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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50 강해, 육과 혈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샤마임 2025.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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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과 혈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나니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지 한 사람의 기적이나 초월적 신비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승리임을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0절은 바울이 부활의 실체를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절정의 진술로서, 고린도 교회가 갖고 있던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 가르치는 구절입니다. 헬라철학은 육체를 타락한 껍질로 여기고, 영혼만이 불멸로 승화된다고 보았지만, 바울은 여기서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15:50). 이 한 구절은 신자들에게 있어 부활 신앙의 본질, 구속의 완성, 그리고 장차 올 영광의 몸에 대한 소망을 말해주는 구속사적 요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육과 혈, 유한한 존재의 한계 (15:50 상반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15:50a).

바울은 ‘형제들아’라는 애정 어린 호칭으로 본문의 무게감을 친밀하게 시작합니다. 그는 자신이 전하고 있는 진리가 단지 추상적인 교리가 아닌, 삶과 죽음, 영원에 관한 절박하고도 실질적인 진리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혈과 육’(σὰρξ καὶ αἷμα, sarx kai haima)은 단순히 물리적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는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의 본질을 상징하며, 타락한 인간 본성과 현재의 유한한 존재 상태, 곧 아담 안에서 받은 죄성과 죽음을 지닌 존재 전체를 지칭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오해하고 있었던 헬라철학적 인간관, 즉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이원론을 뒤엎고, 지금 우리가 가진 이 몸 그대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이 구절을 주해하며, "혈과 육이란 단순히 우리 육신이 아니라, 타락한 상태로서의 인간 전체를 의미한다. 그 상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분명히 지적하는 설명입니다.

 

개혁자 칼빈도 이에 동의하며, “여기서 바울은 육체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부패한 인간 본성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받을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고 주석합니다. 칼빈은 이 구절이 물질 자체를 부정하거나 육체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육체가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되어야만 영화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결국 바울은 인간이 지금의 상태, 곧 죄와 죽음 아래 놓인 상태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부활은 단지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전적 변화, 곧 전인격의 영화로운 회복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 전체에 대한 회복의 선언이며, 단지 회피적 구원이 아닌 전우주의적 갱신을 담고 있는 복음의 진수입니다.

 

썩는 것과 썩지 아니하는 것의 대비 (15:50 하반절)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15:50b).

바울은 반복적으로 ‘유업’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헬라어로는 ‘κληρονομέω’(klēronomeō)로, 상속, 곧 아버지로부터 자녀에게 물려지는 권리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단지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자녀들에게 유업으로 주어지는 생명과 영광의 실체임을 강조합니다. 유업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자녀로서, 하나님과 연합된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생명이며, 그 생명은 썩지 않는 본질 속에서만 보존됩니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썩는 것’(φθορά, phthora)과 ‘썩지 아니하는 것’(ἀφθαρσία, aphtharsia)을 대조하며, 본질이 다른 두 존재 상태를 설명합니다. 지금의 우리는 썩는 존재, 즉 부패하고 쇠잔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상태에 있으며, 이 상태로는 결코 부활의 영광, 곧 ‘썩지 아니함’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부 이레네우스는 『이단 반박』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며, “육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지만, 타락 이후 썩는 몸이 되었고, 이 몸은 반드시 부활을 통해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부활의 실체가 단지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썩는 육체가 썩지 않는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는 창조의 회복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루터 역시 부활에 대해 설교하면서 "이 땅의 육은 부패할 수밖에 없고, 그 자체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이 부패한 육을 들어 영화롭게 변화시키신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부활이 단순히 미래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견뎌야 하는 고난의 이유요, 성도의 위로가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썩는 것과 썩지 않는 것 사이에 놓인 구속사의 간극을 연결하는 다리를 그리스도의 부활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동일한 길을 따라 썩지 않는 몸으로 변화될 수 있음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단지 신학적 가설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통해 확증된 현실입니다.

 

부활의 조건, 변화를 입는다는 것

이 구절은 바울의 다음 논지, 즉 변화(transformation)의 필요성과 직결됩니다. 부활은 단지 과거로의 복원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질로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혈과 육으로 태어났고, 그 결과 죄와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창조됩니다. 이 창조는 단지 내적인 경건의 회복이 아니라, 존재 전체의 변화이며, 몸의 영화로운 전환을 포함합니다.

바울은 뒤이은 51절 이하에서 그 구체적인 방식으로 ‘호련히’, ‘눈 깜짝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에’라는 표현을 통해 이 변화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순간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선포합니다. 이는 인간이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초자연적 변화이며,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구속의 결실입니다.

 

교부 아타나시우스는 이 변화에 대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 자신만의 사건이 아니며, 그의 몸 된 자들에게도 동일한 변화를 약속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신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죽음을 변화시키신 분이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변화는 또한 우리의 정체성, 소망, 그리고 신앙의 방향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단순히 지금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으로의 이행을 전제하며, 그 이행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칼빈은 더 나아가 “이 변화는 성도의 최종적 입양이며, 영화로운 신분의 획득이다. 이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얻는 최대의 복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혈과 육은 부활의 생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만 참된 상속자가 됩니다.

 

이 변화는 교리적인 선언이 아니라 실천적인 진리입니다. 성도는 오늘 이 순간부터 부활의 실체를 믿고, 그것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의 삶은 지나가는 것이며, 장차 올 영광의 삶을 준비하는 경건의 연습입니다.

 

결론

고린도전서 15장 50절은 바울이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부패성, 그리고 구속받은 존재의 영광스러운 본질을 명확히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혈과 육’은 단지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죄 가운데 놓인 존재 전체를 의미하며, 이 상태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도 썩지 않을 몸, 유업을 받을 수 있는 변화된 존재로의 전환이 약속되었습니다. 이 부활의 약속은 단지 미래의 환상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존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지금 이 순간부터 하늘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주일인 오늘,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향해 가는 순례자로서 현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형상을 따라 변화되어야 하며, 종말에 주어질 그 신령한 유업을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부활은 죽음을 넘어선 위로이며, 무너진 몸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믿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기 위하여,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변화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이며, 이것이야말로 죽음을 이긴 생명의 길입니다.

고전 15장 구조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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