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9가지 열매 5)자비(χρηστότης)
자비(χρηστότης)
-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Greek NT: Nestle 1904
- ὁ δὲ καρπὸς τοῦ Πνεύματός ἐστιν ἀγάπη, χαρά, εἰρήνη, μακροθυμία, χρηστότης, ἀγαθωσύνη, πίστις πραΰτης, ἐγκράτεια· κατὰ τῶν τοιούτων οὐκ ἔστιν νόμος
New International Version
- 22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forbeara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23gentleness and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헬라어 원어와 언어학적 의미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자비’로 번역된 헬라어는 χρηστότης(크레스토테스)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친절함’ 또는 ‘선의’ 정도로 번역되기도 하나, 성령의 열매로서의 자비는 훨씬 더 깊고 윤리적이며 신적 차원의 특성을 내포합니다.
χρηστότης는 기본적으로 “선량함”, “부드러움”, “온유한 선함”을 뜻하는데, 단순한 성격적 친절이라기보다 실제적으로 유익을 끼치는 행동, 상대를 살리는 인격적 반응을 포함합니다. 동사형인 χράομαι(크라오마이)는 “사용하다”, “처리하다”라는 뜻을 가지며, 이는 곧 자비가 말로 하는 연민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드러나는 친절임을 보여줍니다.
이 단어는 헬라 문학에서도 긍정적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단순한 도덕적 친절이 아니라 상대의 연약함을 감싸 안고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선하게 대하는 윤리적 품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χρηστότης를 ‘도덕적 선함의 일부’로 보았으며, 스토아 철학자들도 이 덕목을 인간다움의 핵심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의 χρηστότης는 보다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한 자비로서, 단순히 사람의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인간 안에 성령을 통해 구현되는 것을 뜻합니다. 로마서 2:4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χρηστότης)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심”을 말하며, 이 단어를 하나님의 회개를 이끄는 은혜로운 성품으로 사용합니다.
특이하게도 χρηστότης는 때때로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 그리스도)와 발음이 유사하여 초기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성품으로서의 자비를 이 단어와 연결시키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 속에서 드러난 자상함과 인자함, 연약한 자를 거두는 은혜의 태도, 율법보다 사람을 먼저 품는 따뜻한 대응은 바로 χρηστότης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성령의 열매로서의 ‘자비’는 상대를 무너뜨리지 않는 힘, 연약함을 따뜻하게 품는 유익한 선함, 거룩한 친절함으로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친절을 넘어서는 존재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신적인 호의이며, 고통 받는 자를 만나도 판단보다 회복의 눈으로 먼저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성경 본문과 신학적 맥락
갈라디아서 5장은 바울의 윤리적 교훈이 절정에 이르는 장으로, 율법주의자들의 영향으로 혼란스러웠던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자유와 성령의 삶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으며(5:18), 육체의 소욕과 대조되는 삶을 성령의 열매를 통해 명확히 제시합니다. 이 가운데 자비(χρηστότης)는 성령의 열매들 중에서도 공동체와 관계를 유지하고 회복하는 데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사랑–희락–화평–오래 참음–자비…’라는 배열에서 볼 때, 자비는 내면적 인격과 대인적 관계의 경계선에 위치한 열매입니다. 사랑이 전제되고, 기쁨과 평안이 자리잡은 심령은 인내를 통해 현실을 견디게 되며, 그 결과 타인을 향한 유익하고 온유한 반응인 자비가 맺히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비는 성령의 내적 임재가 외적으로 흘러나오는 출발점이 됩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자비는 성령론과 구원론의 접점에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2:4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너를 회개로 인도한다”고 말했을 때, 그 자비는 하나님의 구속적 성품이며, 인간의 회복을 위한 첫 손짓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이 자비가 성령의 열매로 나타난다는 것은, 성령께서 신자의 삶 안에서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시며, 그 성품을 인격으로 구현하는 방식이 자비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후서 6:6에서 하나님의 일꾼의 자격을 말할 때, “자비함으로, 성령으로, 거짓 없는 사랑으로…”라는 표현을 씁니다. 여기서도 자비는 성령과 사랑 사이에 위치하며, 성령의 역사로 사랑이 구체화되는 방식으로서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이 맥락에서 볼 때, 자비는 단순한 윤리적 태도가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자만이 맺을 수 있는 초자연적 성숙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안에서 자비는 율법주의와 정죄의 문화를 넘어서 관계와 공동체 안에 생명과 온유함을 불어넣는 윤리적 핵심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일들을 나열하며 질투, 분냄, 분쟁과 같은 공동체 파괴적 요소들을 지적한 후, 이에 반대되는 방식으로서 자비를 제시합니다. 이는 곧, 자비가 교회를 회복시키는 열쇠이자 성령 공동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태도임을 보여줍니다.
결론적으로, 성경 본문 안에서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이 신자 안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된 첫 번째 외적 열매이며, 성령께서 교회 공동체를 생명력 있게 이끄시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그것은 명령이 아닌 열매로 주어지기에, 인간적 노력으로 흉내낼 수 없는 성령의 인격적 역사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성경 전체 속 자비의 통일성과 흐름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성품 중 가장 지속적으로 강조되는 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자비를 표현하는 단어는 다양하지만, 그 중심에는 ‘헤세드(חֶסֶד)가 있습니다. 헤세드는 단순한 동정이나 친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 신실함, 지속적인 사랑, 실천적 은총을 포함한 풍부한 개념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 백성에게 변하지 않는 충성과 극진한 돌봄을 나타내실 때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시편 136편은 매 절마다 “그 인자하심(헤세드)은 영원함이로다”라고 반복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신실한 자비의 본질이 시간과 상황을 초월하여 영원하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조차 버리지 않으시고, 회개할 때마다 다시 돌이켜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미가서 6:8에서도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인자’는 헤세드이며,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분이 베푸신 자비를 실천적 삶으로 되돌려주기를 원하신다는 윤리적 명령입니다.
신약에 이르러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헤세드의 개념은 ἐλεος(엘레오스, 자비) 또는 χρηστότης(크레스토테스, 친절·자비)로 옮겨집니다. 이 중 χρῆστότης는 단지 감정적 연민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인격적 선의를 뜻하며, 이는 예수님의 삶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죄인과 함께 식사하시며, 외면받은 자들과 함께 하셨던 행동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구체적으로 몸으로 보여주신 행위입니다.
특히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자비를 특별히 강조하는 복음서입니다. 누가복음 6:35에서 예수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너희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인자하심’(χρηστός)은 하나님 아버지의 본질로, 신자들도 그와 같은 자비로 살아가야 함을 명령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 자비를 구약의 ‘헤세드’ 전통 속에서 이해합니다. 바울은 디도서 3:4–5에서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자비가 구원의 직접 동기이며 수단임을 강조합니다. 즉, 자비는 단지 부수적인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 구속사의 중심을 이루는 실천적 속성인 것입니다.
결국, 자비는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일관된 본질이며, 이 자비는 성령을 통해 신자들의 삶 안에 열매로 맺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적 윤리입니다. 그 자비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판단이 아니라 용납으로, 형식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실현됩니다. 자비는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베푸신 그대로, 우리가 누군가를 대할 때 기준이 되는 복음의 마음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자비 – 성화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로서 자비는 단순히 착한 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신자의 내면에 깊이 뿌리내리실 때, 점진적으로 자라나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바울이 ‘열매’라는 농업적 은유를 사용한 것은 자비가 하루아침에 생기는 덕목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씨앗이 심기고, 땅 속에서 조용히 자라나며, 때를 따라 가지가 뻗고, 결국 맺히는 결실처럼,
자비 역시 성령의 역사 아래 시간과 관계, 실패와 용서, 이해와 기도 속에서 조금씩 길러지는 성화의 결과입니다.
신자의 삶에서 자비는 언제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품을 때 비로소 실체를 드러냅니다.
성화의 길은 자신이 의롭다는 착각을 벗고, 오히려 더 큰 자비가 필요함을 인식하는 여정입니다.
처음에는 단지 도덕적 친절함으로 시작할 수 있으나, 성령께서 내면을 다루시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비를 행동으로 베풀기 전에, 자비를 받아야 할 존재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로마서 12:1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비(οἰκτιρμοί, 그러나 의미적으로 일맥상통)는 단지 감정의 유산이 아니라,
신자의 존재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는 결단의 동기이며, 삶의 방식입니다.
자비는 성화의 결과일 뿐 아니라, 성화를 견인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비를 묵상하고 누리는 자만이, 진정한 성령의 자비를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자비의 열매를 맺게 하실 때, 그 방식은 극적이라기보다는 은밀하고 반복적인 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갈등, 공동체 안의 실망, 자주 마주치는 이웃의 실수 앞에서,
우리는 자비의 가능성과 시험 사이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게 됩니다.
성화란 바로 그 시험 속에서 성령께서 우리의 인격을 다듬으시는 과정이며,
자비는 그 과정을 통과한 자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열매 중 가장 온유한 형태의 성결입니다.
그러므로 자비는 선택적 감정이 아니라, 성령이 이끄시는 인격의 완성으로서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자비를 입은 자는 반드시 자비를 흘려보내야 하며,
그 삶의 궤적은 ‘그리스도를 닮아감’이라는 성화의 정수에 도달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로 자비가 등장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자비를 중심으로 성숙해가야 하며,
그 자비는 우리의 윤리적 의지나 도덕성보다 훨씬 더 깊은 성령의 임재의 결과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자비의 특성 – 예수의 삶과 바울의 권면
자비는 단지 마음씨 좋음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윤리적 실천이자 성육신적 태도입니다.
그 자비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인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죄인과 함께 식사하시고,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과 친구가 되며, 심지어 자신을 향해 적대적인 자들을 위해 울고 용서하신 사랑의 실체였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께 향유를 붓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바리새인은 그녀를 정죄하며 외면하지만,
예수께서는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자는 사랑을 많이 하거니와”라고 말씀하시며,
그녀의 슬픔과 회개를 감싸는 자비의 시선을 보여주십니다.
이 장면은 자비가 도덕적 판단 이전에, 관계 회복과 내면적 수용을 위한 신적 개입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자비의 실천이
얼마나 비용을 요구하고, 사회적 장벽을 넘어서는지를 보여줍니다.
강도 만난 자를 도운 사마리아인은 단지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과 돈과 감정을 걸고 상처 입은 타인을 자기처럼 여긴 존재였습니다.
예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하신 그 말씀은,
자비가 선택이 아니라 복음에 응답하는 삶의 방식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비를 가르치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자비 그 자체이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조차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그 자비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의 통로였으며,
성령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자비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비를 교회 공동체의 본질적 덕목으로 강조했습니다.
골로새서 3:12에서 그는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로서
긍휼과 자비,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듯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자비는 단지 개별 행위가 아니라, 신자의 존재 자체를 감싸는 옷처럼,
늘 덧입고 있어야 할 기본 태도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4:32에서 바울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compassionate),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고 말합니다.
이 권면은 자비가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자만이 베풀 수 있는 응답임을 전제로 합니다.
바울은 자비를 인간적 차원의 착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에 참여하는 영적 윤리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삶은 자비의 교과서이며, 바울의 가르침은 자비를 교회의 윤리로 확립합니다.
자비는 감정이 아니라 결단이며,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동정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것을 기억하며 타인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자비는 고통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눈물을 나의 눈물처럼 느끼는 것이며,
그 눈물을 닦기 위해 실제적인 시간과 자원을 나누는 실천입니다.
교회 공동체와 자비 – 약함을 품는 공동체
성령의 자비는 공동체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철저히 공동체적이며, 교회는 성령의 열매가 실제로 관계 속에서 맺히는 장입니다.
그 중 자비는 공동체를 지탱하고 회복시키는 핵심적인 힘입니다.
자비가 없는 교회는, 은혜가 실종된 형식적 종교로 전락하고,
반대로 자비가 살아 있는 교회는 약함과 실패를 감싸 안는 회복의 공간이 됩니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상처 입은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어 가는 병원이며,
동시에 실수와 넘어짐을 반복하는 연약한 자들을 끝까지 품는 가족 공동체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자비는 도덕적 판단을 유보하고,
죄를 정죄하기보다는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며 기다리는 태도를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6:1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은 자비의 정신이 정죄가 아닌 회복과 경청의 태도임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자비는 다른 이의 잘못을 덮어주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돌봄과 진리 안에서의 온유한 중재입니다.
야고보서 2:13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여기서 긍휼은 자비(엘레오스)를 말하며,
이 구절은 자비가 교회의 심판적 분위기를 꺾고, 은혜와 치유의 영성을 세운다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자비가 결여된 공동체는 율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로 쉽게 흘러갑니다.
문제를 지적하되 회복을 고려하지 않고, 상처를 판단하되 치유하려 하지 않으며,
고백을 요구하되 용서를 주지 않는 교회는 결국 사람을 밀어내는 공간이 됩니다.
그러나 자비가 살아 있는 교회는,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다는 겸손과,
그럼에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복음의 품을 유지하는 신령한 집입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13).
이 말씀은 자비가 교회 예배나 제도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훨씬 더 잘 나타내는 본질적 가치임을 말합니다.
자비는 때로는 진리를 유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진리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 인간의 한계를 품는 하나님의 인내를 닮는 일입니다.
자비는 공동체 안에서 약함을 용납하는 힘입니다.
그 약함이 나에게 닿을 때, 우리는 성령께 더 많이 의지하게 되고,
내 안의 교만은 깨어지며, 공동체는 은혜의 질서를 따라 성장하게 됩니다.
자비는 교회의 외형보다 깊은 곳에서,
복음을 설명하지 않아도 복음 자체로 드러나는 공동체의 체온입니다.
묵상과 적용 – 오늘의 신자에게 주는 자비의 실천
성령의 열매로서 자비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용서하셨고 기다려 주셨다는 기억이,
내 삶 속에서 타인을 기다리는 인내로 열매 맺는 일입니다.
자비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태도가 아닙니다.
자비는 나도 연약했음을 기억하며, 그 연약함을 공유하는 십자가적 연대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빠르고 즉각적인 판단과 반응의 문화 속에 살아갑니다.
사람의 잘못을 캡처해 공유하고, 실수 하나로 인격 전체를 평가하며,
사회는 자비보다는 분노와 정죄를 택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자비를 유일한 언어로 말하는 존재입니다.
그는 이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오히려 손해 보며, 기다리며,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는 존재입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반복해서 실수할 때
우리는 훈계보다 먼저 자비의 시선으로 그 아이를 보아야 합니다.
부부 관계에서 상처를 줄 수도, 받을 수도 있지만,
그 갈등의 틈 사이에 자비가 흐르면 가정은 회복의 복음이 머무는 장소가 됩니다.
직장에서, 교회에서, 친구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자비를 택하는 그 순간, 우리는 성령이 주도하시는 ‘복음적 개입’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비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자비는 반드시 자신의 죄를 깊이 경험한 사람만이 흘려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얼마나 큰 자비를 입었는가?”를 묵상할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더 조용하고, 넓고, 깊어집니다.
자비는 큰 소리로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공동체를 살리고, 관계를 회복시키며,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비는 복음 전도의 중요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이 시대는 말이 넘치고 설득이 과잉된 시대입니다.
그러나 자비는 말로 설득하지 않고, 삶으로 감화시킵니다.
자비를 입은 사람은 스스로 복음의 표지가 되어,
타인이 “그 사람을 보니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걸 느꼈다”고 고백하게 합니다.
자비는 가장 조용한 전도이며, 가장 온유한 복음의 외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신자에게 자비는 선택이 아니라 소명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반드시 자비의 사람이며,
자비의 사람은 세상에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붙드는 보이지 않는 다리가 됩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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