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고전읽기] 중세의 신비주의를 열었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중세의 신비주의를 열었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090 – 1153)
*이 글은 마이트웰브(국민일보)에 기고된 글입니다.
1. 들어가면서
지금까지 저는 중세 교회 안에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몇 사람을 살펴봤습니다.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자이면서 철학자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다른 듯 같은 맥락을 가진 인물입니다. 이곳에 둔스 스코투스라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인물과 생애도 간략하게 다루었습니다. 필자에게 둔스 스코투스는 철학사에서 이름과 간략한 사상을 접했을 뿐 실제로 그의 책을 읽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름에 걸맞게 그의 주장은 대략적인 내용은 쉬워 보이지만 세세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이해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세 사람 외에도 많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있지만 개신교인으로서 더 많은 인물과 자료를 접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 다룰 인물들은 철저히 중세적인 인물들로 철학과 신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신비주의 인물들입니다. 중세를 연구하면서 교황과 교회의 타락, 철학과 신학, 수도원과 신비주의는 빼놓을 수 없는 주제입니다. 이제 중세의 신비주의를 다룰 차례입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보나 벤투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요한 타울러 등의 신비주의 대표 학자들의 책을 간략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중세의 신비주의 신학자들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최근에 일어나는 다양한 영성과 신학의 흐름이 중세의 신비주의를 닮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이 근대의 시작과 합리적 사유의 결과물이라면 중세의 신비주의는 초월과 영성, 부흥과 성령 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잘못된 신앙관도 중세의 신비주의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중세의 신비주의를 살피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해야 할 것은 취해 성경이 원하고 말하는 바른 신앙생활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생애와 중요한 사상을 소개합니다.
2.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의 생애와 사상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부르는 호칭이 상이(相異) 합니다. 가톨릭 안에서도 라틴식으로 베르나르로 부르고 개신교 안에서는 영어식으로 버나드로 부릅니다. 비록 버나드가 익숙한 발음이지만 중세 인물인 것을 감안하여 베르나르로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이름 앞에 ‘성’(St)을 넣지 않겠습니다. 현재 베르나르의 생애를 기록을 한 책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베르나르를 번역한 은성 출판사에서도 베르나르의 생애를 서두에 첨가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점으로 남습니다.
베르나르는 1090년 프랑스 디종 근방인 폰테인에서 6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납니다. 아버지인 테셀링은 1차 십자군 원정에 출정하여 전사하고 어머니도 베르나르의 17살 때 숨을 거둡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의 죽음으로 베르나르는 큰 충격을 받고 세속적인 관심에서 멀어지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을 갖게 됩니다.
21세가 되었을 때 버간디 공작과 함께 전쟁에 참여 중인 형제들을 찾아갑니다. 폐허가 된 어느 교회에 들어가 기도하다 하나님을 만나는 극적인 체험을 하게 되고, 평생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결국 23세에 모든 세속적인 생활을 청산하고 알고 지내는 귀족 자제들 서른 명과 함께 시토 수도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시토 수도원은 타락의 절정을 이룬 교회와 수도원이 초기의 베네닉토 수도원 정신을 돌아가야 할 것을 주장하는 개혁의 선두였습니다. 그들의 법은 철저하고 엄격했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갔습니다. 과도한 엄격함은 적지 않은 사람들을 수도원을 떠나게 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습니다. 베르나르는 시토 수도원에 들어가 누구보다 엄격하고 과도한 금식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몸에서 거죽만 남을 정도로 금식을 즐겨 했고, 고행을 자처했습니다.
1115년 시토 수도원장이었던 스테펜 하딩이 베르나르는 클레르보로 파견되어 수도원을 원장이 되어 그곳에서 38년간 머물며 나머지 일생을 보냅니다. 그는 그곳에서 기존의 수도원들이 수사만을 위한 구별한 교육방식을 추구한 흑의 수도사(black monks) 방식을 버리고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한 백의 수도사(white monks) 방법을 채택합니다. 그의 의도는 수도사만을 위한 수도원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수도원의 목적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수도사가 되기로 한다면 일정한 훈련 과정을 통해 허락해 주었습니다. 당시로는 생각하기 힘든 파격적인 조치였습니다.
수도원에 제발로 찾아온 사람들뿐 아니라 거리에 나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의 언변이 얼마나 탁월했던지 베르나르의 말을 듣고 수많은 남성들의 자원하여 수도원에 들어가자 아내들은 남편을 숨기고 자식들을 감추는 일까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가 있는 동안 클레르보의 수도원은 160개의 분원을 가질 정도로 번창합니다. 시토 수도원이 343개에 비하면 그의 절반이 베르나르의 열정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그의 영향력을 갈수록 커져 아나클레투스 3세와 이노센트 2세가 교황직을 놓고 대립했을 때 이노센트를 교황에 자리에 오르게 합니다. 또한 제자였던 유게니우스를 교황의 자리에 오르도록 돕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권력과 제안을 거절하고 클레르보의 수도원 원장으로 지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수도원 원장으로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을 소명으로 알았습니다. 2차 십자가 전쟁을 유게니우스 교황이 준비하면서 베르나르에게 순회 설교를 부탁합니다. 그는 십자군 전쟁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으로 보고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전쟁터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십자군은 크게 패하게 됩니다. 그는 모든 잘못이 자신에게 있음을 시인하고 사죄하기도 했습니다.
3. 클레르보의 중요한 사건과 사상에 대한 평가
클레르보의 생애를 자세히 기록한 책이나 자료가 한국에는 없기 때문에 그의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토막글로 된 그의 생애의 파편들을 끌어모으면 몇 가지의 사건과 사상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1)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와의 신학 논쟁
라틴어 이름은 페트루스 아벨라르두스(Petrus Abaelardus)였던 그는 스콜라의 철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는 중세의 보편 논쟁을 주도했고, 유명의 일부를 거절하면서 수정하여 수용합니다. 그가 말하는 보편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추론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 보편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의 결과물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결국 하나님의 실체와 삼위일체 등의 성경적 교리를 파괴하게 됩니다. 베르나르는 그의 논쟁을 통해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하고자 했고, 하나님은 철학적 사변으로 이해되는 존재가 아니라 ‘경험’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1140년 상스종교회에서 아벨라드는 파문하기에 이릅니다.
2) 성전 기사단 설립 (1128)
그의 치명적인 실수의 중의 하나는 십자군 원정을 지지한 것과 그로 인해 잘못된 신학적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의 과도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성경적이지 않았고, 기록된 말씀의 한계를 넘는 오류를 남기고 말았습니다. 그는 문하생이었던 유게니우스가 교황이 되자 더욱 유명세를 치르게 됩니다. 유게니우스 교황은 베르나르를 설득해 십자군 전쟁 참여를 위한 순회 설교를 부탁하게 됩니다. 베르나르는 십자군 전쟁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기뻐하는 일이라 확신하며 기꺼이 동참합니다.
불행하게 베르나르는 십자군 전쟁을 하나님을 향한 성전(聖戰)으로 개념으로 확대해석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십자군에 참석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보장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십자군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확증이자 표시라고 말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동참하게 했습니다. 그의 잘못된 가르침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었고, 비합리적 신앙이 갖는 위험성을 보여줍니다.
3) 마리아 숭배 사상
또 하나의 잘못된 교리는 마리아를 숭배하도록 이끈 점입니다. 베르나르는 마리아를 일반 사람이 아닌 신의 자리에 올려놓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제롬으로부터 시작된 성모 마리아 숭배 사상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더불어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죄 탄생을 옹호하기 위하여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도 무죄해야 한 것이 중심 내용입니다. 그들의 마음과 열정은 높이 살만하지만 성경이 가르치지 않고 부정하는 것을 교리로 만들어 숭배하는 매우 위험한 일인 것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4) 수도원과 교회의 개혁
앞선 세 가지는 베르나르의 부정적 측면이라면 긍정적 측면도 적지 않습니다. 가장 먼저는 그의 개혁의 선두주자였습니다. 수도원과 교회가 타락의 극치를 보였던 시기에 거룩과 금욕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공동생활을 주장했고, 성경의 진리는 일부의 특정 소수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것임을 주장합니다. 수도원의 문을 활짝 열고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교육하고 지도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5) 이신칭의
이신칭의는 루터의 전유물처럼 보이지만 어거스틴과 베르나르에게서도 강조됩니다. 다음에 살펴본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자유의지의 문제가 강조됩니다. 어거스틴과 적지 않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사람의 행위보다는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방점을 찍음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소논문입니다. 이러한 이신칭의의 교리는 앞으로 일어나는 중세 신학의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도래한 종교개혁을 미리 준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그의 신학은 단순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사랑’과 조화를 이루게 함으로 개신교의 종교적 경건주의를 표방하는 교회 개혁의 중요한 사상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릅니다. 특히 그의 체험적 진리에 대한 개념은 교회사에 끊이지 않고 일어났던 부흥운동과 성령운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철저한 칼빈주의자도 성경을 따랐던 조지 윗필드나 조나단 에드워즈, 심지어 요한 웨슬레 등의 부흥 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루터의 경건주의 청교도의 하나님 사랑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베르나르의 ‘하나님 사랑’ 개념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베르나르의 성경에 대한 이해와 묵상법들은 앞으로 다가올 체험적 신앙과 이성을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4. 나가면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버나드)를 중세 신비주의 대표주자나 창설자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신비주의는 이미 초대교회 시대 유대교로부터 물려받은 전승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수도원 역시 초대교회로부터 이미 있었습니다. 하지만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이전과 이후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베르나르 이후 보나 벤투라와 에크하르트, 요한 타울러 등은 베르나르에게 음과 양으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나르는 중세 신비주의의 포문을 연 사람으로 불러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이 말하지 않은 잘못된 교리를 만들어 내거나 교회가 더욱 타락할 수 있는 신학체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마리아에 대한 잘못된 신앙과 십자군 전쟁 참여가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등의 주장들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위대한 경건의 사람이요 개혁자였지만 베르나르 역시 시대의 아들인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현재의 삶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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