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읽기]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하나님의 사랑>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하나님의 사랑>
*이 글은 마이트웰브(국민일보)에 기고된 글입니다.
1. 들어가면서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만민의 구주 예수의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있는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찬송가 85장의 가사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찬양입니다. 그런데 혹시 이 찬양의 작사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찬송가 상단 왼쪽에 작사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이 ‘Bernard of Clairvaux’로 되어 있습니다. 번역하면 클레르보의 버나드입니다. 이 찬양은 버나드 즉 베르나르가 쓴 192행의 라틴어 시인 ‘예수의 이름에 붙이는 노래’를 영국 찬송 작가인 에드워즈 케스월(E. Caswall; 1814~1878)이 발췌해 번역한 것이며 다이케스(J. B. Dykes, 1866)가 곡을 붙여 완성된 것입니다. 아래의 글은 이 책을 번역한 은성출판사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음미하며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여 당신을 생각만 해도
달콤함으로 나의 가슴이 가득하나이다.
그러나 더욱 달콤한 것은 당신의 얼굴을 보는 일
당신의 임재 안에 안식하는 일입니다.
목소리로 노래할 수 없고, 마음으로 말할 수 없고
기억으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복되신 이름보다 더 달콤한 것을,
오 인류의 구주시여!
오, 회개하는 모든 심령의 소망이여
오, 모든 온유한 자들의 기쁨이여
타락한 자에게 당신은 얼마나 자비하십니까!
구하는 자에게 얼마나 선하십니까!
-베르나르 (찬송가 85장)
베르나르의 고백은 ‘은혜롭다’는 표현보다는 ‘감미롭다’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늘의 평안을 체험하게 합니다. 베르나르는 85장 외에도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과 262장 ‘날 구원하신 예수님’도 작시했습니다. 멜로디를 넣어 찬양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가사를 음미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262장 4절 가사는 체험적 신앙이 아니면 고백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 사랑 못 잊어 나 항상 눈물 흘리네 이 세상 어디 가든지 나 주만 생각합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중세 신비주의 신학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이성적인 인식을 넘어 신비의 체험을 통해 만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오늘 함께 나눌 <하나님의 사랑>은 베르나르의 가장 중요한 저서입니다. 간략하게 요약정리하면서 베르나르의 신비주의 신앙을 맛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책은 엄성옥이 번역하여 은성출판사에서 출간한 것입니다. 직접 번역은 ‘ ’나 “ ”를 사용하였으며, 자의적으로 요약한 것은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책이 전반적으로 요약하기 쉬운 책이 아닙니다. 필요한 부분을 요약하고 중요한 부분은 직접 발췌했습니다.
2. 책의 구조와 요약
이 책은 제임스 M. 후스톤이 베르나르의 사상을 정리하는 수준에서 서문을 기록했습니다. 후스톤은 베르나라의 신학을 서문의 소제목에서 보여주듯 다섯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실존적 경험,
2. 사랑의 일차적인 중요성,
3. 성경적인 성경 이해,
4. 참된 인간성의 기초:성경적 인간학,
5. 영적 우정.
베르나르뿐 아니라 중세의 신비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경험’입니다. 어거스틴이 ‘알기 위해 믿는다’라고 말했다면, 베르나르는 앎의 궁극적인 방식이 ‘경험’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고, ‘나는 경험하기 위해 믿는다’고 말합니다. 베르나르에 의하면 신앙은 경험되는 것입니다. 베르나르의 주장은 근대 후기에 일어난 오순절 성령 운동이나 18세기 부흥운동도 17세기 경건주의 운동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1부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선 영혼의 고귀함’이란 제목을 가지고 사람의 ‘영혼’이 무엇인지를 다룹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람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존재 방식을 갖는지를 밝힙니다. 3장에서는 ‘은혜와 자유의지’라는 화두를 가지고 상세하게 다룹니다. 2부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위대함’이란 주제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어떻게 관상해야 할 것인가를 다룹니다. 2부는 이 책의 핵심이자 주제입니다. 6장에서 베르나르의 신비주의 사상의 정수를 담은 사랑의 네 단계를 소개합니다. 3부에서는 ‘그리스도께 드리는 헌신’이란 제목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을 논합니다. 마지막 4부 ‘영적 우정’에서는 책의 부록이자 결론에 해당하며 영적 우정이 갖는 독특성을 설명합니다.
제1부 하나님 앞에 선 영혼의 고귀함
하나님을 기억하고 묵상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세 가지 기능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기억에 의해 회상하는 것이고, 둘째는 기능인 이해에 의해 분별한다. 셋째는 기능인 의지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포옹한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고, ‘기억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발견한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의 대상이시다.” 하나님은 백성들을 자신의 전으로 삼으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우리는 평화를 갈구하고 진리를 묵상하고 자비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조심스럽게 표현해야 한다.”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기억, 이해, 의지라는 능력이 존재’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은 우리의 예배와 모방이다.’ 하나님을 모방하여 닮아가는 것이 최고의 영광 돌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죄악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은 ‘비열하고, 나약하고, 변덕스럽고, 부패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단단히 부여잡아야 한다.
영성 생활에는 세 단계가 있다. 가장 먼저는 동물적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이성적 단계이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영적 상태이다. 동물적 단계에서는 ‘감각이 지배하는 삶’이다. 자신의 욕망과 쾌락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적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갈 때 단순성을 갖게 된다. 묵상과 거룩한 독서를 통해 영성 훈련을 해야 한다. 두 번째 단계인 이성적 상태는 동물적 상태에서 약간 진보한 것이다. 외향적인 덕을 추구하고, 영성을 추구하는 단계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거룩을 닮아야 하고 하나님처럼 복된 삶을 살아가려고 발버둥 쳐야 한다. 마지막 영적 상태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 사람의 모든 사고(思考)의 중심을 차지한다. 하나님의 선한 것들로부터 시작된 사상은 지성이 되고, 사랑이 된다. ‘사상에 대한 이해는 사랑에 대한 묵상’이다. 결국 하나님을 닮게 되며, 인간의 완성 단계에 이른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자유의지는 ‘구원받기 위한 것’이다. “자유의지라는 기능은 구원의 유일한 주체이다.” 하나님만이 구원의 주체이시며,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동물적 욕망은 자유의지가 아니다. 동물적 욕망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도 모른다.’ 자유의지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분명하고도 습관적인 영이다. 의지가 없다면 동의도 없다.
인간에게는 ‘본성’ ‘영광’ ‘은혜’라는 삼중적 자유가 있다. 본성은 곧 ‘죄로부터의 자유’이고, 영광은 ‘비판으로부터의 자유’ 은혜는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러한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해결된다. 악한 의지는 악마에게 속한 반면, ‘선한 의지에 순종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할 수’ 있다. 악마는 인간의 의지를 통제하여 자신의 노예로 만든다.
“죄는 자유의지를 제거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별력을 상실했다. 비록 의지의 능력을 손상되지 않았으나 참된 지혜와 실질적인 도덕적인 능력을 잃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다시 회복된다.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의 은사이다. 인간에게 있는 선은 자신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온 것이다.(참 약 1:17) 구원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인간이 행하는 선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결국 하나님을 선택하는 선한 의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현대 개혁주의 신학과 상이한 부분을 발견합니다. 칼빈과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전적 타락했으며, 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했습니다. 중세의 신학 자체가 베르나르 사후에 급진적으로 인간적 공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왜곡되는 토양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핀 토마스 아퀴나스는 베르나르의 후대 사람으로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는 쪽으로 의지의 자유를 설명해 나간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베르나르의 주장 자체만으로 인간의 공로로 구원을 살 수 있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은 현대의 개혁 신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제2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과 위대함
사랑은 가장 뛰어난 예술이다.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육체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고, 영혼은 하나님께 와서 하나님께 돌아간다. 그러나 범죄 한 영혼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 또한 육욕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 사랑의 근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거룩한 모임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들 속에 함께 거하신다. 거룩한 모임에는 영적 가르침이 필요하고, 기도와 정화의 순서가 필요하다.
사랑은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머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더욱 열망하기에 이른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퇴보하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남용하며, 육적 욕망을 따른다. 그러므로 사랑은 노력이 필요하고, 이성적인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사랑에는 오감이 있다. 촉각, 미각, 후각, 청각. 그리고 시각이 있다. 이것은 비유인데 육체는 오감을 통해 존재할 수 있듯 사랑도 마찬가지다. 성도는 하나님은 만지고, 맛보고, 맡고, 듣고 본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맛’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맛보고, 체험(맛) 하고, 말씀을 듣고, 보게 된다.
[베르나르의 사랑의 네 단계]
사랑의 1단계 : 사람은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한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자신을 사랑한다. 이것을 이기적 사랑이라 한다.
사랑의 2단계 : 인간은 자신의 축복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자신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자신의 축복을 위한다는 점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단계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전환기라 할 수 있다.
사랑의 3단계 :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영적으로 높은 단계의 사랑이다. 하나님과 교제할 때 하나님을 맛보게 되고, 그로 인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임을 알고 사랑한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사랑하는 이유다.
사랑의 4단계 : 인간은 하나님은 위하여 자신을 사랑한다.
다시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목적과 이유가 다르다. 이것은 이기적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다움이다. 자신을 죄에 방임하거나 불의의 병기로 사용하지 않는다.
제3부 그리스도께 드리는 헌신
[3부는 아가서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베르나르의 아가서 설교를 다룰 때 함께 다루겠습니다.]
제4부 영적 우정
[이 글은 1125년경 티에리의 수도원장이었던 윌리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윌리엄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나눈 대화 형식의 글입니다. 또한 다른 몇 수도사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글입니다. 일관성 없는 서신들이기 때문에 요약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문장을 발췌하겠습니다.]
“사랑이 사심 없는 열심을 영혼 안에 채울 때 영혼을 회개시킬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우정은 탐욕이 가득한 눈과 밖을 향한 귀에서 시작됩니다.”
“영적인 우정에는 이익이라는 동기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체의 품위를 위하여 갈망됩니다.”
“동등성은 참된 우정의 특성입니다.”
“인류에게 있어서 우정이 없는 어떠한 행복도 거의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숙한 영적 우정은 순수한 동기들을 보존하는 일로 시작됩니다.”
“당신의 친구를 영혼의 동료로 삼으려면 ... 서로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정에 특권으로 주어지는 열매는 친구를 신뢰하고 자신을 위탁할 수 있는 안정성입니다.”
“우정을 특징짓는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애정, 안정, 그리고 행복입니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우정은 지속되지 않을 것입니다.”
3. 나가면서
중세 신비주의가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사의 큰 흐름을 ‘문자와 성령’이란 두 기둥으로 해석한다면 신비주의는 ‘성령’에 가깝습니다. 문자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교회사는 설교와 신학, 성경해석에 관련된 관점이며, 교리를 세우고 체계를 세우는 과정 속에서 강조됩니다. 반대로 성령 중심의 해석은 교리화로 인해 교회가 화석화되고 역동성과 생명력을 잃었을 때 성령 운동이 일어나는 것에 주목합니다. 오순절 부흥 운동과 주기별로 일어나는 대각성 운동은 성령에 중심을 두고 교회사를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두 주제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거나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운동이 일어나면 기도와 찬양만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읽기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교와 부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입니다. 그럼에도 두 주제는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교회를 흐름을 살펴보면 문자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가 균형이란 중심에서 파동처럼 이동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중세 신비주의는 성령 운동에 가까우며, 하나님을 관상하고 영적으로 체험하려는 영적 갈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 신비주의를 이해하면 이후에 일어나게 될 영적 대각성 운동의 특징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종교개혁도 대각성 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18세기 웨슬리와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운동, 찰스 피니의 부흥 운동 등도 중세 신비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거스틴과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차갑게 이해하려는 시대가 있는 반면, 필립 슈페너의 경건주의 운동이나 존 웨슬리의 부흥 운동처럼 감성적으로 뜨겁게 하나님을 체험하려는 운동이 일어나는 시대가 있습니다.
중세 신비주의는 경건주의나 부흥 운동과 맥을 같이하면서 지성을 넘어 감성과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성향입니다. 감성적 하나님 이해는 위험하지만 풍성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르나르의 시와 설교들은 이러한 장단점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중세 신비주의는 중요한 신앙의 해석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베르나르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교리적으로 혼돈스럽고, 개혁신앙의 관점으로 볼 때 억지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의 신앙관은 인간의 내면과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려는 열정은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세속 주의에 물든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신앙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으로 삶으로 실천할 때 생명을 갖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중세 신비주의는 약간의 오류를 갖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열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저자/역자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엄성옥 | 출판사 : 은성 판매가 : 16,000원 → 14,400원 (10.0%, 1,600↓)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루터와 청교도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베르나르의 대표작품!클레르보의 베르나르,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불타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의 영성은 살아 있었고 중세 교회사에 있어서 그가 미친 감화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활, 그 사랑을 친히 실천하는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본서는 베르나르가 하나님의 사랑을 주제로 행했던 여러 가지 설교 및, 친구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면서 교환한 서신들을 발췌한 것이다.[더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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