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별설교] 고린도후서 8장 가난한 가운데 풍성한 연보(捐補)
[장별설교] 고린도후서 8장 가난한 가운데 풍성한 연보(捐補)
8-9장에서는 연보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에서 연보에 대해 잠깐 언급했습니다. 이제 다시 그것을 언급함으로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주의를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사실은 바울이 비방을 받았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연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연보한 것을 바울이 사적으로 사용했다는 비방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바울이 전하는 복음까지 훼손되는 일까지 일어났습니다. 만약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싶었다면 연보 이야기는 당분간 꺼내지 않은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부분에 대해 염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연보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일이며, 심각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8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5절 연보의 원리
ㄱ. 1-7절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
ㄴ. 8-15절 연보의 영적 원리
16-24절 연보를 위한 디도의 사역
1. 1-15절 연보의 원리
1-15절에서 바울이 연보에 대해 두 가지 원리를 제시 합니다. 하나는 마케도냐 지역 교회들이 보여준 연보의 모범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연보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마케도냐 성도들이 보여준 연보의 원리는 무엇일까요? 2절에 보니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후 6:2)
2절을 유심히 읽어보면 문법적으로 잘 맞지 않습니다. 어색하고 이상합니다. 바울이 왜 이런 이상한 문장을 사용했을까요. 먼저 두 의미가 대립되고 있습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과 ‘넘치는 기쁨’이 대립됩니다. 다름은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가 대립됩니다. 이 문장을 다시 현대적 의미에 맞게 의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마케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환난으로 인해 많은 시련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은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 그들은 극심한 가난에 빠져있었지만 더 가난한 교회를 돕고 싶은 마음으로 인해 풍성한 연보를 했다.”
3절에서는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참으로 교회가 배워야할 교훈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 이었음에도 자신들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꺼이 목숨과 같은 소유의 일부를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이라고 말합니다. 마케도냐 성도들은 그것을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5절)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마케도냐 성도들이 헌금을 많이 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위험한 접근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케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린다”
여기서 주목할 단어는 ‘은혜(χάρις)’입니다. ‘은혜(χάρις)’라는 단어는 대개 ‘은혜’로 번역하기는 하지만 원뜻은 ‘선물’이란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χάρις)’입니다. 우리가 가진 영적 은사도 역시 ‘χάρις’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1절 말씀은 하나님께서 마케도냐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그로 인해 마케도냐 성도들이 다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돌려 드린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연보의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래서 본절을 주해한 스캇 하프만 이란 학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케도냐인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은혜는 극심한 곤란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들을 향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극심한 가난’의 상태에서 넘치는 관대함을 보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넘치는 기쁨’을 발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마케도냐 성도들에게 주신 은혜의 근원이 무엇일까요? 9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
바울이 말하고자하는 의미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죄 있는 사람의 형상을 입으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신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고통당하고 멸망 받아야할 죄인들을 위해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대신하여 버리심으로 그들은 구원하시고 부요하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부유하게 되고, 주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고, 주님께서 버림을 당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후에 마케도냐 교회 중의 하나였던 빌립보 교회를 다루면서 다시 언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서 2:5-8절까지의 내용을 읽어 보겠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5-8)
마케도냐 교회인 빌립보교회가 칭찬 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바른 진리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빌립보교회는 자신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더 불쌍한 교회를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소유의 일부를 내 놓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이 원리를 다시 광야에서 내린 만나를 얻은 출애굽 이야기에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니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으니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16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출애굽기 16:17-18을 읽어 보겠습니다.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출애굽기 16:17-18)
연보의 원리를 어떻게 출애굽 당시의 만나 사건에서 끌어올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만나가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내려진 것처럼 신약의 교회가 내는 연보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성도는 언제나 자신이 것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마음을 기뻐하시고 다른 성도를 통해 그가 어려울 때 돕게 하십니다.
2. 16-24절 연보를 위한 디도의 사역
8:16부터 시작된 연보 이야기는 19장까지 한 주제로 묶여진 것입니다. 연보를 다룸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소개합니다. 나중에 우리는 디도서를 통해 디도에게 준 바울의 개인적인 권면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디도가 가진 마음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먼저 디도는 바울의 마음과 같은 마음을 품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교회를 향한 사랑이 동일하게 디도에게도 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바로 하나님께서 온 것입니다. 이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음식에 대한 생각은 다를 수있고, 정치색은 다를 수 있어도 교회를 향한 마음은 동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핏 값으로 사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디도는 자원했습니다. 17절에 보니 그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했다고 말합니다. 우선은 바울의 권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도는 바울의 권함을 뿌리치지 아니하고 기꺼이 자신이 수고하기로 결정합니다. 지금 고린도교회는 어지럽고 다툼 속에 있습니다. 지금 연보 때문에 심각한 오해가 일어난 상태입니다. 이런 어지러움 속에 자원한다는 것은 자칫 자신이 모든 오명을 뒤집어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디도는 물러서거나 피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간절함으로 자원했습니다.
셋째, 디도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였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디도를 향해 ‘나의 동료, 나의 동역자’라고 말합니다. 디도는 한 마디로 바울이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으로 되돌아가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우리의 편지’ 또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온전히 담아낸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디도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도 뿐 아니라 다른 한 형제를 보낸다고 말합니다. 그 디도가 바울을 대리한 사람이라면 한 형제는 마케도냐 교회를 대변하는 교회의 대표와 같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디도는 목사이고, 한 형제는 장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형제 또한 ‘복음으로써 모든 교회에서 칭찬은 받는 자’(18절)이며,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받’은 자입니다.(19절) 적지 않은 학자들은 함께 동행하는 형제가 누가복음을 기록한 의사 누가일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디도 혼자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대표를 보내는 것은 바울 자신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의 깨끗함을 보이고, 헌금을 잘못 사용하지 않음을 드러내려는 의도입니다. 즉 공적인 돈은 모두가 인정할 만큼 명백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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