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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9가지 열매 4)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ία)

샤마임 2025.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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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그 네 번째 – 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ία)

성령의 9가지열매 네번째 열매인 오래참음입니다. 오래참음은 참고 견딤의 의미를 훨씬 넘어선 소망과 확신에서 의한 것입니다. 이제 성경 속에서, 성령의 열매 의미에서 오래참음이 갖는 다양한 특성들을 잘 살펴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Greek NT: Nestle 1904

  • ὁ δὲ καρπὸς τοῦ Πνεύματός ἐστιν ἀγάπη, χαρά, εἰρήνη, μακροθυμία, χρηστότης, ἀγαθωσύνη, πίστις πραΰτης, ἐγκράτεια· κατὰ τῶν τοιούτων οὐκ ἔστιν νόμο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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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forbeara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23gentleness and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1. 서론: 속도가 신이 된 시대에 ‘오래 참음’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속도’가 신이 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빠름이 미덕이 되고, 즉각적인 반응과 실시간 처리에 익숙해져, 기다림은 낭비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효율을 추구하면서도 점점 더 조급해지고, 자신과 타인에게 인내하지 못한 채 관계를 망치고, 감정을 폭발시키며 살아갑니다. 이런 시대에 “오래 참음”이라는 열매는 매우 비효율적이고 심지어 비현실적인 덕목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오래 참음이요.” 바울은 이것을 사랑–희락–화평 다음에 위치시키며, 인격적 성숙의 핵심 구성요소로 제시합니다. 오래 참음은 고요한 감정이 아니라, 성령께서 맺으시는 능동적 인격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참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포용하며 견디는 거룩한 능력입니다.

 

오래 참음은 한두 번의 참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속적이고 반복되는 실패와 아픔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인내의 품성이며, 성령의 조명과 은혜로 다듬어져 가는 영혼의 깊이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로 사랑의 특성을 시작합니다. 곧, 오래 참음은 사랑의 형태이며, 사랑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도 오래 참아야 하고, 타인에게도 인내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는 현실 앞에서도 믿음의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이 모든 참음은 결코 우리 본성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래 참음’을 성령의 열매로 선언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실 때에만, 우리는 시간의 고통을 견디며 하늘의 때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2. 원어 주해: μακροθυμία (마크로수미아)의 의미와 신학적 깊이

‘오래 참음’은 갈라디아서 5:22에서 헬라어로 \μακροθυμία (makrothymía)\로 쓰입니다. 이 단어는 \‘길다’\를 뜻하는 \μακρός (makros)\와 \‘분노, 감정’\을 뜻하는 \θυμός (thymos)\가 합쳐진 형태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분노를 멀리하다’, ‘오랫동안 노하지 않다’는 뜻이며, 곧 쉽게 성내지 않고 참는 인격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히 감정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진노를 보류하고, 폭발 대신 품음으로 반응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냅니다.

 

신약에서 μακροθυμία는 자주 하나님의 속성으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베드로후서 3:9에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오래 참으사’가 바로 μακροθυμέω(동사형)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오래 참음 위에 이루어졌고, 우리 역시 그 오래 참음 안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로마서 2:4에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희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하며, ‘인자하심, 용납하심, 오래 참으심’이라는 세 가지 단어를 병렬합니다. 이 중 ‘오래 참으심’이 바로 μακροθυμία로, 이는 하나님이 죄인을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자비로운 지체와 기다림을 뜻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6과 골로새서 3:12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성도들이 오래 참음으로 서로를 품고 공동체를 세워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성령의 열매로 맺히는 오래 참음이 단지 감정 조절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품고 견디는 삶의 방식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μακροθυμία는 헬라적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apatheia’와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스토아적 인내는 감정을 죽이는 냉철함이지만, 성령의 오래 참음은 감정을 살아 있는 상태로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거룩하게 제어하는 사랑의 품격입니다. 이는 인간의 훈련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오직 성령의 임재로 맺히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이처럼 μακροθυμία는 하나님 자신이 보여주신 인격이며, 그분의 구속 역사 전체가 이 오래 참음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서, 분노를 늦추고, 판단을 유보하며, 사랑으로 기다리는 인격의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 전체 속 오래 참음의 통일성과 흐름

성경은 하나님을 “노하기를 더디하시는”(출 34:6) 분으로 반복해서 묘사합니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로 ‘에렉 아파임’(אֶרֶךְ אַפַּיִם), 직역하면 ‘코가 길다’, 즉 분노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직접 하신 자기소개입니다. 그리고 구약 전체는 바로 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떻게 죄 많은 백성과의 관계를 지속해 가는가를 보여주는 거대한 증언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반복해서 불순종하며, 우상을 섬기고, 율법을 어기고, 예언자를 죽일 때조차도 그들을 곧바로 멸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셨습니다. 그 인내는 단순한 묵인이 아니라, 징계 속에 담긴 긍휼이며, 경고 뒤에 남겨진 회개의 시간이었습니다. 느헤미야 9:30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여러 해 동안 참으시고… 주의 선지자들로 경고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반복되는 불순종에도 끊이지 않는 언약적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들도 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자주 찬양합니다. 시편 103:8은 “여호와는 긍휼이 많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라고 고백하며, 그 인자하심이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크다고 노래합니다. 이 고백은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없이는 이스라엘은 하루도 존재할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이 오래 참으심의 정점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납니다. 인류가 하나님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기도하시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μακροθυμία는 인격화되고 육화됩니다. 그분은 침묵하시고, 저항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인내하심으로 죄인을 위한 대속의 길을 완성하셨습니다.

 

사도들은 신자들에게 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닮으라고 권면합니다. 베드로전서 2:23은 예수님이 “욕을 당하시되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12에서 성도들에게 “극률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말하며, 그것이 하나님께 택함 받은 거룩한 자의 태도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야고보서 5장은 오래 참음의 구체적인 신앙적 실천을 잘 보여줍니다. 야고보는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약 5:7–8)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은 단지 수동적 인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소망 가운데 현재를 견뎌내는 신앙의 행위입니다.

 

결국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본받아 인내의 사람으로 빚어져 가는 언약 백성의 이야기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오래 참음’은 바로 이 구속사의 흐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감정을 다스리는 기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표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기다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오래 참음 – 성화의 열매로서의 인내

성령의 열매로서의 오래 참음은 인간적 인내나 참을성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서 시간을 견디는 내적 힘, 사람을 품는 영적 깊이, 고통을 넘는 신적 시선으로 빚어내시는 거룩한 열매입니다. 다시 말해, 오래 참음은 성화의 과정 속에서 맺히는 영적 근력이며,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특성입니다.

 

성화란 곧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인격의 성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보여주신 인격의 중심에는 언제나 끝없는 인내와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무지와 배신, 군중의 오해, 지도자들의 음모 속에서도 침묵하시고 참으셨습니다. 그 인내는 결코 약함이 아니라, 사랑으로 인한 자발적 절제와 인격의 통제였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래 참음을 맺게 하신다는 것은, 곧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실질적으로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6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소개할 때, 먼저 “많은 오래 참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교회를 향해 섬기며 고난받을 때, 기적이나 능력보다 먼저 오래 참음이라는 성령의 인격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신자의 성화는 외적 사역보다 먼저 내면의 인내로 드러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성령께서 맺으시는 오래 참음은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영적 자율성입니다. 내가 상황을 제어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이끄신다는 신뢰 속에서 분노를 유보하고, 실망을 견디고, 타인을 품을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믿음 속에서 “나는 기다린다”는 신자의 고백으로 자랍니다.

 

이 인내는 훈련과 함께 자라납니다. 작은 기다림, 작은 침묵, 작은 용서의 반복 속에서, 성령은 우리의 인격을 정결하게 다듬으십니다. 오래 참음은 하루아침에 열리는 열매가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시간’을 필요로 하고,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며, 기도로 깨어 있으며, 공동체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통해 열매 맺게 됩니다.

 

성령께서 맺으시는 오래 참음은 내 안에서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에게 ‘피난처’가 되고, 상처 입은 자에게는 ‘기다림의 공간’이 되며, 공동체 안에서 화해와 회복을 위한 ‘여백’이 됩니다. 성화된 오래 참음은 사람을 살립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하나님의 심판을 유보하시는 사랑의 논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음은 단지 참을성 있는 성격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만이 맺을 수 있는 성화의 증거입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기다려야 하는가? 무엇을 참아야 하는가? 그리고 그 기다림 안에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속에서 오래 참음은 오늘도 우리 안에 뿌리내립니다.


오래 참음의 특성 – 고린도전서, 베드로서, 야고보서 속의 실천

오래 참음은 단지 ‘기다리는 자세’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과 방식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며, 사람을 향한 끝나지 않는 인격적 환대입니다. 성령께서 맺으시는 오래 참음은 피동적 침묵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끝까지 관계를 붙들고, 악을 이기는 선으로 맞서며, 소망의 끝자락까지 사랑을 놓지 않는 능동적 품성입니다. 이러한 특성은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먼저,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μακροθυμεῖ)로 사랑의 성품을 시작합니다. 이는 오래 참음이 단지 사랑의 한 부분이 아니라, 사랑의 시작이며 전제임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쉽게 폭발하지 않으며, 반복적인 상처와 실망 속에서도 상대를 기다려주는 품성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고린도 교회에 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서로를 시기하고 당을 짓고 분열하던 교회에 가장 먼저 필요한 덕목은, 진리가 아니라 인내였습니다. 진리는 말로 가르칠 수 있지만, 인내는 관계로만 증명되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더욱 실천적 차원에서 오래 참음을 강조합니다. 베드로전서 2:19–20에서 그는 부당한 고난을 인내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박해, 신분의 제약, 억울한 손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움이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은 단순히 ‘참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고난 가운데서도 선을 포기하지 않고 행하는 행위적 인내입니다. 성령의 오래 참음은 침묵이 아니라, 선을 향한 집요한 견딤입니다.

 

야고보는 이 오래 참음을 신앙의 본질로까지 끌어올립니다. 야고보서 5:7–11에서 그는 “농부가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는 것”을 비유로 들며,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 인내는 단지 현실을 견디는 태도가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며 현재를 선택하는 믿음의 근육입니다. 야고보는 또한 욥을 예로 듭니다. “욥의 오래 참음을 너희가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욥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놓지 않았고, 결국 주님의 극률과 긍휼하심을 경험했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오래 참음을 단순히 ‘성격 좋은 사람’의 특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래 참음을 복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성령 안에서 맺게 되는 거룩한 인격의 정점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분열로부터 지키는 담장이고,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버팀목이며, 관계의 골짜기에서 사랑을 되살리는 생명의 힘입니다.

 

성령의 오래 참음은 말이 길지 않고, 판단이 늦으며, 반응이 느리지만, 그 느림 속에 하나님의 때가 담겨 있습니다. 조급함은 관계를 파괴하지만, 오래 참음은 관계를 구원합니다. 성령께서 빚으시는 오래 참음은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말 대신 기도하게 하시고, 분노 대신 중보하게 하시며, 단절 대신 기다림으로 사랑하게 하십니다.


교회 공동체와 오래 참음 – 상처를 품는 공동체의 품격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지만 동시에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인 현실의 장이기도 합니다. 각기 다른 배경, 성격, 신앙의 깊이를 가진 이들이 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해와 상처, 판단과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하나됨을 유지하고, 진리와 사랑을 함께 지켜갈 수 있는 이유는 오직 성령의 오래 참음이 그 안에서 역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2에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은 공동체의 덕목 중 하나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 그 자체입니다. 사랑은 쉽게 식을 수 있고, 온유는 상처받기 쉬우며, 겸손은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참음은 이 모든 것을 붙잡아주는 속성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갈등을 견디며, 반복되는 실망 속에서도 형제를 품고 기다리는 시간의 영성입니다.

 

교회가 오래 참음 없이 유지된다면, 그것은 구조나 제도일 뿐 성령의 몸으로서의 생명력은 없습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3:13에서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하라”고 했을 때, 그것은 윤리적 가르침이 아니라 복음적 실천의 중심 명령이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오래 참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나를 오래 참아주신 방식대로 타인을 대하는 것입니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의 오래 참음은 약한 자를 향한 인내, 반복적인 실수자에 대한 은혜, 변화가 더딘 성도에 대한 소망을 포함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를, 성도는 서로를, 교회는 연약한 이웃을 향해 오래 참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형성됩니다. 그 문화는 성령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분위기이며, 외부의 사람들도 그곳에 머물고 싶게 만드는 영적 품격입니다.

 

결국 오래 참음이 있는 공동체는 깊은 상처를 품고도 회복을 꿈꿀 수 있는 장소가 됩니다. 그곳에는 빠른 판단보다 깊은 기도가 있고, 즉각적인 단절보다 기다리는 관계가 있으며, 완벽한 체계보다 성령의 임재가 있습니다. 오래 참음은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생명의 맥이며, 은혜의 그릇이 되는 공동체의 인격입니다.


묵상과 적용 – 오늘의 신자에게 주는 오래 참음의 열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빨리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사랑도, 성숙도, 인정도, 기도응답도 즉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맺고자 하시는 열매는 대부분 시간이 걸리는 열매입니다. 그 중에서도 오래 참음은 단연 가장 길고 느리며, 그러나 가장 깊고 단단한 열매입니다.

 

오래 참음은 감정을 억누르는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며,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내적 순종입니다. 쉽게 포기하고 쉽게 판단하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끝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눈에 띄게 다릅니다. 그는 고요하지만 강하고, 아프지만 따뜻하며, 느리지만 성숙합니다. 바로 그 안에 성령의 오래 참음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 나는 나 자신을 오래 참고 있는가?
– 변화가 더딘 가족과 이웃을 향해 나는 인내하고 있는가?
– 하나님의 약속이 더딘 현실 앞에서도 나는 여전히 그분을 신뢰하고 있는가?

신자의 오래 참음은 자기 의지로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기도 속에서 길러지고, 말씀 안에서 다듬어지며, 공동체 안에서 시험받고 성장합니다. 우리는 이 긴 여정을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음은 자기 수양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겸손의 열매입니다.

 

혹시 지금도 견디기 어려운 사람, 쉽게 해결되지 않는 상황, 반복되는 고통의 시간이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성령께서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성령은 말없이 역사하시고, 침묵 속에서 영혼을 단련시키시며, 열매를 자라게 하십니다. 우리는 자주 포기하고 싶지만, 성령은 우리 안에서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주님, 오늘도 우리 안에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실패한 나를 다시 안아주셨듯이, 나도 타인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나를 기다려주시는 주님을 믿고 순종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의 때에 맺히는 놀라운 열매를 함께 보게 하소서.

 

성령의 9가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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