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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2:15~17 세상의 본질: 정욕과 자랑

샤마임 2025.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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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을 선택하는 삶

요한일서 2장 15절부터 17절은 신자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과 그 가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분별해야 하는지를 강력하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짧은 구절들을 통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명령을 주며, 그 이유와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본문은 단순한 도덕적 경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존재적 정체성과 종말론적 소망을 강조하는 영적 분별의 요청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이 단지 금욕주의적 요구가 아니라, 참된 생명과 영원한 기쁨을 향한 부르심임을 깨닫고자 합니다.

 

세상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15절은 단호한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여기서 '세상'(κόσμος, 코스모스)은 단지 피조물로서의 세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체계, 인간 중심의 가치관, 죄로 물든 욕망의 세계를 뜻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분의 뜻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문화적, 정신적 체계를 포함합니다.

 

'사랑한다'(ἀγαπᾷ, 아가파이)는 동사는 아가페 사랑에서 파생된 것으로, 깊은 헌신과 충성, 자기 전적인 몰입을 의미합니다. 요한은 이처럼 전심으로 세상을 따르고 의지하며 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아버지의 사랑과 공존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사랑이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성과 소속의 문제임을 말합니다. 한 사람은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으며,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라는 분명한 영적 구분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 세상을 '자기 사랑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멸시하는 도성'으로,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기를 멸시하는 도성'으로 묘사했습니다. 요한의 이 권면은 바로 그러한 신학적 통찰을 요약하는 진술이며, 신자의 삶이 어느 편에 속할 것인지 분명히 선택해야 함을 요구합니다.

 

세상의 본질: 정욕과 자랑

16절은 세상의 본질을 세 가지로 분해하여 설명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첫째는 '육신의 정욕'(ἡ ἐπιθυμία τῆς σαρκός, 헤 에피튀미아 테스 사르코스)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하나님을 벗어나 자율적으로 추구되는 모든 욕망을 말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 성적 욕망, 생존 본능 등 그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그것이 통제되지 않고 자율화될 때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반역이 됩니다.

 

둘째는 '안목의 정욕'(ἡ ἐπιθυμία τῶν ὀφθαλμῶν, 헤 에피튀미아 톤 오프탈몬)입니다. 이는 눈으로 보는 것에 의해 유발되는 탐욕을 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다'(창 3:6)고 여겼던 바로 그 유혹입니다. 이는 외적 화려함, 물질적 풍요, 세속적 성공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이생의 자랑'(ἡ ἀλαζονεία τοῦ βίου,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입니다. '알라조네이아'는 본래 허풍, 자랑, 과시를 뜻하는 단어로, 자신의 능력과 지위, 소유에 근거한 허위적 자기 확신을 의미합니다. '비오스'(βίος)는 단순한 생명이라기보다는 삶의 방식, 즉 사회적 지위를 포함한 인생의 조건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세속적 성공과 지위를 근거로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죄된 삶의 구조를 형성합니다. 육신의 욕망은 눈을 통해 자극받고, 그것을 이루었을 때 이생의 자랑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인간 내면의 깊은 부패를 드러내며,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으로 살아가려는 인간의 본질적 타락을 요약합니다. 요한은 이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며, 결국 그것들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임을 분명히 합니다.

 

지나가는 세상과 영원히 거하는 자

17절은 이 본문의 결론으로, 세상 사랑의 헛됨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의 영원한 가치를 대조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서 '지나간다'(παράγεται, 파라게타이)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세상과 그 정욕이 이미 쇠퇴하고 있으며 사라지고 있다는 진행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세상의 화려함과 욕망은 영원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바뀌고 소멸되는 임시적, 덧없는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는 종말론적 시각에서 더욱 분명해지며, 신자는 지금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아야 함을 말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ὁ ποιῶν τὸ θέλημα τοῦ θεοῦ, 호 포이온 토 텔레마 투 데우)는 '영원히 거한다'(μένει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메네이 에이스 톤 아이오나)고 선언됩니다. 이는 단지 죽은 후 천국 간다는 차원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에 참여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누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미래의 보상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도 누리는 실재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 안에서 시작됩니다.

 

칼빈은 이 구절에 대해 "세상의 부귀영화는 그림자와 같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은 영원한 실체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허망한 그림자를 붙들지, 아니면 영원한 실체를 선택할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신자의 삶은 바로 그 선택 위에 세워지며, 참된 복은 세상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결론

요한일서 2장 15절부터 17절은 세상 사랑이 하나님 사랑과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며, 신자의 삶이 영원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세상의 정욕은 본질적으로 사라질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영원히 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삶의 방향을 분명히 하고, 매일의 선택 속에서 영원을 선택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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