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지금까지 지내 온 것 눅22:24-34
지금까지 지내 온 것
눅22:24-34
삶을 한 문장으로 정의한다면, 여러분을 무엇이라 정의하겠습니까?
마터 테레사/ 삶은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통하여 은혜를 받으십시오.
클로드 베르나르/ 만약 내가 한 마디로 삶의 정의를 내려야 한다면, "삶은 창조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최희준의 하숙생/ 인생은 나그네 길
누군가는 삶의 의미를 분식집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삶은 계란’. 좋습니다. 우리는 인생과 삶을 자신만의 경험과 생각으로 표현할 자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의는 곧 그 사람의 존재를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슬픔’으로, 어떤 이는 ‘기쁨’으로, 어떤 이들은 배신과 고통, 아픔과, 눈물로 고백할 수도 있습니다. 야곱이 바로 앞에서 서서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창 47: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모세의 시편으로 알려진 시편 90편에도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여러분은 이러한 삶의 정의에 동의하십니가?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아도 기쁨보다는 슬픔과 아픔이 더 많지 않을까요. 그러나 한편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랑할 이유가 있고, 소망을 잃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인이 섬겨야할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박완서씨가 있습니다.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분이 쓴 <세상에 예쁜 것>이란 책에 보면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기억도 세월이 연마한 고통에는 광채가 따르는 법이다.”
저는 이 문장을 읽고 섬뜩할 정도의 쾌감을 느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에게 삶에 대한 어두운 기억이 있고, 지우고 싶은 허물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 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라는 후회가 민물처럼 밀려오는 어두운 기억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가, 바로 그 경험이 우리는 연단하고, 정결하게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재방되지 않는 한 편의 드라마라 할지라도, 우리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체 살고 있고, 언제나 낯설고 어색하게 하루하루를 꾸려 나갑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임을 믿기에 오늘도 어설픈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2014년을 추억하고 2015년에 대한 소망을 품어보기를 기대합니다.
1. 성실하신 하나님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나누고 계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오늘 밤이 지나면 유대인들에게 붙잡히고, 로마병사들에게 붙들려 십자가에 죽게 될 것입니다. 14절부터 23절까지는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24-34까지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장면이입니다. 이 만찬이 끝나면 주님은 감람산 기도처로 들어가 십자가를 놓고 기도하게 됩니다. 삶을 정리하는 마지막 순간입니다. 고통과 슬픔이 극에 달해 있을 때입니다. 바로 이 때, 제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24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앞으로 수천년을 이어갈 기독교의 중심축인 열두사도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자고, 걸으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하나도 빠짐 없이 들었고,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고, 자신들 스스로도 놀라운 기적을 행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까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수십년동안 교회를 다니며, 꼬박꼬박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공부도하고, 기도의 체험도 있습니다. 소위 방언도 할줄 알고, 은사의 체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삿대질하고, 비판하고, 자신을 알아 주라고 소리를 높입니다. 한 해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자들과 같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쩔때는 이야기를 꺼낼때마다 고개들기가 부끄러운 일도 행했습니다. 저렇게 멋지고, 온유한 분이 어떻게 그런 일을 했단 말인가? 라며 도무지 믿기지 않는 실수를 한 적도 많습니다. 완벽하고 싶은데 완벽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미성숙한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 자신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타인을 봐야 합니다. 타인의 허물을 보고 비판하지 말고, 그 허물이 나의 모습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또 실패할 것입니다. 그들은 또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갈 것입니다. 절대 도망가지 않겠다는 베드로의 결심을 듣고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입니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심하고 다짐하지만 또 넘어질 것입니다. 내일은 완벽하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년에는 반드시 성경을 3독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 모든 허물과 부족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실 것입니다. 나는 부성실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성실하십니다.
2. 주님을 닮아라.
오늘 본문에는 도치(倒置)된 질서가 나타납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주님께서는 누가 크냐고 우기는 제자들을 향하여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기준을 들려 주십니다. 세상은 섬김을 받는 자가 큽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자가 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둘러서 이야기합니다. 27절 후반부에 보면,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정말 나와 함께 하고 싶다면, 나와 같이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것을 잊어버립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 주지 않고,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 합니다. 남들보다 더 앞서기 위해 소유하려 합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남을 비교합니다. 더 넓은 아파트, 더 좋은 고급 차량, 더 좋은 대학, 좀더 큰 키 등을 내세웁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자랑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뿐입니다. 아무 쓸모없는 인생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점점 더 낮아지고, 점점 더 겸손해 집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남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남들보다 학벌이 낮다고 열등감을 갖는 다거나, 외모가 따라주지 않는 다거나, 좋은 직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끄러워한다면,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세상에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모든 불행은 남들과 비교할 때 일어납니다. 비교야 말로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곳에서 시기심이 나오고, 그곳에서 미움이 나오고, 그곳에서 다툼일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이곳에 과거와 미래가 담겨 있습니다. ‘나의 모든 시험 중에 나와 함께 하’였으니, ‘나도 나라를 너희에게 맡기고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리라.’ 천국에서 큰자가 누구입니다. 이 땅에서 작은 자입니다. 천국에서 존귀한 자가 누구입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스스로 미천한 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저는 여기서 ‘맡겨’라는 단어에 주목했습니다. 보십시오.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부족하고 허물투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제자들에게 맡기십니다. 송사(宋史)'에 나오는 고사성어에 보면, ‘의인불용(疑人不用) 용인불의(用人不疑)’가 있습니다. 의심가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말고, 일단 맡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 는 말입니다. 즉 그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는 맡기고 괜히 의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이 사자성어를 적용시킨다면 아마 아무도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딤전1;12-15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럼 주님을 무엇을 믿고 제자들에게 맡기셨을까요? 그들이 위대함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주님과 함게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함께’에 대한 해석은 존 지지울러스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풀어냈습니다.
“교회는 단지 제도가 아니다. 교회는 하나의 실존 양식, 곧 존재방식이다. ... 이 존재방식은 ... 인간이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타인들, 하나님과의 관계 방식이고, 친교 사건이다.”
풀어내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무엇을 이루어낸 성과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함’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사도의 조건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과 함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가만히 들여다봅시다. 우리는 언제나 얼마만큼 실력이 있고, 능력이 되는가를 따지는 경향이 많습니다. 물론 모든 일에는 자격이 필요하고,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깨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나와 함께 했느냐’입니다. 주님께서 올 해 한해를 지나면서 우리에게 ‘누구냐 넌 2014년을 나와 함께 했구나!’라고 말씀하신다면 이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주님과 함께하기를 발버둥 쳤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몸부림쳤습니까? 문득 제 자신을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주님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좋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이 있는 곳에 몸이 가는 법입니다. 주님과 함께함은 주님의 마음을 품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 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 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 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 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뜻 아버지의 뜻이 될 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 되기를
결론
지금까지 지내온 우리의 삶, 비록 허물투성이고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여전히 성실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이곳까지 왔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부족과 연약함 속에서도 나와 함께했음을 크게 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구약역사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나서 묵상] 1. 1-3 말씀이 임하니라 (0) | 2016.10.11 |
---|---|
뜻밖의 회심 / 행10:44-48 (0) | 2015.06.17 |
[말씀묵상] 은혜는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0) | 2014.12.16 |
[설교] 엠마오의 성만찬 (0) | 2014.11.29 |
요셉의 죽음 (창50:15-26) (0) | 2014.11.0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