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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머레이의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를 읽고

샤마임 2013.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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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예수를 찾다

스튜어트 머레이의 [이것이 아나뱁티스트다]를 읽고



 

예수를 잃었다. 예수를 믿지만 예수를 따르지는 않는다. 신론과 기독론, 인간론과 구원론은 알지만 예수는 모른다. 예수에 관한 설명은 있는데, 예수는 없다. 성경과 예배와 찬양은 있는데 예수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예수를 찾지 않는다. 찾고 싶은 마음도 없다. 불편해 질 테니. 구원의 확신과 불가항력적 은혜와 성도의 견인을 자랑하면서도 그것을 베풀어준 예수는 없다. 참 이상하다. 예수를 찾고 싶다. 어디서 찾아야 할까. 한 책이 나에게 다가 왔다.

 

5년 전, 정확하게 2008년 6월 31일 부산 서면에 위치한 육일 기독교 서점에서 그레고리 보이드의 <십자가와 칼>이란 책을 샀다. 2년 정도를 책장에 묵힌 후 꺼내 읽었다. 그 때의 충격은 말로 표현이 되질 않는다. 읽으면서 마른 침을 삼켰다. 그곳에 분명해 존 하워드 요더가 등장했다. 43쪽이다. 보이드는 요더의 말을 인용했다. “세상 나라의 위에 서는 힘과 하나님 나라의 아래에서 섬기는 힘의 차이는 사자의 힘 대 양의 힘과 같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다른 이의 아래의 두고 다른 이들을 섬기며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부흥 시킨다.” 귀에 쟁쟁하게 울렸다. 그 후의 문장들은 연속적으로 예수를 ‘본’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슴을 멍울지게 한 충격을 5년 동안 잊어 버렸다. 예수를 잊은 것이다.

 

예수를 찾았다. 2013년 9월 20일. 우연처럼 집어든 스튜어트 머레이의 책 안에 잃어버린 예수가 있었다. 각주와 미주에 갇힌 예수의 민낯을 공개했다. 영어 제목에 있는 naked는 ‘솔직함’과 ‘취약함’을 모두 포함한다고 말한다.(53쪽) 그는 이 책을 통해 그동안 비주류에도 속하지 못했던 잊혀진 침묵의 악기 ‘아나뱁티스트’를 소개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회는 위로부터의 관리와 지배, 그리고 강요와 억압의 메커니즘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섬김과 긍휼, 사랑과 상호작용을 통한 순수한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예수쟁이는 예수가 살았던 그대로 살아야 한다. 그동안 오해와 편견으로 바라본 아나뱁티스트에 대한 시각을 교정해 주었다. 그들의 정신과 삶에서 복음서의 예수를 발견한 것이다.

 

크리스텐둠은 복음서의 예수가 아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4세기 이후 교회는 핍박받는 위치에서 핍박하는 자리로 탈바꿈한다. 비주류와 주변부라는 딱지를 떼고 주류와 중심부로 이동한다. 익명의 한 사람이던 예수가 찬란한 후광을 입는 성인이 되었고, 신조와 교리로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고 재단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크리스텐둠이 가지는 위력과 유혹을 교회가 수용함으로 변질되었다고 단언한다.(79쪽) 크리스텐둠의 영향으로 교회는 복음서의 예수를 불편해 한다. 결국 구약으로 눈을 돌려 고대 이스라엘 제도에서 제국을 변호하는 신학을 양산한다.(80) 심지어 신약의 산상수훈도 현재가 아닌 ‘다가올 미래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표현한 것’(81쪽)으로 변질 시킨다. 예수는 믿되(believe) 예수처럼 살(live) 필요는 없어졌다. 그렇게 이어온 중세 이후의 교회는 복음서의 예수를 잃었다.

 

저자가 박사논문에서도 밝힌 대로 아나뱁티스트는 세 가지의 큰 주제를 가진다. 믿음 이후의 대가를 치르는 삶을 요구하는 ‘제자도’, 개념이나 모호한 믿음이 아닌 삶의 모델로서의 ‘그리스도 중심성’, 독단적 해석이나 위임된 합의가 아닌 상호간의 협력과 검증을 통해 화합을 만들어내는 ‘공동체’가 그것이다. 이러한 아나뱁티스트의 성향은 포스트 크리스텐둠 이후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교회가 반드시 감당해야할 시대적 소명을 적절하게 담고 있다. 포스트 크리스텐둠 이후 변화하는 7가지 이동을 들어보자.(116-117쪽)


중심에서 주변으로 이동, 주류 속에서 소수 속으로 이동, 정착자에서 일시 체류자로 이동, 특권층에서 다원성 속으로 이동, 지배층에서 증인으로 이동, 현상유지에서 선교의 자리로 이동, 기관에서 운동으로 이동.

 

예수의 길이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걸었고 살았던 길이다. 완전하지 않지만 순수함을 향해 진심으로 걸어갔던 아나뱁티스트가 고맙다. 오해와 배제로 인해 평탄치 않았던 길이었다. 교회가 배타적 이기주의에 함몰되어 영향력을 상실해 가는 이 시대에 아나뱁티스트는 적절하고도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예수가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저자/역자 : 스튜어트 머레이/강현아  | 출판사 : 도서출판 대장간
판매가 : 11,000원9,900원 (10.0%, 1,100↓)
“여기 한국 교회가 따를만한 모범이 있다”최 봉 기전 침례신학대학교 교수 / 전 미 버지니아 평화교회 담임목사한국 교회의 미래를 염려하는 목소리들이 고조되고 있다. 이구동성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변화의 방향과 내용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선교 신학자 한 분은 변화의 요구 상황을 다루는 개념 선택에서 개혁이냐 대안이냐를 놓고 고심한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개혁은 이미 개신교의 역사적 출발점이었던 만큼 다시 그 개혁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부담스럽단다. 또한,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개혁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해서도 다시금 자신이 없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더보기▶]


*이 글은 대장간에서 출간된 <이것이 나타뱁티스트다>를 읽고 서평한 글입니다. 권위가 무너지고 교회가 혼란한 시대속에서 새겨들어야할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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