터 맥그라스의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서평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
저자 알래스터 맥그래스
출판사 국제제자훈련원
개신교란 무엇인가?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할 때 천주교와 개신교의 차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전도사였던 자형에게 성당과 교회가 어떻게 다르냐고 물었다. 교회는 천주교에서 분리해 나온 것으로 아는데, 그럼 교회는 올바른 것이 아니지는 않는가라고 물었다. 그 때 정확하게 답을 얻지 못한 것 같다. 그 후로 기독교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그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에 대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곧 알게 되겠지만 당시 질문했던 질문들은 어느 누구도 답할 수 없는 심오한(?) 질문들이었다.
영국의 석학인 알래스터 맥그라스는 이 책 <기독교, 그 위험한 사상의 역사>를 통해 개신교가 가진 독특하고도 위험한 ‘생각’을 언급하고 있다.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이 책은 단 한 가지의 관점으로 기독교의 500년 역사를 뚫고 있다. 그것은 ‘분열’이다. 필자는 목회 사역을 하면서 ‘개신교는 왜 이렇게 많은 교단과 교파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들어왔다. 아니 나도 그 질문을 했고, 답도 했다. 그러나 양심이 거리낌 없는 순전한 답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고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나 이 책은 드디어 그 질문에 답을 주고 있다. 역시 석학다운 통찰력이 느껴지는 저서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서문에서 1998년 7월에 있었던 성공회 모임인 램버스회의에서 일어난 성경해석에 관한 논쟁을 언급한다. 이 회의를 통해 개신교의 위험한 사상이 공개된다. 그것은 ‘누가 성경 해석의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이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으로’라는 타이틀로 요약될 수 있다. 이 타이틀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하나는 ‘지금까지 천주교가 첨가해 놓은 기독교답지 못했던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순수한 처음 교회인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성경해석의 권위는 사제나 교회가 아니라 개인이다’라는 전제이다. 루터가 주장한 만인제사장론에는 이러한 개인의 성경해석 이유를 신학적이고 성경적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또 다른 개인들의 등장이다. 한 문장을 수많은 개인들이 각기 자기만의 다른 해석을 한다면 결국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혼돈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 책은 큰 범주로 세 가지를 나누었고, 세부적으로 17장을 나누었다. 1부에서는 개신교의 기원을 다루었고, 2부에서는 개신교가 형성되어온 과정과 표현하는 형식적인 부분들을 다루었다. 마지막 3부에서는 현대에 일어난 개신교의 변화들을 추적했는데 특히 오순절주의와 비주류 기독교국가로 치부 되었던 나라들에 대해 점검한다. 이 책의 주된 논의는 1부에서 모두 다루어지고 있다. 저자는 1부에서 개신교가 가진 분열할 수밖에 없는 특성을 루터의 종교개혁 기원으로부터 찾아내며, 칼뱅과 잉글랜드의 성공회 및 청교도 운동 속에서 찾아낸다. 물론 신대륙으로 이어지는 역사도 빠뜨리지 않는다. 개신교의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는 결국 처음 개신교가 시작했던 제론(提論)들을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이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종교개혁은 사회적 배경과 격리(隔離)시킬 수 없다. 종교개혁은 ‘원천으로 돌아가자’(아드 폰테스 ad fontes)는 르네상스 운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고, 기존 천주교회의 타락과 부패가 엮어지면서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됨으로 탄생한 것이다. 우리가 잘 알듯이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고, 단지 올바른 성경연구를 통해 교회를 개혁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교회를 비판하고 싶은 몇 사람들이 비텐베르크 성문에 붙은 루터의 쪽지가 발견하고, 인쇄술 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 급속하게 퍼뜨렸다. 루터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고, 교회를 무너뜨릴 수 있는 수단임을 간파했다. 종교개혁의 정당성은 ‘누구나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론을 통해 이루어진다. 사제의 도움 없이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험한 사상이다.
누구나 해석할 수 있다면, 누구도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만찬을 두고 루터와 츠빙글리의 논쟁과 결별은 이후에 있을 분열의 불길한 암시였다. 이후 루터는 칼뱅과 결별하고, 성공회 역시 헨리8세의 개인적인 이유이기도 하지만 천주교와 결별하고, 성공회 역시 청교도들과 결별한다. 이 모든 분리와 대립은 근원은 성경해석 때문에 일어났다. 종교개혁 초기 일어났던 ‘아디아포라 논쟁’은 성경해석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루터파는 성경에 명백하게 기록되지 않는 것은 임의대로 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개혁파는 그것까지도 ‘성경대로’ 없애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부류는 필연적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성상파괴 운동’은 ‘아디아포라 논쟁’의 가장 극명한 결과였다.
개신교가 가지고 있었던 권위의 부재는 초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심각한 양상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재세례파의 극단적 해석은 루터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루터자신의 만들어 놓은 이론이 극단적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고, 루터는 보수적인 방향으로 돌아선다. 이 일은 어쩌면 루터의 가장 큰 실수이자 루터의 종교개혁이 독일 안에만 머물 수밖에 없었다. 맥그라스는 루터를 넘어 칼빈를 통해 개신교가 나약하나마 교회 안에 권위가 세워져가는 것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칼빈은 혼란을 거듭하던 개신교 안에 새로운 질서의 양상을 보여주었고, 약하나마 권위를 가지게 했다. 이 후에 일어난 개혁 운동들은 자체적으로 고백서 등을 통해 합의된 신앙고백을 하게 함으로 일치로의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개신교가 가진 분열의 DNA는 결코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분열양상은 영국 종교 운동에서 성공회와 청교도들 간의 대립으로 나타나고, 미국으로 건너간 분리파 청교도들로 하여금 회중중심으로 개교회 중심의 기독교로 발전하게 된다.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려는 비전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수십 년도 지나지 않아 벽에 부딪치고 만다. 두 세대가 넘어가지 전에 종교적 열정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교회는 소통과 교재의 중심으로 존재하면서 종교적인 역할을 감당했지만 젊은 세대는 종교적인 의미를 쇠퇴시켜 버린 것이다. 저자는 미국에서 개신교의 고립과 퇴보를 발견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피니의 부흥 운동은 말씀 중심의 개신교를 감정중심으로 돌려놓았다고 주장한다.
이후에 일어난 미국 안에서의 개신교 역사는 세상과의 대립이 아니면 타협이라는 세속화의 길을 가게 된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은 미국을 하나로 묶어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교회의 세속화와 개인주의를 크게 진작시켰다는 비판의 소리도 있다. 맥그라스는 2-3부에서 이러한 변화들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성상파괴운동을 좀 더 연장해 보자. 루터가 교회 안의 이미지와 성상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 많은 부분을 수용했던 이유는 그의 보수적인 측면도 있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교육 효과 때문이었다. 맥그라스의 말을 직접 인용해보자.
“루터주의는 형상들을 그대로 유지하되 다만 그 형상이 말하는 주제를 바꾸는 쪽을 택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루터주의는 형상이 불러일으키는 상상력과 형상이 지닌 교육 효과를 인정하고 이 형상들을 교회에서 광범위하게 활용했다.”(570쪽)
이에 비해 좀 더 철저한 개혁을 원했던 칼빈을 따랐던 개혁파는 성상과 우상을 일치시키며 교회 안에서 어떠한 성상이나 이미지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음악조차도 굉장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개신교 신자들은 당장 이런 우상들을 완전히 없애는 것만이 우상숭배를 치유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성상 파괴가 시작되었다.’(571쪽) 개신교의 이러한 운동은 근대를 넘어 현대로 이어지면서 세상과 결별하게 되는 극단적 형태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맥그라스는 이후에 일어난 일어나는 다윈의 <종의 기원> 등의 자연과학과 문학 등의 문제를 다루면서 고립되어가는 개신교를 보여준다. 물론 약간의 호의와 변화들은 일어난다.
다행히 영국의 국교회 신자였던 C. S. Lewis 등의 판타지 소설의 영향으로 문학에 대하 호감을 갖게 되었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심지어 다윈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진화론자들은 기독교의 창조설을 부정하며 성경의 창조주는 <만들어진 신>쯤으로 치부해 버린다. 문제는 기독교가 점점 고립되어간다는 점이다. 1925년에 있었던 ‘원숭이 재판’이후 개신교는 곧 어리석은 고집쟁이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근본주의는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이 사건은 그동안 시민정신과 민주주의라는 근대를 이끌어 왔던 개신교의 퇴보를 말해준다. ‘문자 그대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이런 생각은 과학 분야에서 고집스러운 경험주의로 바뀌어’(604쪽) 인식되고 만 것이다.
저자는 미국에서 일어났던 초교파적 ‘공동체 운동’ 교회들을 주목하며 개신교 분열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빌하이벨스와 릭웨렌 목사들은 현대적 감각에 맞게 교회를 새롭게 셋팅하여 교단 중심이 아닌 개교회 중심으로 교회로 만들었고 성공했다. 저자는 이러한 운동에 대해 기독교 미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아직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신교는 성경을 읽음으로 희망을 발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개신교가 자신만이 갖고 있는 내부 자원들을 바탕으로 혁신과 갱신과 개혁을 단행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을 본디 갖고 있음을 보았다.” 즉 개신교의 장점은 시대 속에서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음 세대에도 충분히 대응해 나갈 것이라는 확신이다.
2012년 8월 29일 씀
저자/역자 : 알리스터 맥그래스/박규태 | 출판사 : 국제제자훈련원 판매가 : 40,000원 → 28,000원 (30.0%, 12,000↓) 개신교의 역사, 종교문화적 특질, 미래를 말하다종교개혁과 함께 확산된 개신교의 위험한 사상“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이로 인해 촉진된 놀라운 창조성과 혁신그리고 끊임없이 발생하는 긴장과 논쟁!16세기 종교개혁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험한 사상을 불러들였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갖고 있으며 그들 나름의 시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다.”는 ‘영적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천명한 것이다.이 사상은 당시 사회 질서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해방시켰으며 새로운 시대적 도전을 기독교가 이겨 낼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다…[더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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