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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9가지 열매 6)양선(ἀγαθωσύνη)

샤마임 2025.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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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선(ἀγαθωσύνη)

  •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Greek NT: Nestle 1904

  • ὁ δὲ καρπὸς τοῦ Πνεύματός ἐστιν ἀγάπη, χαρά, εἰρήνη, μακροθυμία, χρηστότης, ἀγαθωσύνη, πίστις πραΰτης, ἐγκράτεια· κατὰ τῶν τοιούτων οὐκ ἔστιν νόμο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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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forbeara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23gentleness and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헬라어 원어와 언어학적 의미

‘양선’은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성령의 열매 중 여섯 번째로 등장합니다. 헬라어로는 ἀγαθωσύνη (agathōsynē)이며, 이 단어는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드물게 사용되며, 신약 성경 안에서 특별히 바울이 자주 사용하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선함’을 뜻하는 ἀγαθός (agathos)에서 파생된 추상명사형입니다.

 

ἀγαθός는 고대 헬라어에서 매우 일반적인 단어로, ‘좋은’, ‘선한’, ‘유익한’, ‘바람직한’ 등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철학자들에게 있어서는 ‘善(아레테)’—곧 이데아의 세계에서 가장 고차원적이고 절대적인 실재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사용하는 ἀγαθωσύνη는 단순히 철학적이거나 도덕적인 ‘선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본성과 연결된 도덕적 정결함과 실천적 의로움의 총체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는 특히 바울 서신에서만 나타나는 신약성경의 독특한 어휘입니다. 총 4회 등장하며 (롬 15:14; 갈 5:22; 엡 5:9; 살후 1:11), 모두 신자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선한 성품과 삶의 방향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중요한 것은 ἀγαθωσύνη가 단순히 ‘친절함’이나 ‘좋은 성격’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단어는 정의, 진리, 의로움과 결합된 적극적인 선함을 지향합니다. 즉, 무해한 사람이 아니라, 선한 일을 ‘실천하는’ 사람, 단지 피동적인 인격의 특성이 아니라, 악을 저지르고 파괴하는 흐름에 맞서서 의와 진리를 세우기 위해 행동하는 적극성을 포함합니다.

 

에베소서 5:9에서는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ἀγαθωσύνη)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고 합니다.
이 구절은 양선이 다른 열매들과 분리된 고립된 성품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장하는 진리 중심적 인격의 일부로서의 ‘빛의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ἀγαθωσύνη는

  • 하나님의 성품에서 유래된 본질적 선함이며,
  • 성령을 통해 신자에게 주어지는 도덕적 열매이며,
  • 진리를 기반으로 악에 대항하여 선을 실천하는 능동적 인격의 표지입니다.

 

성경 전체 속 양선의 통일성과 흐름

성경 전체에서 ‘양선’은 단순한 덕목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속성입니다. 시편 119편 6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여기서 ‘선하다’는 히브리어 tov(טוֹב)는, 단지 감정이나 주관적 호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본질적으로 ‘선함(goodness)’이라는 절대적 선언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문장은 이 tov의 반복입니다.
이는 창조의 질서 자체가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비롯되었고, 그 선함이 인간과 피조물에 본래적으로 부여되었다는 진리를 드러냅니다.


양선은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 안에 본래적으로 내재한 속성이며,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그 선함을 회복하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구속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신명기 6:18은 이렇게 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한 일을 행하라.”

이 구절은 율법적 순종이 단지 행위의 준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존재론적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삶으로 드러내야 하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육화(성육신) 하신 분입니다. 마태복음 5:16에서 예수님은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은 단지 예절이나 도덕적 규범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성품에 대한 참여(participation)를 의미합니다.


양선은 곧 하나님을 닮아가는 제자의 삶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19장에서 부자 청년이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말했을 때, 예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은 양선의 본질이 하나님에게만 존재하며, 인간이 선하다고 평가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유도적 반영임을 뜻합니다. 성령의 역사 안에서 신자는 이 하나님의 양선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그것을 세상 가운데 구체적 삶으로 번역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양선은 따라서 율법의 완성이 아니라,
복음의 실제가 드러나는 윤리적 실천이자 성령의 현존의 증거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백성의 외식적 경건을 비판하며 ‘선을 행하라’고 꾸짖었습니다(미 6:8).
여기서도 ‘선을 행하는 것’은 단지 좋은 일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을 실행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 모든 흐름은 성령 안에서 양선이라는 열매로 요약됩니다.

 

결국, 성경 전체는 양선을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되어,
창조–타락–구속–성화–영광의 흐름 속에서 신자의 인격과 삶 속에 심기고,
맺히고, 번져가는 거룩한 선함의 이야기로 드러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양선 – 성화의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로서 ‘양선(ἀγαθωσύνη)’은 단지 외형적인 선행이나 예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신자의 내면에 새롭게 심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참여이자 모방입니다. 다시 말해, 양선은 인간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있는 인격적 덕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 가운데 신자의 인격이 변화되어 나타나는 성화의 결과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는 ‘열매’는  신자가 노력하여 쌓은 도덕적 자산이 아니라, 성령과의 동행 속에서 자연스럽게 맺히는 결과물입니다. 열매는 씨가 심겨져야 맺히듯, 양선 또한 성령께서 먼저 신자 안에 선의 씨앗을 심으실 때 비로소 맺히는 성과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께서 “내 안에 거하라”고 하신 말씀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성령 안에 거하는 자는 악의 습성을 벗고, 선의 인격을 입는 변화의 과정을 살아갑니다.

성화는 단지 죄를 덜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이며, 그중 양선은 자신을 향한 은혜를 타인을 향한 선한 행실로 전환시키는 내적 구조의 변화입니다. 

 

이 양선은 두 방향에서 자라납니다.

첫째, 하나님을 더 깊이 아는 지식과 교제를 통해,
둘째, 인간 관계 속에서 반복되는 갈등과 인내를 통해.
따라서 양선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신자의 거룩한 책임의 징표입니다.

 

양선은 또한 ‘거룩한 실천’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성화의 열매입니다.
에베소서 2:10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는 곧, 신자는 창조 자체가 선한 일(good works)을 향해 지어졌다는 진술입니다. 성령은 이 창조적 목적을 회복시키기 위해 양선을 열매 맺게 하십니다.

 

이 양선은 단지 마음속의 선한 의도가 아니라, 구체적 행위, 말, 선택, 삶의 방식 속에서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증표입니다. 성화는 점진적인 과정이며, 양선 역시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자는 반복되는 연약함과 죄의 유혹 속에서 성령의 인도를 의지하며 한 걸음씩 선한 길로 걸어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양선은 성화의 실질적 기준이며, 신자의 삶이 진리 안에서 얼마나 빛을 품고 있는지를 판별하는 열매입니다.


 

양선의 특성 – 예수의 삶과 바울의 권면

예수님의 생애는 단지 ‘착한 행동’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 그 자체가 사람의 삶으로 구체화된 현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양선은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병든 자를 만지시고,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신 거룩한 접촉의 선함이었습니다.


그분은 거룩함을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둔 것이 아니라, 거룩함을 가지고 오히려 더러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셨고,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전통을 어긴다는 이유로 비판받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 행위를 ‘선을 행하는 것’(ἀγαθὸν ποιεῖν)이라 정의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있어 ‘선함’은 율법의 형식을 초월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실천적 정의였습니다.


그 선함은 때로는 고난을, 때로는 비난을 감수하며 이루어진 사랑의 행동이었습니다. 예수의 양선은 또한 죄인을 향한 용납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신 장면은, 죄를 정당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의 회복을 돕는 선한 개입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인 친절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거룩한 개입으로서의 양선입니다.

 

바울 또한 양선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로마서 12:21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며, 양선이 수동적인 미덕이 아니라 악과 싸우는 능동적인 선의 힘임을 밝힙니다. 에베소서 4:32에서는 “서로 친절하게 하며(χρηστοί),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라”고 권면하면서,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하신 것과 동일한 선함임을 연결합니다. 

 

또한 바울은 갈라디아서 6:1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여기서 ‘착한 일’은 단순한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유지하고 확장시키는 거룩한 책임을 의미합니다.
양선은 신자의 내면의 문제일 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할 가시적 증거입니다.

 

예수와 바울의 삶과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양선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닙니다.

  1. 관계적이다 – 양선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된다.
  2. 용납한다 – 양선은 죄인을 정죄하기보다 회복을 돕는다.
  3. 의롭다 – 양선은 정의 없는 관용이 아니라, 진리 안의 긍휼이다.
  4. 행동한다 – 양선은 감정이 아닌 실천으로 입증된다.
  5. 고난을 감수한다 – 양선은 때로 손해 보며, 대가를 치른다.

이 모든 특성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고, 성령 안에서 우리 속에 다시 구현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와 양선 – 빛을 드러내는 신자의 태도

교회는 단지 모임의 장소나 의례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렇기에 양선은 단지 개인의 덕목에 머물 수 없고, 공동체 안에서의 삶을 통해 그 진정성이 시험받고 열매 맺습니다.

에베소서 5:8–9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ἀγαθωσύνη)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여기서 ‘착함’은 바로 성령의 열매로서의 양선을 의미하며,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기준으로 주어집니다.

 

교회는 이 ‘착함’이 드러나는 영적 생태계를 이루어야 하며, 신자 각자가 그 안에서 빛의 매개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양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첫째, 상처 입은 자들을 돌보는 자세입니다.
갈라디아서 6:1–2에서 바울은 범죄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회복시키라고 권합니다.
이때 요구되는 태도가 바로 ‘양선’입니다.
양선은 문제 있는 사람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짐을 지고 회복시키는 태도로 드러납니다.

 

둘째, 공동체 안의 다양함을 포용하는 그릇입니다.
로마서 15:14에서 바울은 “너희가 모든 선함(ἀγαθωσύνη)으로 충만하여 서로 권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권면’은 지적이나 통제의 개념이 아니라,
선함에 기초한 서로의 성장을 돕는 건강한 돌봄의 문화입니다.
양선은 곧 공동체의 성장을 가능케 하는 비옥한 토양입니다.

 

셋째, 복음적 선함의 선교적 외연입니다.
마태복음 5:16은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양선이 교회 내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영적 발광체의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착한 일을 행하는 교회, 선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성도는
복음의 진리를 설교보다 더 강하게 증언합니다.

 

넷째, 공동체 내 분열을 막고 연합을 유지하는 힘입니다.
디도서 3:8에서는 “믿는 자들이 힘써 선한 일을 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선한 일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헌신하는 삶이며,
양선은 공동체 내부의 이기적 분열을 예방하고 하나 됨을 유지하게 하는 중심 인격입니다.

 

다섯째, 양선은 지도자의 자격 조건이기도 합니다.
로마서 12:9에서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합니다.
교회 지도자, 가정의 어른, 소그룹 인도자, 교사 모두는
단지 지식이 아니라 양선이라는 신적 성품의 열매로 교회를 이끌어야 합니다.

결국, 양선이 없는 교회는 친절해 보여도 가식적이 되기 쉽고,
양선이 충만한 교회는 비판보다는 회복이, 정죄보다는 권면이 중심이 됩니다.
양선은 교회가 교회 되게 하는 성령의 숨결입니다.


 

묵상과 적용 – 오늘의 신자에게 주는 양선의 실천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양선’은 세상이 추구하는 ‘호감형 인간’이나 ‘예의 바른 성격’을 훨씬 뛰어넘는 신적 성품의 열매입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만 시작되고, 성령 안에서만 자라며,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에만 드러나는 거룩한 선함입니다.

 

현대 사회는 ‘선함’을 종종 나약함이나 순응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양선은 오히려 악에 저항하고, 고난 속에서 선을 이루는 능동적인 용기입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바울의 명령은 양선이 내면의 미덕을 넘어서 세상 속에서의 영적 전쟁을 포함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양선은 첫째,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결단입니다.
선함은 타인을 위한 내어줌입니다.
누군가에게 시간과 관심을 주는 것,
상대의 실수를 덮어주는 것,
실수한 이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
이 모두는 양선의 실천입니다.
하지만 이 실천은 우리의 본성으로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하며,
기도와 말씀 안에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양선은 작고 은밀한 선행으로 드러납니다.
세상이 보지 않아도, 사람들이 칭찬하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의도를 지키며 행동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의 사람에게 맺히는 양선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선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새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셋째, 양선은 진리를 왜곡하지 않는 선함입니다.
성경의 선함은 진리와 떨어지지 않습니다.
잘못된 것을 모른 척하거나,
죄를 사랑으로 포장하지 않는 선함.
양선은 정의와 자비를 함께 붙드는 지혜로운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께서 그리 하셨듯, 우리도 진리 위에 선 선함을 배워야 합니다.

 

넷째, 양선은 관계 속에서 훈련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우리의 양선은 날마다 시험받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성화의 진보가 이뤄집니다.
양선은 말보다 삶으로,
결심보다 관계 속의 인내로 증명됩니다.

 

다섯째, 양선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옳음’을 외치면서도 ‘선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정치적 분열, 혐오의 언어, 이익만 추구하는 문화 속에서
신자는 선함을 무기로, 양선을 방패로, 사랑을 방법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작은 일상 속에서 드러내는 양선의 말 한 마디, 손길 하나가
복음을 전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양선은 예수님을 본받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그분은 선함 그 자체이셨고,
그 선함을 십자가에서 절정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분의 선함을 본받아
이 세상에서 빛으로, 향기로, 증인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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