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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생 기도회 설교-창세기4장, 가인의 저주와 축복

샤마임 2010.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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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저주와 후손

본문

창세기 4:1-17

 

창세기 1장은 창조, 2장은 여자의 창조, 3장은 타락, 4장은 최초의 살인, 5장은 아담의 후손, 6-10장까지는 노아의 홍수, 11장 바벨탑, 12-50장은 족장이야기.......


창세기는 성경의 토라에 속하는 부분이다. 토라는 교훈, 가르침의 의미이지만 유대인들은 일차적으로 모세 오경을 이야기하고 그에 근거한 나머지의 구약을 모두 토라의 영역 안에 집어넣는다.

 

아담과 하와의 작은 불순종이 가지는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이고 무서운가를 실제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창세기 4장의 가인의 살인사건이다. 이 본문 속에는 저는 타락의 의미와 타락으로 인해 인류에게 찾아온 몇가지의 열매들을 찾아 봅니다.

 

1. 찾아 오시는 하나님

우리는 먼저 본문 속에서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풀려가는 가를 본다.


분명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으며, 에덴의 동쪽에 거하게 된다. 이들은 더 이상 에덴동산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성경은 에덴동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화영검 즉 두루 도는 불칼이 지키고 있다고 표현한다. 에덴의 동쪽이라는 소설도 있습니다. 존스타인벡이 쓴 [에덴의 동쪽]은 한 여자를 두고 큰 형과 동생과의 갈등으로 인해 결국 동생을 죽이고 마는 사건을 서술한다. 성경 속에서 동쪽은 저주받은 곳이며, 인간들의 허무한 삶의 영역이요, 이방 족속의 대명사요, 하나님의 징계가 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까 ‘에덴의 동쪽’을 리뷰한 어떤 분은 ‘사람 사는 모든 곳이 다 에덴의 동쪽이다’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창세기 4장에서 충격적인 한 장면을 만난다. 그것은 가인의 살인 사건이 아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저주받은 땅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에덴의 동쪽은 하나님의 저주 받은 땅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고, 아벨의 제사가 결국 하나님께 상달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저주받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사건인 것이다. 지난주 교육국 세미나에서 가르치는 교육, 기르는 교육을 언급했다. 그러나 한가지 빠진 것이 있다. 신존주의 철학에 입각한 교육법인데 바로 ‘만나는 교육’이다. 만남의 사건을 통해 인간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고, 존재를 규명해 나가는 것이다. 범신론이 득실거리는 카오스의 혼돈 속에서 주님은 절대타자로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그리고 우리를 만나 주신다. 절대타자는 만남의 대상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만날 수 없는 타인인 것이다. 샤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표현하면서 궁극적으로 인간은 고독의 존재요, 우연 속에서 멸절해 가는 무의미한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렇게 버려지고 소외되고 고독한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오늘 성경은 찾아 오셨다고 표현합니다. 절대타자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찬양을 받으시고, 예배를 흠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히브리서 11:4에서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라고 표현한다. 믿음으로.... 놀라운 선언입니다.

 

2. 파괴된 공동체의 실존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난다.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역시 형은 동생은 시기합니다. 이스마엘도 그랬고, 에서도 그랬고, 형들은 늘 동생들을 시기합니다. 성경 속에서 형의 존재는 기업을 무를 자로서 나타나며, 권력과 권위자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그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자 동생을 시기한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이곳은 최초의 살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줍니다. 최초의 사람들은 타락하기 전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타락 후 그들은 부끄러워했고 무엇인가로 자신들을 가려야 했다. 이것은 죄로 인하여 관계가 어떻게 파괴되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후에 주님께서 화목제물로 죽으심으로 이방인과 유대인를 화목시키실 뿐 아니라 모든 계급을 철폐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는 사실을 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처음 꿈꾸었던 비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는 표현은 이러한 하나님의 꿈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은 칭찬하고 함께 기뻐해 주어야할 일이 시기하고 분노해야할 일로 변질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함께’라는 공동체, ‘우리’라는 공동체는 무너지고 ‘적자생존’ ‘약육강식’ ‘경쟁자’ 등의 살벌한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을 살게 된 것이다.

 

‘네 아우가 어디있느냐?’라는 하나님의 질문에 가인은 너무나 황당하게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동생을 지키는 존재가 아니며 동생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죄의 파괴력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가인의 고백 속에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인간의 아름다운 가치를 버리고 자신의 욕망과 뜻을 따라 가려는 죄의 지배를 받는 인간의 비참함이 담겨져있다.

죄는 결국, 아무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믿어서도 안되고, 아무도 믿지도 않는 절대고독자로 타자들의 지옥으로 우리의 삶을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3. 저주받은 가인이 이른 곳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결과들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11-12에서 가인에게 준 하나님의 저주는 땅에서 저주를 받으며,

여기서 ‘땅’은 아다마이다. 땅과 격리된 삶, 근본에서 어긋날 삶을 살아간다. 가인이 하나님의 저주-유리하는 저주를 피해 놋땅에 이르러 그곳에 성을 쌓습니다.

놋-유리하다. 방황하다. 이곳에 바로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저주를 막아 보겠다고 생각한 성.. 그러나 그 땅의 이름은 유리하는 곳입니다.

 

로이드존스, 창세기복음 71쪽

죄는 항상 우리를 이런 혼란에 빠뜨립니다.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막고 제멋대로 가는 사람은 혼란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재앙을 자초했을 뿐 아니라 구조의 손길마저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물 앞으로 나아가도 제자리에서만 맴돌 뿐, 목적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섹익스피어는 햄릿의에서....

존재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편이 더 고귀할까

무기를 들고 고통의 바다에 맞서 싸우는 편이 더 고귀할까

 

우리는 영원한 이방입니다.

[벧전]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벧전]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전] 1: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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