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엠마오의 성만찬
엠마오의 성만찬
눅23:25-35
오늘 성경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일 오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누가는 엠마오가 예루살렘에서 이십오리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 거리로 따지면 약 10km 되는 거리입니다. 이 거리는 하단에서 구포역 바로 앞가지의 거리쯤 됩니다. 젊은 청년이 걸어서 약 2시간 정도 걸리는 시간으로 나이든 분들도 3시간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지금은 차를 많이 타기 때문에 먼 거리처럼 보이지만 불과 20년 전만해도 10km 정도는 쉽게 걸어 다녔습니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거리로 딱 알맞은 거리입니다. 이들은 엠마오로 내려갔다고 중간에 어떤 사람을 만나 이야기 하다가 날이 저물어 같이 식사를 하는 중에 갑자기 일어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 갔습니다. 저녁에 밥을 먹다가 갔으니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시간은 밤은 늦은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도중에 무슨 일이 난 것일까요?
14절 말씀을 보면 그들은 내려가면서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르면서 일어난 일에 대해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면 이게 도대체 어떤 일인가 물었습니다. 이 때 한 낯선 남자가 그들을 찾아와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들은 낯선 사람의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잠깐 멈추어 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은 슬픔과 근심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살면서 근래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알지 못한단 말입니까?” “글쎄요, 잘 모릅니다. 무슨 일입니까?” “바로 나사렛 예수의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백성 앞에 말과 일에 능한 선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진짜 우리를 구원할 분이라고 믿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끝이 나다니요. 도무지 믿기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어떤 여자들이 예수의 무덤에 가서 그는 시체는 보지 못하고 그가 살아나셨다는 천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하오 어의가 없어서 무덤에 가보니 정말 무덤에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가 살아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답답하기도하고, 황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큰 실망과 좌절감으로 살아갈 힘을 몽땅 잃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기대하고 소망했던 일이 너무나 허무하게 끝이 나버린 것입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무너집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 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혹시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처럼 반전의 기적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자 좋습니다. 엠마오 도상으로 내려가 봅시다.
찾아오시는 예수님
1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먼저 찾아 오셔서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지금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서로 이야기 하며 가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지적 능력으로는 도무지 풀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래 생각해도 답도 없고, 해결한 지혜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고, 암담하기 그지 않는 상황 속에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간은 무작정 흘러 가는 것 같고, 쓸쓸함과 허무함이 인생을 지배해 버린 것 만 같습니다. 1979년 들고양이가 불렀던 ‘마음 약해서’가 있습니다.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마음약해서 잡지 못했네 돌아서던 그 사람 혼자 남으니 쓸쓸하네요 내 마음 허전하네요
마음약해서 잡지 못했네 돌아서던 그 사람혼자 남으니 쓸쓸하네요 내 마음 허전하네요
생각하면 그 얼마나 정다웠던가 나 혼자서 길을 가면 눈앞을 가려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리네 마음 약해서 마음 약해서 나는 너를 잊지 못하네
마음 약해서 눈물이 흘러내릴 때, 그 때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눈이 가리워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 일어나는 많은 아픔과 슬픔의 이유는 사실 자체보다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우리의 몽매한 눈’에 있습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는 보지 못했다’라고 말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함께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 때 주님은 그들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상세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고, 구약의 모세 오경과 시편과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이며, 그것이 성취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27절을 보면 자기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성경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풀어 주며 그들에게 알려 주자 그들의 마음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32절,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여기서 ‘뜨겁다’의 헬라어는 ‘카이오메네’인데, 불타다. 큰 감화를 받아 마음이 못견딜 정도로 달아 오르다.의 뜻입니다. 그들에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뜨거움이 그들이 마음에 차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하게 이해 되지는 않지만, 말할 수 없는 복받쳐 오름이 느껴졌던 것입니다. 아, 이것이 말씀의 힘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세상은 소망 없지만 말씀을 들으면 힘이나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붙들며 살기를 소망해야 됩니다. 말씀에 집중할 때 힘이 불쑥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는 것만으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다음 뭔가가 더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2. 식탁교제
이야기를 하다 길을 가니 어느 새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마을 가까이에 오자 강권하여 함게 유숙하자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들어갔고, 함께 음식을 드시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때, 누가는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0절을 볼까요?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두 가지를 하셨습니다. 하나는 축사, 즉 감사기도, 다른 하나는 떡을 떼어 그들에게 준 것입니다. 누가는 왜 이것을 정확하게 기록했을까요? 누가의 제2의 저작인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성만찬 사건이며, 기독교의 혁명성을 이야기 합니다. 사도행전 2:43-47을 봅시다.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성만찬이 무엇인가? 그것은 들리는 말씀에서 보이는 말씀, 체험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금요일 저녁 제자들을 모아놓고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그 성찬은 요즘 우리가 하는 카스테라가 아니라 큰 빵을 떼어 먹는 식사시간이었습니다. 주님님 떡을 떼어주며 이것은 나의 몸이고, 포도주를 주시며 이것은 나의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만찬은 예수님의 자신의 사역의 핵심이 담겨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할 신앙의 척도(尺度)입니다. 초대교회는 매주일 성만찬이 행해졌으며, 종교개혁가인 칼빈도 매 주일 성만찬을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성만찬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바로 제자들이 눈이 띄여질 때가 말씀을 들을 때가 아니라 성만찬 즉, 식사를 할 때인가입니다.
1) 식사를 함으로 우리는 친구가 됩니다.
제가 예전에 태국에 단기선교를 갔을 때 이야깁니다. 태국 북쪽인 치앙마이 지역의 아카족과 후리족들에게 선교를 떠났습니다. 가기 위해 차를 몇 대 빌렸습니다. 도착해서 예배도 드리고 연극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끝나고 식사를 하는데, 운전기사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선교사님께 물었더니, 운전기사는 신분이 낮기 때문에 밥을 같이 먹을 수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를 고용했고, 그는 고용당했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그는 종의 입장이 된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도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먼나라의 일이 아닙니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한 식구가 밥을 먹어도 상이 달랐습니다.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장남인 큰 형은 밥상을 따로 차렸고, 나머지 가족들은 다른 상에서 먹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분의 차별입니다. 심지어 어떤 집에서는 엄마들은 방이 아니라 부엌에서 먹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불과 몇십년 전 우리나라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물며 2천년 전 초대교회 당시는 어땠을까요? 역시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인과 하인은 절대 같이 식사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신분만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혁명적 사건이었습니다. 함께 식사함으로 친구가 되고,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성찬의 개념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종도 없고, 노예도 없고, 주인과 종이 함께 상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킹 목사님이 워싱턴 행진에서 행한 설교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옛 노예의 후손들과 옛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사악한 인종주의가 판을 치고, 주지사가 늘상 연방 정부의 조처를 가로막을(interposition)수 있다느니, 연방법의 실시를 거부(nullification)한다는 말만 반복하는 저 아래 앨라배마주가, 바로 그 앨라배마 주가 언젠가 변하여, 흑인 소년 흑인 소녀들이 어린 백인 소년 백인 소녀들과 손을 잡고 형제자매로서 함께 걸어갈 수 있게 되는 꿈입니다. 오늘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계곡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은 낮아지며, 거친 곳은 평평해지고, 굽은 곳은 곧게 펴지고, 하느님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사람들이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는 꿈입니다. (이사야 42:15~16)]
차별과 편견의 벽을 넘어 모두가 하나 되는 꿈, 그것이 바로 성만찬에 있습니다. 그들은 한 상에 둘러 앉아 오직 예수만을 자신들의 구주로 삼고 그 어떤 것은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찬의 자리에서, 자신의 권리를 내려 놓았고, 자신의 신분의 옷을 벗었고, 자신의 재산의 목록을 버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고 개취급하던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함으로 용서와 화합의 기독교를 직접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한 끼의 식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위대한 헌신이었습니다. 갈라디이서 2장을 보십시오. 그곳에서 바울은 베드로의 외식을 심하게 책망합니다.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을 믿은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게 식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야고보의 일행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방인들과의 식사를 거절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외식이라고 질타하면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 식사를 함으로 행복해 집니다.
올 초에 읽었던 세실 앤드류스라는 아줌마가 쓴 <유쾌한 혁명을 작당하는 공동체 가이드북>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말이 있습니다.
“이 책의 핵심은 유쾌하고 배려할 줄 아는 대화란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있다. 나는 세상을 구원하는 길은 대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식사는 단순히 음식을 섭취함으로 육신의 영양분을 공급받는 시간만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대화가 있고, 나눔이 있고, 생각의 공유가 일어납니다. 성찬식은 보이는 말씀이며, 체험되는 말씀입니다. 세실 앤드류스는 행복을 부르는 4대 요소를 ‘관계’ ‘소명’ ‘유희’ ‘통제’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의 통제는 억압의 의미가 아니라 ‘공유’하기 위한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즉 내 혼자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말하는 것이고, 일방적이고 억압적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교회의 변화 가운데 하나는 소그룹의 활성화입니다. 대중이 함께 드리는 익명성의 예배를 넘어 개인의 존재를 드러내고, 일상의 사소함을 공유함으로 통해 공적 예배에서 받은 말씀을 체험하고 나누는 현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한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사소한 일상을 공유함으로 일어납니다.
친하다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잘 안다는 뜻이고, 사소한 것까지 공유한다는 뜻입니다. 사회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이것은 친밀거리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사소하고 은밀한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사이가 될 때 행복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비밀은 아무에게나 털어 놓지 않습니다. 친한 사람, 신뢰할만한 사람에게 털어 놓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창] 18: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에게 다시 자손을 약속하시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실 뜻을 드러냅니다.
[시] 25:14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성경을 잘 읽어 보십시오. 30,31을 보면, 떡을 뗄 때 그들의 눈이 밝아졌고, 35절을 보면, 떡을 떼심으로 그들에게 알려졌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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