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와 만나다, 마크 래리모어
욥기와 만나다
마크 래리모어 / 강성윤 옮김 / 비아
누가 감히 욥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다른 성경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욥기는 차원이 다르다. 일단 욥은 유대인이 아니며, 심지어 아브라함 이전 사람이거나 동시대 사람이다. 물론 아브라함의 후대 사람이라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말이다. 문제는 만약 아브라함의 후대 사람이라면 사건은 더 커지고 만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전혀 다른 종족이 하나님을 섬기며, 어떤 면에서는 아브라함보다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기 때문이다. 필자도 욥기를 수십 번을 읽었지만 언제나 답답하다. 물론 정해진 답도 있고, 해줄 말은 있다. 하지만 그런 상식적이고 식상한 대답을 너머 욥기의 실존의 문제로 넘어가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욥기는 지혜서인 동시에 그것이 어떤 지혜인지도 정의 내릴 수 없다. 욥기는 한 마디로 답 없는 답을 준다. 굳이 답을 주지 않음에도 욥기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삶의 고뇌(苦惱)를 풀어낸다. 아무런 답도 주지 못하는 욥기가 왜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답을 주는 것일까? 우리는 이 부분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마크 래리모어의 <욥기를 만나다>는 2013년 <The Book of Job:A Biography>로 출간된 책이다. 종교 철학자이자 현재 뉴스클 대학교 유진 랭 칼리지 교수로 활동 중인 그는 종교를 형식이 아닌 실존적 측면에서 연구하는 학자이다. 우리나라에는 처음 소개되는 저자이다. 솔직히 저자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은 하지만 다른 책도 읽어 보지 못했고, 친분이 없기에 더 상세한 서술을 불가능하다. 일단 책으로 들어가 보자.
필자가 욥기를 읽으면서 가장 곤욕스러웠던 것은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로 끝나고 만다는 점이다. 즉 명확한 답을 얻거나 거룩한 지식을 얻는 것도 없이 상실한 체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욥의 말기에 하나님은 다시 욥을 회복시키시고 복을 주셔서 이전보다 더 많은 부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란 피상적 결론에 도달하는 동시에 그러한 결론 지음에 대해 답답함을 호소한다. 왜냐하면 욥기는 결론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고통을 겪고 살아가야 하는 독자들이 읽기 때문이다. 단지 ‘난 괜찮아질 거야’ ‘지금의 고통이 끝나면 하나님은 큰 복을 주실 거야’라고 위안하기에는 삶이 너무 폭력적이다.
저자는 다섯 장으로 분류하여 욥기를 살핀다. 고대 세계가 바라본 욥기, 욥기가 갖는 논쟁의 화제들, 공연으로서의 욥기, 섭리의 차원에서 욥기를 다룬다. 마지막 5장에서는 섭리의 문제를 실존적 차원으로 끌고 가면서 한 때 욥기가 사람들의 시선에서 왜곡되고 무시되었던 시간을 반추(反芻)한다. 흥미로운 점은 버려진 욥을 통해 욥기가 갖는 실존적 의미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욥는 가장 친했던 친구들에게 오해받았고, 정죄당했다. 결국 욥은 홀로 서야 했고, 설 수밖에 없었다. 버려진 것이다. 저자는 버려진 욥을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우정을 실패했다. 하지만 이로써 욥은 자신의 고통의 근원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며, 그리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구세주를 향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265쪽)
이 책은 결코 가볍게 읽히지 않는다. 또한 과도하게 학자들의 의견을 논쟁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욥기와 관련된 주요한 학자들의 주장들을 간추리면서 자신의 관점으로 재정의하는 방식을 취한다. 가장 독특한 부분은 ‘공연되는 욥기’를 풀어낸 3장이다. 욥의 삶은 하나님에 의해 붕괴되었다. 하나님이 허락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고통에 빠지면 ‘하나님은 왜 저에게 고통을 허락하십니까?’라며 하나님께 저항한다. 욥의 항의는 ‘자신의 삶이 붕괴해 버렸다고 느끼는 이들을 대변’(151쪽)한다는 말은 참으로 옳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욥의 하늘을 향한 부르짖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신정론이 근대적 사상에서 나왔다는 주장에 약간의 현기증이 일어났다. 신정론은 섭리와 작정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섭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즐겨 사용했던 단어였고, 영국의 청교도들이가장 사랑했던 용어다. 저자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한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종교는 신뢰를 상실해 갔다. 독일의 철학자인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이란 단어를 합성해 냈고, 그 뿌리가 근대에 있음을 밝힌다. 하지만 볼테르는 욥기에서 친구들, 아내, 사탄을 제거하고 홀로 ‘신과 대면하는 인간’(190쪽)만을 남겨 둔다. 이후 계몽 시대가 막을 내리고 낭만주의가 찾아오자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경험’(206쪽)으로 정의하면서 욥기를 다른 차원으로 해석하게 했다. 또 다른 낭만주의자인 시인 블레이크는 ‘심상’(223쪽)으로 욥기를 표현하여 영지주의적 성향으로 설명한다.
놀랍다는 말 외에 이 책을 설명할 적합한 단어가 없는 듯하다. 욥기에 관련된 많은 주석과 책을 읽었지만 마크 래리모어처럼 접근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 책 역시 명쾌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아니 못할 것이다. 욥기는 답을 내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욥기는 답을 주지 않고 ‘같이 고민하자’라며 상실과 고통의 연대 안으로 초대하는 듯하다. ‘욥기는 결코 완결될 수 없’(283쪽)는 인간의 역사와 면면(綿綿)히 잇대어 흐른다. 바로 이점 때문에 모든 인간은 철저히 고독한 존재지만 모두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믿게 된다.
책은 강열하다. 철학자들의 논의와 신학자들의 주장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지만 저자의 탁월한 엮음과 재배치를 통해 욥기를 한눈에 그려 준다. 욥기의 내용을 거의 다루지 않는데도 책을 읽고 다면 욥기를 몇 번 읽은 듯한 명료함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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