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우리는 왜 신학을 해야하는가?
[독서일기] 우리는 왜 신학을 해야 하는가?
2017년 6월 29일 목요일 하루 종일 비, 오다 그치다를 반복함
요즘처럼 공부하기 좋을 때가 또 있을까? 나처럼 영어도 못하고, 헬라어도 F 맞고, 히브리어는 경우 통과한 둔재들에게 말이다. 불과 15-6년 전만 해도 기독교 서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특히 외국의 번역된 책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뉴밀레니엄 시대가 도래하면서 출판사 사정이 나빠지기는 했지만 특이하게도 기독교 서적의 질은 두드러지게 높아졌다. 그건 아마도 해외에서 공부하고 온 석학들이 많아진 탔도 있고, 좋은 신학서적들이 많이 번역된 탓이기도 하다. 영어 원서 한 페이지 보는데 한 시간을 사전을 찾아가며 뒤적 거리는 나 같은 목회자들에게 한글로 번역된 책들은 그야말로 감로수와 같다. 또한 최근 신학 교수들의 서적 출판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이 번역된 책들과 비교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오늘 몇 권이 책들이 나의 손에 들어왔다. 먼저는 새물결플러스의 6월 시간들이다. 김균진 교수의 교회론인 <기독교 신학 4>이고, 치과의사 이철규의 직업 이야기를 다룬 <오늘은 그날처럼>, 그리고 J. 워너 월리스의 <베테랑 형사 복음서 난제를 수다하다>이다. <오늘은 그날처럼>를 먼저 읽었다. 지금까지 2/3 정도까지 읽었는데 상당히 고무적이다. 평범한 듯 일상을 꾸려나가는 의미 있는 이야기가 마음을 울린다. 제목 밑에 '어느 치과의사의 일터 신앙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그 주제가 딱 맞는 말이다. 이철규는 치과의사임에도 스스로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했고,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성경 신학까지 전공한 신학도이기도 하다. 그는 여는 글에서 '상상력'이란 단어를 썼다. 그가 말하는 상상력은 단순한 환상의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의 구속사이며,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서사이다. 어느 곳에 이르니 '일시 죽음 버튼'이 보인다. 바울의 자기 부인과 흡사한 것인데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만 사는 것을 말한다. 자기의 죽음은 곧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이 죽음이 있는 사람은 자기다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예수님처럼 반응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우리 안에 회개에 합당한 성품이 형성되어갈 것이다. 이러한 삶은 단순히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넘어 그리스도 동형의 삶이 되고 우리 속에 그분의 형상이 점차 모양을 갖춰가게 될 것이다."(44쪽)
글이 탄탄하다.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짜깁기한 것이 아니라 삶의 성실과 마음의 진정성이 파도처럼 울렁인다.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정직하기에 고단하고 원칙을 지켜야 하기에 피곤한데 영혼을 맑고 신앙은 단단해진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말은 아니었을까 싶다. 반석, 곧 깨끗하고 순수한 믿음의 고백 말이다. 어렵지 않다. 그냥 읽으면 된다. 신학의 힘이 느껴진다. 신학은 교리사나 조직신학, 사해문서 몇 번이 있다는 식이 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이다.
김균진의 교회론은 약간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교회론: 땅 위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적 공동체
여기서 주목할 단어가 있다. 하나는 '땅 위' 그리고 메시아적 공동체'. 신학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땅 위와 메시아적 공동체가 가지는 혁명적 의미를 알 것이다. 이 단어는 다분히 위협적이며, 혁명적인 뉘앙스를 가진다. 특히 메시아적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에서 선지자의 사명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단어다. 거짓과 탐욕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땅 위'를 강림하여 거짓을 드러내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혁명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부른다. 혁명적 사명을 이어가는 존재가 '교회'이다. 그래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혁명적이고, 세상에 위협적인 존재다. 김균진을 말한다. 복음은 원래 위험한 것이라고.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본래 불의 한 세계를 거부하는 묵시 사상의 개념으로, 당시 로마 제국에 사실상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119쪽)
왜 위험한가? 복음은 모든 것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귀족과 노예를 같이 형제라 부른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소유를 나눈다. 그래서 교회는 메시아적 공동체라 부르지만, 여기서 메시아는 '사랑'으로 치환된다. 그렇기에 교회의 표지 또는 실제는 '하나님의 사랑'(120쪽)에 있다. 저자는 이것을 '메시아적 사랑'(120쪽)이라 부른다. 신학은 삶을 명료하게 만든다. 삶을 통찰하고, 해석하고, 재정립하게 한다. 신학을 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레이그 바르톨로뮤의 <하나님께 소리치고 싶을 때 :욥기>(이레서원)은 고난에서 하나님을 보는 안목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다. 128쪽에 밖에 되지 않은 작은 소책자이지마 삶에 대한 통찰은 예리하고 무겁다. 고난은 지혜를 준다. 지혜는 자신의 유한성과 한계를 삶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지혜는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발현된다. 저자는 마지막 이렇게 결론짓는다.
"다른 이들의 삶을 치유하는 좋은 상담자가 되려면, 먼저 자신이 그 상처를 직시하고 치유된 경험이 있어야만 한다. 우리에게는 좋은 목회자와 상담자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기억하자. 그런 이들을 얻으려면, 그들에게 먼저 단련의 용광로를 통과할 여지를 허락해 주어야 한다."(112쪽)
지금은 교회론이 필요하다. 교회가 무엇인지, 존재론적 물음을 넘어 존재방식도 다시 질문해야 할 때가 되었다. 신학은 이러한 우리의 질문에 절적한 도움을 줄 것이다. 출판사가 계속 흥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기독교 출판사들은 하나님의 입이 되고 손이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삶의 신학을 위해 기독교 출판사의 흥함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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