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듯 다른 우리, 김영웅 / 선율
닮은 듯 다른 우리
김영웅 / 선율
글이 정교하고 고상하다. 저자의 블로그에 올라오는 적지 않은 독서와 글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일취월장하는 그의 깊은 안목 또한 존경스러웠다. 언젠가는 본업에 충실한 글이 나오리라 기대했다. 이렇게 일찍 나의 손에 들려졌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 모른다.
매우 도발적인 책이다. 생물학과 인문학적 소양이 겸비된 저자답게 책은 두 주제를 통섭적으로 다룬다. 거기에 예리한 통찰력이 추가되었다. 이과와 문과를 오가는 통섭적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생물학과 인문학에 문외한(門外漢)인 필자에게는 부담스럽지만 보람된 일도 없었다. 필자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제1권의 1/3을 읽다 포기했기 때문 소설도 쉽게 도전하기 힘들다. 초반부터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이질적 언어로 기록된 수많은 낯선 이름에 질식되어 더 이상 읽지 못했다. 하지만 저자는 꿋꿋하고 성실하게 두 영역을 씨줄과 날줄로 꼼꼼히 엮어냈다.
이 책은 생물학자의 관점으로 읽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기이한 이 조합은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저자를 조금밖에 모르고, 다독가이자 다작가인 저자의 글을 적지 않게 읽은 필자로서는 낯선 조합은 아니다. 그럼에도 생물학자와 러시아 대문호인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의 만남은 기이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신앙적 관점에 보태지면 내용은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카오스적 상황이야말로 이 책이 주는 매력이자 위대함이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생물학과 세포학, 분자생물학을 넘나다는 스펙터클한 박시함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하지만 일반 독자라면 굳이 모든 내용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해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좋다는 건 잔소리다. 비록 낯선 용어와 세계가 어렵게 느껴지지만 저자의 주도면밀한 구성과 친절한 설명 때문에 얹힐 정도는 아니다. 의외로 생물학의 풍부한 육즙을 맛볼 수 있는 즐거움도 허락한다.
생물학을 전공했을 뿐 아니라 아직도 현장에서 암 관련 연구를 진행 중인 저자는 생물학자의 눈으로 표도르와 아들들의 성향을 분석한다. 물론 정확한 판단이나 진단은 불가능하다. 소설 자체가 그러한 의도로 쓰인 것도 아니고 저자인 도스토옙스키가 생물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관점 자체가 기발하고 도전적이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성품이나 성향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읽어내려 해다는 점에서 낯선 즐거움을 선사하다. 한 아버지와 세 명의 아내에게서 태어난 네 명의 아들들은 닮은 듯 다른 삶을 살아간다. 저자는 조심스럽게 등장인물들과 생물학의 접점을 찾아 연결시킨다.
책을 풀어 나가는 큰 기둥은 센트럴 도그마이다. 센트럴 도그마는 유전정보의 방향이 DNA에서 RNA로, RNA에서 단백질로 진행된다는 원리이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이 이루어지면 수정란이 된다. 수정란은 줄기세포로 이후 모든 분열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세포의 시작 세포이다. 이후 피부와 머리카락으로 분화되는 체세포가 된다. 수정을 이루어지는 생색 세포는 증식이 목적인 체세포와 다르게 ‘유전정보 전달’(28쪽)이 목적이다. 체세포가 한 번의 분열로 두 개의 세포가 만들어지는 반면 생식 세포의 분열은 ‘하나의 세포가 두 번의 분열을 거쳐 네 개의 세포를 만들어 낸다.’(29쪽)
저자는 세포 분열의 특징을 통해 표도르의 네 아들의 성향을 비교한다. 표도르의 성향은 어떤 아들에게 가장 많이 전달되었을까? 물론 답은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소설 안에서 나타난 아들들의 특징을 면밀하게 훑어 나간다. 흥미롭게도 표도르를 ‘돈 DNA’와 더불어 ‘광대 DNA’ ‘호색 DNA’ ‘무정’ ‘DNA’로 분류한다. 이러한 DNA가 모든 아이들에게 전달될까? 하지만 DNA 복제 오류가 발생한다. 하지만 오류는 절대 크지 않다. 세포들은 ‘가공할 만큼의 정화도’(65쪽)를 유지한다. 잘 전달된 정보는 아버지와 아들이 닮게 한다. 난해한 생물학 용어나 개념을 알지 못하는 자녀들은 부모를 닮는다는 것을 잘 안다. 외모뿐 아니라 심지어 성격까지도.
250쪽 분량의 작은 책인데도 읽고 나면 한라산 백록담 앞에 서 있는 듯한 웅장함을 갖게 한다. 생물학의 세계에 잠시 머물다 온 느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 읽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런 느낌이 든다. 내년에는 중단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를 다시 읽어야겠다. 생물학자의 관점으로 읽은 뜻밖의 선물을 앞으로 필자의 성경 읽기에도 적지 않은 도움을 줄 것 같다는 행복한 느낌이 든다. 올해가 가기 전 이 책을 읽는다면 새해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날는지도 모르겠다. 막판에 코로나 이야기가 한 부분만 들어가 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건 필자의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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