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 나타난 시간의 이해
역사 속에 나타난 시간의 이해
시간은 공간을 지배할 수 없다. 다만 타자로서 공존 할 뿐이다.
고대의 순환론적 시간 이해
시간을 이해하는 개념은 역사마다 달랐다. 원시적 인간들은 시간의 개념을 명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대체로 무한한 회전 순환론적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고대 종교에 뿌리는 두고 있는 불교는 윤회를 통해 삶과 시간이 끊임없이 반복된다고 이해했다. 이러한 윤회설은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자연을 통해 얻어진 통찰이다. 특별히 우리나라와 같은 나라은 뚜렷한 사계절의 변화를 통해 봄의 탄생과 여름의 성장, 가을의 열매 맺음과 겨울의 죽음이 반복된다. 가나안의 바알신화 역시 순환론적 시간관에 의하여 죽음과 부활의 반복된다. 자연을 관찰하면 불교의 윤회론적 시간이해가 정당해 보인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도 시간은 역시 무한으로서 존재했다.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 자체는 완전한 시간에서의 불완전한 역사로의 일탈이다. 플라톤이 종종 언급한 '망각'은 궁극적인 세상으로의 회귀를 촉구하지만, 그 답은 에로스라는 시간의 변화를 담보로하는 썩어 떨어지기 직전의 나무다리다. 플라톤의 이데안 사상 안에는 2500년 후에 일어난 실존주의 씨를 가지고 있다. 실존주의는 이데아를 버리고 현실만을 추구한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플라톤 이전에 철학의 이단아였던 제논의 궤변은 시간의 개념을 모호하게 만들어 놓았다. 시간을 마치 무썰듯 분리 가능한 것으로 설정했지만, 그것 역시 궤변론자들과 다르지 않다.
동양의 시간 이해 역시 고대 서양과 별단 다르지 않다. 불교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샤머니즘이나 토테미즘 자체가 시간에 의해 지배되는 구조이다. 자연에서 시간을 찾아내면 끊임없이 반복하는 자연의 무한에서 시간의 무한을 찾아냈다.
근대의 직선론적 시간이해
그러나 이러한 시간의 개념이 소위 계몽주의자들에 의하여 근대의 시간 개념으로 바꾸어진다. 순환론적 시간이 직선으로 바뀐 것이다. 시간이해의 변화는 헤브라이즘의 강력한 영향 때문이다. 창조와 종말이라는 시작과 끝이 개념이 시간에 들어온 것이다. 그동안 시간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한 이었지만 헤브라이즘은 반복이 아닌 반복없는 직선의 개념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시간이 무한 순환에서 직선으로 바꾸어짐으로 철학과 교육, 정치, 과학 모든 면에서 큰 영향을 미쳤다.
1+1=2 라는 단순 논리는 어떠한 것도 이 공식에 대입하면 무지의 시간이나 공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16세기 이후 시작된 근대정신은 먼저 천문학에서 시작되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는 회의적이며 논리적 사고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관찰하여 경험할 수 있는 것을 통해 근대과학의 토대가 놓인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하여 혁명적 우주론이 제시된 뒤 갈릴레이에 의하여 지동설이 관찰되어짐으로 새로운 과학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근대 우주론의 실제적 완성은 케플러에 의해서이다. 케플러는 우주행성의 움직임을 최초로 수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해 냈다.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을 통해 태양계의 행성과 위성을 밝혔다.(참조 위키백과 케플러행성운동의법칙)
1. 행성은 태양을 한 초점으로 하는 타원궤도를 그리면서 공전한다.
2.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적인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항상 같다.
3.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궤도의 긴반지름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케플러의 행성운동 법칙의 발견은 태양계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주요한 수단을 넘어, 과학으로 미지의 공간을 발견하고 추측 또는 예측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뉴턴은 케플러의 행성운동법칙을 응용해 '만유인력의 법칙'을 세웠다. 이제 우주는 더이상 통제 불가능한 미지의 공간이 아니다. 일정한 공식에 대입하면 알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움직임이 시간인 것을 감안한다면, 시간 또한 통제 가능한 어떤 것이 될 수 있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당시나 이후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당시 유행했던 합리주의 사상과 계몽주의를 이끌어 나갔다. 생물학에도 근대 시간의 개념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명석했던 찰스 다윈은 터부시되었던 창조론에까지 도전했다. 창조는 무시간대이다. 그러나 다윈은 이러한 창조론에 의문을 던지고, 수년간의 여행과 관찰을 통해 인간은 '진화'되었고, 계속 진화 되고 있다고 선언했다. 즉 처음과 끝이 있을 것이며, 지금은 과정이다고 선언한 것이다. 고대 신화는 인간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가 다시 무시간적이고 무한의 공간인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했지만, 진화론은 무한의 시간을 배제하고 이 땅에서 시작하여 이 땅에서 마치는 지극히 생물학적 존재로 떨어뜨렸다.
진화론이 미쳐 생각하지 못한 것은 플라톤에게서 이데아를 제거해 버렸다는 것이다. 과학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이나 측정할 수 없는 것은 배제한다. 이러한 하늘의 배제는 경험주의와 실존주의를 낳았고, 궁극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였다. 현대철학의 논쟁은 사소한 것에의 집착이다. 훗설의 현상학이나, 언어철학, 해제주의 등의 미심쩍은 변화들은 관심을 오롯이 땅에만 집착하는 것들이다. 시지푸스의 저주처럼 이땅에서의 배회하는 실존주의는 길 잃은 현대인들의 초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포스트모더니즘은 순환론적 시간개념으로 되돌아간다. 근대와 함께 발흥했던 직선론적 시간관은 근대의 몰락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의 개체중심의 시간이해
포스트모더니즘의 발흥은 시간을 상대화 시키고, 공식이 아닌 상상으로 방법론을 대체 시켰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법칙의 대입이 아닌 상상의 산물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주장은 더욱 분명해 진다. 현대 우주론은 모두가 상상에서 나온 것들이다. 끈이론, 빅뱅이론, 양자역학 등은 상상으로 꿰매어진 자기만의 공식을 만들어 낸 것이다. 토마스 쿤의 책 <과학 혁명의 구조>는 과학이 경험과 지식의 축적을 통해 과학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생겨난 에피소드가 지금까지의 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쿤의 주장은 관점이 다르면(패러다임)이 관찰법이 달라지고, 관찰법이 다르면 결과를 다르게 해석한다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불려진 양자학은 이러한 모호한 상상의 산물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간이해는 자연에서 빌어온 순환론적 시간이해도 아니고, 근대의 직선론적 시간 이해도 아니다. 혹자는 원시적 시간관으로 복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간이해는 자기중심적 시간이해다. 시간을 정의하는 기본 또는 근본 개념은 없다. 오래전 프로타고라스가 말하듯이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 시간의 이해 역시 개체로서의 인간이다. 너의 시간이 있고, 나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수많은 서로 다른 개인의 시간이 존재할 뿐이다.
성경에 나타난 이중적 시간이해
근대의 시간 이해는 헤브라이즘 즉 성경에서 빌어온 시간 이해다. 그러나 엄밀하게 근대적 시간이해와 성경적 시간이해는 다르다. 성경은 영원이 존재한다. 시간 즉 역사는 영원 속에 존재한다.
시간은 영원 안에 존재하며 진행 된다. 영원은 무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개념이다. 시간의 시작과 끝은 영원이다. 시간은 영원에서 시작되고 영원으로 끝이 난다. 성경이 말하는 시간은 순환도 아니고 직선도 아니다. 순환과 직선을 포함한다. 성경은 영원과 시간이 함께 공존하는 이중적 시간관을 가진다. 창조와 종말로 이어지는 직선상의 시간을 크로노스의 시간이라하고, 영원이 시간안으로 침투해 사건(event)를 만드는 것이 카리로서의 시간이다. 실존주의 영향을 받은 칼 바르트의 경우 기적을 영원이 시간으로 침투해 들어와 만나는 접점을 '기적'이라 말한다.
바르트의 이러한 시간이해는 근대정신을 이어받은 독일중심의 신학자들이 기적을 부인하고 예수에게서 신성을 제거하려는 음모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예수는 인성과 신성을 한 인격 안에 오류와 모순 없이 가진다. 그리스도인은 시간 속에 살지만 영원을 살아가는 불명의 존재이다. 부활은 필역의 역사로 운명 지워진 인류의 역사를 영원이 침공한 카이로스이다. 성경의 이중적 시간관은 시간이 영원의 일부이며, 영원 속에 존재한다. 이중적인 시간이해는 절대타자로서의 신을 인간의 시간 안에 초대할 수 있으며, 필연의 역사를 뛰어넘어 영원으로서의 시간을 가능하게 한다.
'일상이야기 > 팡......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장 좋은 성경 번역본은? (0) | 2013.01.30 |
---|---|
고향은 타향이다. (0) | 2013.01.27 |
신앙의 프레이밍 효과 (0) | 2012.11.03 |
진리는 강하다. (0) | 2012.10.20 |
바쁠수록 바르게 가야 한다. (0) | 2012.10.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