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9가지 열매 9)절제(ἐγκράτεια)
절제(ἐγκράτεια)
- 갈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Greek NT: Nestle 1904
- ὁ δὲ καρπὸς τοῦ Πνεύματός ἐστιν ἀγάπη, χαρά, εἰρήνη, μακροθυμία, χρηστότης, ἀγαθωσύνη, πίστις πραΰτης, ἐγκράτεια· κατὰ τῶν τοιούτων οὐκ ἔστιν νόμος
New International Version
- 22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forbeara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23gentleness and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헬라어 원어와 언어학적 의미 – ἐγκράτεια (enkrateia)
‘절제’라는 단어로 번역된 헬라어 ἐγκράτεια (enkrateia)는 ‘자기 자신을 다스린다’는 의미의 동사 ἐγκρατεύομαι (enkrateuomai)에서 유래한 명사입니다. 이 단어는 ἐν(en, 안에)과 κράτος(kratos, 힘, 권세)가 합쳐진 합성어로, 직역하면 ‘내부의 힘으로 자신을 지배함’, 곧 ‘자기 자신 안에서 힘을 행사함’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 철학에서도 중요한 윤리적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절제를 인간의 덕(ἀρετή, aretē) 가운데 하나로 보았으며, 특히 육체적 욕망을 이성적 통제로 제어하는 능력으로 규정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절제를 “육체적 쾌락에 대한 자발적 자제”라 정의하며, 탐욕이나 방종의 반대에 서 있는 자기 통제력으로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단순한 자기 통제를 넘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영적 자율을 뜻합니다.
곧, 절제는 ‘내가 나를 억제하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주신 질서와 주권 앞에 순복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23에서 절제를 성령의 열매라 하며, 이 덕목이 단지 인간의 의지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초대교회 교부들 역시 절제를 단순한 금욕주의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는 절제를 “자기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열정을 드리는 과정”이라고 말하며, 절제가 자기부인의 훈련을 넘어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믿음의 태도라고 해석했습니다.
절제는 욕망의 부정이 아니라, 욕망의 질서 재배치입니다.
나쁜 욕망을 제거하는 것뿐 아니라,
선한 열정조차도 하나님 앞에 올바른 자리에 두는 것이
절제의 본질입니다.
이 점에서 절제는 금욕보다 훨씬 적극적인 덕목이며,
삶 전체를 복음에 조율하는 영적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 본문과 신학적 맥락 – 절제가 향하는 방향
‘절제’는 성경 전반에서 그리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에서 본질적인 영적 특성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ἐγκράτεια(enkrateia)는 매우 신중하게 사용되며, 그 사용마다 거룩함과 성숙의 상태, 그리고 종말론적 준비와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대표적으로 바울은 디도서 1장 8절에서 장로의 자격에 대해 언급하며 그가 “절제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할 줄 아는 자”(ἐγκρατῆ)여야 함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습관을 조절하는 기술이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며 복음을 대표하는 사람의 내면 상태로서의 절제입니다. 지도자의 영향력은 행동보다 그 마음의 절제된 태도에서 나오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사도행전 24장 25절에서는 바울이 총독 벨릭스 앞에서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하여 말하자 벨릭스가 두려워했다고 기록됩니다. 여기서 절제는 의(義)와 함께 하나님의 심판 앞에 인간이 준비되어야 할 중요한 윤리적 주제로 강조됩니다. 이것은 절제가 종말론적 관점에서의 삶의 정돈임을 보여줍니다.
즉, 우리는 그날을 준비하며, 모든 욕망을 하나님의 통치에 두려움과 사랑으로 복종시키는 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후서 1장 6절에서도 절제는 매우 중요한 신앙 성장의 단계로 나타납니다.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
여기서 절제는 지식과 인내 사이에 있으며, 신자의 내면 성숙이 지적 습득에서 실제 훈련으로 넘어가는 관문으로 기능합니다.
지식이 삶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공허하며, 절제가 없으면 그 지식은 오히려 교만과 자기 과시로 흐르기 쉽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도 절제의 삶을 고백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서 그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라고 하며,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도 늘 절제하고 훈련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이유가 자신이 전한 복음에서 실격당하지 않기 위함이라 밝힙니다.
이는 절제가 단지 유익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기 위한 거룩한 의무임을 말합니다. 성경은 절제를 ‘자기 감정과 욕망을 스스로 억누르는 고행적 수련’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자신을 질서 있게 다스리는 성령의 역사이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결국, 성경적 절제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선택과 행동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 두는 영적 행위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절제 – 자아 통제인가 성령 통제인가
우리는 흔히 절제를 ‘자기 통제’(self-control)라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자제력과 훈련, 인내, 고행 등으로 연결짓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이 언급한 절제(ἐγκράτεια)는 단순한 자기 절제 이상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는 나무가 스스로 맺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씨앗에서부터 뿌리 내리고, 줄기와 잎을 통과해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결과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로서의 절제는
단순한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께 순복하는 결과로 주어지는 인격의 변화입니다.
이 점에서 절제는 ‘내가 나를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나를 맡김으로써 성령이 나를 다스리게 하시는 영적 통치입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절제는 자기 통제를 넘어 성령 통제(Spirit-control)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욕망이나 권리를 결코 앞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돌을 떡으로 만들라 유혹했을 때, 그분은 능력이 없어서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대한 절대적 순복과 통제된 의지로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절제는 성령 안에서 온전한 복종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육체를 고행적으로 괴롭히는 행위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로서의 책임감을 따라 성령 안에서 자신을 훈련시키는 절도 있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는 ‘성령의 목적’을 위해 ‘자기 자신’을 훈련과 절제로 다스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결코 성품 훈련의 결과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매일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때, 성령께서 그 안에 새 생명의 질서를 심으시는 은혜의 흔적입니다. 그래서 절제는, ‘내가 더 노력해야지’라는 결단 이전에, ‘주님, 나는 나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께서 나를 통치해 주십시오’라는 깊은 고백과 의탁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결국 절제는 자율이 아니라 위탁이며, 능력이 아니라 주권 앞에의 항복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다스릴 수 없기에, 성령께 나를 맡깁니다. 성령께서 나의 감정과 욕망, 생각과 선택의 방향까지 이끄소서.”
예수의 절제 – 십자가 앞의 자기부인
예수 그리스도는 절제의 최고이자 완전한 모범입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셨고, 전능하셨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셨지만, 그 능력을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부인하고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 절제의 영을 가장 깊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그분이 능력을 절제하신 장면들이 반복됩니다. 무리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할 때 그분은 산으로 물러나셨고(요 6:15), 사람들이 그를 배척하고 죽이려 할 때에도 천사를 불러 그들을 멸하실 권세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마 26:53). 십자가 앞에서 그는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눅 22:42)라 기도하며 자기 의지마저 아버지께 복종시켰습니다.
이 절정의 순간은 절제의 절정이며, 자기를 죽이는 절제, 곧 사랑을 위한 자기부인의 정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 않으셨고, 억울함을 변론하지 않으셨으며, 악한 자 앞에서 침묵하셨습니다(사 53:7). 이 침묵은 약함이 아니라 하늘의 권세를 철저히 하나님의 때와 방식에 맡기는 신적 절제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절제를 감정 조절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절제는 단지 감정을 억누르는 차원이 아니라, 삶 전체를 십자가에 일치시키는 자기희생적 절제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보다 하나님이 하라 하신 일을 선택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오라”는 조롱 앞에서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침묵은 구원을 위한 침묵이었고, 우리의 구속을 위한 고요한 절제의 절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절제는 고통을 참고 견디는 인내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붙들고 자기 욕망을 내려놓는 사랑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온전한 절제가 인류의 구원을 이루는 열매로 맺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절제를 묵상할 때, 우리는 그저 생활 속 작은 훈련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삶을 통해 우리는 봅니다.
절제는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
십자가를 지는 것,
하나님의 뜻 앞에 나의 뜻을 침묵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므로 참된 절제는
“나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겠다”는 성숙한 판단이며,
“나는 옳지만 주장하지 않겠다”는
예수의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결정입니다.
절제와 훈련 – 믿음의 성숙과 도제적 삶
절제는 단번에 완성되는 덕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이지만, 동시에 삶 속에서 길러지고 단련되는 훈련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서 절제는 순간의 결단이 아니라 평생의 연습, 곧 성화의 과정 속에서 다듬어지는 인격의 조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신앙의 삶을 ‘경주’ 또는 ‘군사 훈련’에 비유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말합니다.
“운동장에서 다름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 받는 자는 하나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고전 9:24–25).
여기서 절제는 경주자의 훈련, 승리를 위한 집중, 목표를 향한 지속적인 자기 조절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빚어지는 도공의 진흙과도 같습니다. 그릇이 되기 위해 불에 들어가야 하듯, 절제의 인격은 자신의 욕망이 부서지고, 감정이 다듬어지며, 선택이 정제되는 훈련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자랍니다. 하루하루가 훈련입니다.
말의 습관, 시선의 방향, 먹는 것, 보는 것, 분노하는 방식, 기다림의 태도까지 절제는 신자의 전 영역을 다스리는 총체적 삶의 훈련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절제는 ‘수동적’ 덕목이 아닙니다.
절제는 적극적으로 삶의 패턴을 하나님 중심으로 재배치하고,
반복되는 결단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내 삶에 심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훈련은 혼자 이뤄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성령께 배우는 도제(lit. disciple)의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도 히브리서 5장 8절에서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다”고 기록됩니다.
절제는 고난 속에서 길러지는 영혼의 순종 훈련이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을 자주 들이대고,
반복적으로 굴복시키는 신앙적 체력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단지 ‘하지 말라’는 금욕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지 않을지’가 아니라
‘무엇을 선택할지’를 위한 질서의 재정립입니다.
그래서 절제는 결핍의 결과가 아니라,
충만한 사랑과 소망 속에서 절제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 훈련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감정이 아니라 훈련된 인격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기도, 말씀, 침묵, 금식, 섬김, 회개의 훈련을 통해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조금씩 맺어갑니다.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일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이행하는 여정을 걷습니다.
묵상과 기도 – 절제의 삶을 위하여
절제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잊혀진 덕목 중 하나입니다.
무한한 선택의 자유와 자기표현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절제는 구시대적이고 억압적인 미덕처럼 비춰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말합니다.
참된 자유는 절제 속에서 피어나며,
절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자의 거룩한 질서라고.
우리는 유혹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즉각적인 만족과 자극의 홍수 속에서
욕망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오히려 권리로 주장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거슬러 오릅니다.
그는 침묵을 선택하며, 절제를 통해 더 깊은 기쁨과 더 큰 자유를 누립니다.
절제는 모든 순간의 결단입니다.
작은 식탁에서의 선택, 말 한 마디의 멈춤, 화를 억누르는 한 걸음, 스크린 앞에서 눈을 돌리는 침묵,
그 모든 자리에서 절제는 성령께 나를 내어드리는 예배가 됩니다.
우리는 다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참지 못하고, 충동에 휘말리고, 뒤늦은 후회 속에 자신을 책망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서 지금도 일하십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다”(잠 25:28)는 말씀처럼, 우리의 내면을 무너뜨리는 충동의 파도 속에서도 성령은 우리의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고 계십니다.
절제는 사랑과 연결된 미덕입니다. 내가 하지 않기로 결단하는 모든 절제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고백이며, 이웃을 더 섬기기 위한 낮아짐입니다. 이 절제가 쌓일 때,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드러나고, 세상은 그 절제 속에서 참된 복음을 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기도
주님, 나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나는 내 자신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욕망과 감정에 쉽게 흔들리고,
자신을 기준 삼아 쉽게 판단합니다.
그러나 주님, 성령의 열매로 절제를 주옵소서.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따르게 하시고,
내 감정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순복하게 하소서.
모든 순간마다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를 먼저 묻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절제를 통해 사랑하게 하시고,
절제를 통해 순종하게 하시며,
절제를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소서.
내 욕망의 왕좌를 내려놓고
성령께 나를 드리는 예배의 삶을 살게 하소서.
오늘 하루도,
말에 절제하게 하시고,
식탁에서 절제하게 하시며,
감정 앞에서 절제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의 침묵과 선택과 포기가
모두 주를 향한 사랑의 고백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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