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9가지 열매 8)온유(πραΰτης)
온유(πραΰτης)
-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Greek NT: Nestle 1904
- ὁ δὲ καρπὸς τοῦ Πνεύματός ἐστιν ἀγάπη, χαρά, εἰρήνη, μακροθυμία, χρηστότης, ἀγαθωσύνη, πίστις πραΰτης, ἐγκράτεια· κατὰ τῶν τοιούτων οὐκ ἔστιν νόμος
New International Version
- 22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forbeara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23gentleness and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헬라어 주해 및 의미 분석 – πραΰτης(온유)의 깊이
‘온유’는 갈라디아서 5장 23절에서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언급되는 헬라어 πραΰτης (prautēs)에서 유래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 전체에서 매우 독특하고 밀도 높은 의미를 지니며, 단순한 성격적 유순함이나 성미 좋은 태도를 넘어서 신적인 인격의 표출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πραΰτης는 어근 πραΰς (praus)에서 파생되며, 일반적으로는 ‘부드러움’, ‘유순함’, ‘겸손하고 억제된 성품’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고전 헬라어 및 헬레니즘 시대에 이 단어는 단지 소극적 감정 억제 상태가 아니라,
분노와 힘을 ‘절제’할 줄 아는 통제된 힘을 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령, 고대 그리스에서 πραΰς는 야생의 힘을 길들인 ‘온순한 말’(gentled horse)에 쓰였는데,
이는 잠재적 폭발력을 가지고 있으되 그것을 스스로 억제하는 고귀한 힘을 상징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이러한 의미를 더 확장하여,
온유를 단지 성격의 부드러움이 아니라 영적인 권위 아래 순복하는 내면의 질서로 이해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분의 주권에 겸손하게 자신을 맡기는 태도입니다.
온유는 결코 연약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강한 자만이 진정으로 온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감정, 특히 분노, 보복욕, 자기과시의 충동을 절제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온유함을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5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에서의 온유한 자들 역시 πραεῖς입니다.
여기서의 온유는 단지 착하거나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앞에 자아를 꺾고 순복하며 세상적 방식의 보복이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이 ‘성령의 열매’로 온유를 말할 때,
그는 단지 윤리적 덕목으로서의 온유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복종하는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인격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온유는 성령 안에 거할 때 생기는 내면의 안정성,
그리고 그 안정성에서 비롯되는 외적인 절제와 겸손함입니다.
이것은 단지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일 뿐 아니라,
자신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적 자세 전체를 포함합니다.
구약과 신약에서의 온유의 신학적 맥락
성경에서 ‘온유’는 일관되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자의 자발적인 복종과 자기절제의 영적 태도로 드러납니다.
그 의미는 단순히 조용하거나 다정한 성격이라기보다는,
힘을 지닌 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 자기를 낮추고 순종하는 존재의 상태입니다.
먼저 구약에서 온유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은 모세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여기서 ‘온유함’은 히브리어로 ʿānāw (עָנָו), 또는 ʿānî (עָנִי)에서 유래하며,
이는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자기 의지를 낮추는 자’를 뜻합니다.
모세는 광야 40년의 수많은 불평과 반역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와 뜻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을 통해 지도자로서의 온유함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 하나님께 중보하고 기도하며,
비난을 참아내고, 때로는 자기 생명을 백성 대신 내어놓을 정도의 겸손과 용서의 온유를 보였습니다.
시편과 잠언에서도 ‘온유한 자’는 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시편 37:11은 이렇게 말합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이는 예수님의 산상수훈(마 5:5)과도 연결되며,
세상의 힘이나 권리가 아닌 하나님께 순복하는 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신약에서는 이 온유함이 더욱 인격화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구현됩니다.
마태복음 11:29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은 자신이 온유하다고 선언하셨을 뿐 아니라,
실제 그의 삶에서 그것을 완벽히 실현하셨습니다.
그는 억울한 고소 앞에서도 입을 열지 않으셨고,
십자가 위에서도 조롱과 모욕을 참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해 중보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온유의 극치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온유를 신자들의 영적 성숙의 핵심으로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4:2에서 그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말하며,
온유가 공동체 내에서 사랑과 용납을 가능케 하는 성령의 통로임을 강조합니다.
또 갈라디아서 6:1에서는 범죄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회복시키라고 하며,
징계나 교정보다 앞서는 성령의 태도가 온유임을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구약에서의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 복종과 경외의 표현으로,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성육신된 온전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드러나며,
성령의 열매로서 오늘날 신자 안에 예수의 인격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열매 맺게 되는 덕성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의 온유의 신학적 맥락
성경에서 ‘온유’는 일관되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신자의 자발적인 복종과 자기절제의 영적 태도로 드러납니다.
그 의미는 단순히 조용하거나 다정한 성격이라기보다는,
힘을 지닌 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 자기를 낮추고 순종하는 존재의 상태입니다.
먼저 구약에서 온유를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인물은 모세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여기서 ‘온유함’은 히브리어로 ʿānāw (עָנָו), 또는 ʿānî (עָנִי)에서 유래하며,
이는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 ‘자기 의지를 낮추는 자’를 뜻합니다.
모세는 광야 40년의 수많은 불평과 반역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와 뜻에 자신을 맡기는 모습을 통해 지도자로서의 온유함을 실천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 하나님께 중보하고 기도하며,
비난을 참아내고, 때로는 자기 생명을 백성 대신 내어놓을 정도의 겸손과 용서의 온유를 보였습니다.
시편과 잠언에서도 ‘온유한 자’는 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시편 37:11은 이렇게 말합니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이는 예수님의 산상수훈(마 5:5)과도 연결되며,
세상의 힘이나 권리가 아닌 하나님께 순복하는 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신약에서는 이 온유함이 더욱 인격화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구현됩니다.
마태복음 11:29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은 자신이 온유하다고 선언하셨을 뿐 아니라,
실제 그의 삶에서 그것을 완벽히 실현하셨습니다.
그는 억울한 고소 앞에서도 입을 열지 않으셨고,
십자가 위에서도 조롱과 모욕을 참으며 오히려 그들을 위해 중보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온유의 극치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온유를 신자들의 영적 성숙의 핵심으로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4:2에서 그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말하며,
온유가 공동체 내에서 사랑과 용납을 가능케 하는 성령의 통로임을 강조합니다.
또 갈라디아서 6:1에서는 범죄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회복시키라고 하며,
징계나 교정보다 앞서는 성령의 태도가 온유임을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구약에서의 온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적 복종과 경외의 표현으로,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성육신된 온전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드러나며,
성령의 열매로서 오늘날 신자 안에 예수의 인격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열매 맺게 되는 덕성입니다.
예수님의 온유 – 그리스도의 인격으로서의 온유
온유는 단지 도덕적 미덕이나 소극적 성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전체를 이루는 근본적 성품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온유는 단순히 조용하고 부드러운 말투나 타인을 기분 좋게 대하는 태도를 넘어서,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복하며,
연약한 자를 품고 인내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거룩한 성품입니다.
마태복음 11:29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이 말씀에서 *온유(prautés)*는 겉으로 보이는 태도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예수의 본질적 인격임을 말해줍니다.
그분의 온유함은 억지나 계산이 없는 순결한 인격의 흐름이며,
죄인과 연약한 자, 병든 자에게 다가갈 때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의 얼굴이었습니다.
예수의 온유함은 특히 갈등과 폭력 앞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분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왜곡된 율법 해석에 대해 진노하셨지만,
그 진노조차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공의에 순복된 절제된 분노였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는 그토록 인간적인 공포와 고통의 시간을 지나셨지만,
결국 “내 뜻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며
자신의 생명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온유한 복종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때 베드로는 칼을 뽑았으나,
주님은 그를 만류하시며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하리라”(마 26:52)고 하십니다.
온유는 복수하지 않는 것,
정당한 권리마저 내려놓고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리는 내적 힘이라는 사실을 이 장면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된 자들,
세리, 창녀, 병든 자, 귀신 들린 자들을 향해
위엄으로 다가가시되 한없이 낮은 자세로 품으시는 온유함을 지니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려는 자들 앞에서,
예수는 땅에 글을 쓰시며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는 정죄와 진실의 균형을 가진 강력하면서도 부드러운 온유의 권위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온유는 회복의 온유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향유를 부은 죄 많은 여인을 향해 사람들이 비난할 때, 예수는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눅 7:47)고 하며 그녀를 존귀히 세우십니다. 온유는 단지 용납이 아니라, 사람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온유는 세상의 힘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힘입니다. 침묵으로도 통치하고, 낮아짐으로도 구원을 이루며, 자기를 주장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길이 바로 온유의 방식입니다.
예수는 그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도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 온유를 닮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로 주어지는 축복이며, 오늘 우리가 세상과 교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 방식의 권위와 성숙의 시작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온유 – 성화 속 온유의 출현
온유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덕목이 아닙니다.
사람의 본성은 권리 주장에 익숙하고,
억울함을 풀기 위해 저항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충동에 지배받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온유를 성령의 열매라 했습니다.
이는 인간적 수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자라나는 초자연적 성품의 표현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회복하시는 분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그리고 온유가
‘열매’(καρπός, karpos)라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단수형으로 사용되어,
성령의 여러 덕목들이 분리된 기능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 속에 통합적으로 자라나는 생명임을 암시합니다.
성령이 임재하실 때, 신자의 내면에서는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힘이 자라납니다.
그 힘은 분노 앞에서 조용히 침묵할 수 있는 용기,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억지로 변명하지 않는 절제,
그리고 갈등 상황에서 기꺼이 상대를 품으려는
예수의 태도를 따르는 복음적 선택으로 나타납니다.
성화(聖化)의 길은 곧 자아가 죽는 길입니다.
온유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제자의 길 속에서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의 성격과 감정, 가치 판단을 복음에 복속시키는 과정 속에서 자라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부당하게 평가하거나 무례하게 대할 때,
육신은 즉시 보복하려 하고 말로 상처를 주려 하지만
성령께 순복하는 사람은 그 감정을 하나님께 가져가며
기도 안에서 승화시킵니다.
이것이 곧 온유입니다.
즉, 자기 통제가 아니라 성령 통제에 맡기는 마음의 태도입니다.
또한 온유는 말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잠언 15:1은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일으키느니라”고 합니다.
성령의 온유는 사람의 말을 변화시키고, 가정과 공동체 속에서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를 이루는 영적 능력으로 작동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세상의 가치로는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목소리가 크지 않고,
자신을 앞세우지 않으며,
때로는 이용당하거나 약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이야말로 예수의 형상을 닮은 자들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속에서 조용히 일구는 숨은 일꾼들입니다.
온유는 특히 영적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디도서 1장에서 바울은 감독과 장로에게
자기 절제와 온유함을 갖출 것을 강조합니다.
지도자는 권위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온유로 섬기며 복음의 질서를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온유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훈련된 삶이며,
예수의 성품이 내 안에 열매 맺도록 매일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놓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온유 – 갈등과 섬김의 방식
온유는 결코 개인의 성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온유는 공동체 안에서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온유는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시험되고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2에서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온유’는 겸손과 오래 참음, 사랑과 긴밀히 연결되며,
공동체 내에서의 인내와 화해, 용납의 전제가 되는 성품으로 강조됩니다.
즉, 온유하지 않으면 용납도 어렵고,
오래 참음도 불가능하며,
결국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교회는 다양한 배경, 성격, 은사를 지닌 사람들이 함께 모여 하나의 몸을 이루는 곳입니다.
이 안에는 오해도 생기고,
때로는 비교와 질투, 잘못된 말들이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온유한 자는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상대방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그를 위해 중보하며,
하나님께서 이 공동체를 어떻게 인도하실지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1에서도 말합니다.
“사람이 어떤 범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런 자를 바로잡고…”
이 말씀은 온유가 단지 갈등을 피하는 수단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온유는 죄를 직면하되 사랑으로 권면하고, 정죄가 아닌 회복을 선택하는 힘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진리를 타협하지 않지만,
진리를 말할 때도 사랑과 긍휼을 잃지 않습니다.
또한 온유는 ‘섬김의 방식’이 됩니다.
온유한 지도자는 공동체를 강압적으로 몰아붙이지 않고,
말없이 기다리며,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섬깁니다.
그는 소리 지르기보다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자신의 명예보다 공동체의 유익을 더 우선시합니다.
이런 지도자 아래 있는 성도들은 자유롭고 안전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더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가정에서도 온유는 결정적인 덕목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
배우자가 서로를 대할 때,
온유는 말보다 큰 영향을 미칩니다.
과격한 말은 마음을 닫게 하지만,
부드럽고 절제된 말은 오히려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온유는 때로 외로워 보이고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가장 강한 사람, 가장 깊이 뿌리내린 성숙한 자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 온유함은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지키는 성령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내 감정과 말과 태도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게 하소서.
내가 먼저 내려놓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이해하게 하소서.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내 안의 온유함이 주의 임재를 전달하게 하소서.”
온유와 참된 권위 – 세상과 구별된 힘
세상은 힘 있는 자를 따르고, 목소리 큰 자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반대로 작동합니다.
참된 권위는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겸손한 인격과 절제된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성령의 열매인 온유는 바로 이 거꾸로 된 권위,
즉 하늘의 권세가 사람 안에 머물 때 나타나는 고요한 힘입니다.
예수님은 ‘권세 있는 자’(exousia)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말에는 능력이 있었고,
그분의 침묵에는 더 큰 위엄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시험하고 공격했지만,
예수는 결코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 변명하지 않으셨고,
침묵으로 진리를 증거하셨습니다.
그 온유함이 곧 십자가 위의 권위이며,
죽음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능력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서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너희를 권하노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위도, 신학자의 지식도 아닌
그리스도의 온유로 권면합니다.
이는 곧 바울 자신이 예수의 온유를 덧입었을 뿐 아니라,
그 온유함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사역의 권위였음을 보여줍니다.
온유한 자는 대개 세상에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를 들어 쓰십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팔처럼 울리는 사람이 아니라,
진흙처럼 부서져 빚어질 수 있는 사람을 통해
그분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교회와 가정, 사회 속에서 온유한 자는
주도권을 가지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리를 찾으며,
자기의 유익이 아닌 공동체의 유익을 선택합니다.
그런 자는 말이 없어도 신뢰를 얻고,
자리를 주장하지 않아도 존중받게 됩니다.
온유는 보이지 않는 권위이며,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의 가장 깊은 힘입니다.
묵상과 기도 – 온유한 자로 살기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
온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오늘도 내 영혼 앞에 그려봅니다.
그분은 낮은 곳에 임하셨고, 소리 지르지 않으셨으며,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 온유함은 연약함이 아니라
하늘의 권세가 담긴 거룩한 침묵이었고,
지상의 왕국이 결코 흉내낼 수 없는 하늘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자주
말로 이기려 하고, 내 감정을 정당화하며,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기보다는
내 힘으로 풀려 했는지 모릅니다.
주님, 나는 온유하지 못했습니다.
분노가 내 안에 쌓일 때,
오해 앞에서 참지 못할 때,
사랑보다 자존심이 앞설 때,
나는 온유함을 잃고 있었습니다.
주님,
성령께서 내 마음 깊은 곳에
예수의 온유를 심어주시옵소서.
말보다 침묵할 줄 아는 지혜를 주시고,
정당한 항변보다 기도로 승화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갈등을 향한 판단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향한 긍휼을 먼저 품게 하소서.
내가 먼저 용서하게 하시고,
내가 먼저 낮아지게 하시며,
내가 먼저 중보하게 하소서.
억울함을 설명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믿게 하시고,
속히 변명하지 않아도
주께서 진리의 빛으로 일하심을 신뢰하게 하소서.
온유는 내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니 내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 오늘도
나는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께 나를 온전히 맡깁니다.
내 안에서 예수의 인격이,
예수의 눈빛이,
예수의 말투와 행동이 드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주님의 온유가 복음의 향기로 퍼져가게 하옵소서.
아멘.
성령의 9가지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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