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요한일서 강해 3:1~3 하나님의 사랑을 보라

샤마임 2025. 4. 21.
반응형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과 거룩함의 부르심

요한일서 3장 1절부터 3절까지는 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깊고도 감격적인 선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짧은 세 구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신자의 정체성, 그리고 종말론적 소망과 현재의 삶을 연결합니다. 이 본문은 단지 교리적 지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탄, 자녀된 자의 영광, 그리고 그에 합당한 삶에 대한 거룩한 요청이 담긴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신분을 허락하셨는지를 깊이 인식하고, 그 영광에 합당한 삶을 결단하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라

3장 1절은 감탄으로 시작합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여기서 '보라'(ἴδετε, 이데테)는 단순히 시각적 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감탄과 놀라움이 담긴 초청입니다. 요한은 이 놀라운 사실을 듣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깊이 묵상하고 응시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랑’(ποταπὴν ἀγάπην, 포타펜 아가펜)이라는 표현은 헬라어에서 매우 강한 강조를 나타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랑인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고, 위대한 차원의 것임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적 계산과 조건을 초월하는 초월적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결과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τέκνα θεοῦ, 테크나 테우)라 일컬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질적인 신분의 변화이며, 법적 양자가 아니라 본질적 변화를 수반하는 거듭남의 결과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선언했고, 그 약속은 이 말씀에서 성취된 정체성으로 확인됩니다. ‘일컬음을 얻게 하셨다’는 수동형 표현은 이 신분이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요한은 이어서 “우리가 그러하도다”라고 덧붙이며 단지 지위의 선언이 아니라 실제 존재의 상태를 밝힙니다. 우리는 단지 ‘자녀라 불릴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에서 갖는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며, 세상은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이는 세상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3:1 하반절). 이 구절은 신자의 소외와 고난의 이유를 밝혀주며, 동시에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반증한다는 위로를 줍니다.

장차 그와 같을 것이라

2절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미래를 조명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한은 먼저 현재의 확고한 신분을 다시 언급합니다. ‘지금은’(νῦν, 뉘ν)은 시간적으로 현재를 가리키며, 현재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신분이 완전히 드러나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οὔπω ἐφανερώθη, 우포 에파네로데)는 표현은 종말론적 완성의 상태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으로, 지금은 신자의 정체성이 부분적으로 감추어져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타나시면’(ἐὰν φανερωθῇ, 에안 파네로데),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우리는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ὅμοιοι αὐτῷ ἐσόμεθα, 호모이 아우토 에소메타)은 단지 외형적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존재 전체가 영화롭게 되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닮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바울도 로마서 8장 29절에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말하며, 신자의 구원의 목적이 단순한 구출이 아니라 ‘그리스도 닮음’에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다’(ὄψομαι, 옵소마이)는 단순한 육안의 인지가 아니라, 인격적이고 실체적인 대면을 뜻합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고 여겼던 시대를 넘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있게 된다는 영광의 선언입니다. 초대교부 아타나시우스는 이 구절을 언급하며 “하나님을 보는 것이 곧 변화의 시작이며, 하나님을 닮는 것이 곧 영화의 완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지식이 아닌 존재의 변화를 포함하는 희망입니다.

깨끗하게 하는 소망

3절은 이 장의 서론적 부분을 마무리하며 삶의 적용으로 연결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여기서 요한은 종말론적 소망이 단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윤리적 결단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소망을 가진 자'(ἐλπίδα ἔχων, 엘피다 에콘)는 단순히 미래를 긍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소망이 삶을 구체적으로 이끄는 자입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ἁγνίζει ἑαυτόν, 하기니제이 헤아우톤)는 표현은 능동태로, 신자가 자신의 삶을 정결하게 다듬고 죄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자가 취하는 응답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의 방식입니다. ‘깨끗하게 한다’는 동사는 종종 제사적 문맥에서 사용되며, 하나님 앞에 설 준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신자의 삶이 단지 윤리적 수준의 도덕이 아니라, 예배적 차원의 정결함과 준비된 마음을 포함해야 함을 뜻합니다.

주께서 깨끗하신 것처럼 우리도 깨끗하게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라는 비교는 단지 이상적인 기준 제시가 아니라, 성령 안에서 가능한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요한은 신자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자녀된 자들에게 부어주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실현 가능한 거룩함을 요청합니다.

결론

요한일서 3장 1절부터 3절은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 받은 신자의 정체성과 그에 합당한 삶을 분명히 밝힙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우리는 자녀가 되었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구조

 

반응형
그리드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